"공산당이 싫다"고 했던 이승복 어린이가 우리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것처럼 대중영웅숭배는 국민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개인을 떠받들고 그의 삶을 본받을 것을 강요했으며, 충정만이 강조된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적 영웅은국가에 필요한 측면만이 부각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의 "대중독재 국제연구 네트워크"가 2004, 2005년에개최한 국제학술대회의 연구 성과와 중국과 북한의 대중영웅을 다룬 글을 추가하여 구성된 책이다.
■ 저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RICH: Research Institute of ComparativeHistory and Culture)는 "제국과 민족", "자본과 노동", "독재와 민주주의", "근대와 탈근대" 등 한국 사회의 이론적 쟁점과현실적 이슈들을 비교사의 관점에서 고찰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연구소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그거울에 비추어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을 "특수"로 자리매김하는 유럽중심주의적 비교사의 틀을 넘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그리고 서구의 역사를"얽혀있는 역사(Histoire Croise)"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의 주요 연구기관들이 참가하는 국제적인 연구네트워크의 주관 연구소로 현재 "대중독재" 프로젝트와 "전쟁과 기억" 프로젝트, "문화적 전이로서의 민족과 민족운동"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 필자
권형진(건국대 강의 교수,독일현대사)
이상록(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현대사)
이종훈(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 교수,서양근현대사)
이진일(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 교수, 독일현대사)
이학수(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 교수,프랑스현대사)
차문석(성균관대 강사, 정치학)
황보영조(경북대 사학과 교수, 서양현대사)
■ 차례
엮은이의말
1부 새로운 "대중영웅"이 등장하다
호르스트베셀 : 만들어진 나치의 "대중영웅"
레이펑, 길확실 : 마오쩌둥, 김일성 체제가 만들어낸 영웅들
이승복 : 나는 공산당이싫어요의 정치학
모로조프, 스타하노프, 슈미트 : 스탈린 시대의 영웅들
2부 역사영웅이 새롭게 거듭나다
이순신 :"민족의 수호신" 만들기와 박정희 체제의 대중 규율화
비스마르크 : 히틀러가 재구성한 철혈재상의 기억
페탱 : 비시 정권의 "르마레샬" 신화 만들기
성녀 테레사 : 프랑코 체제가 전유한 가톨릭의 종교영웅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
1부 새로운 ‘대중영웅’이 등장하다
이승복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정치학
이승복 사건의 진실 게임
2004년 10월 28일. ‘이승복 사건 오보 논란’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원고인 조선일보 사 측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리면서 잊혀져가던 이승복의 이름이 다시 한국사회에서 회자되었다. 이승복이 무장공비의 위험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가 “기자의 현장 취재도 없었던 ‘작문 기사’였다”는 피고측의 의혹에 대해 재판부는 “「조선일보」 보도는 현장 취재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지으며 피고인 김주언, 김종배 씨에게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과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상고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 진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법정 진실 게임에서는 조선일보 사가 진실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진실 게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정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을까?”, “진짜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 취재를 했을까?”라는 질문과 공방은 이 사건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은폐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이승복이라는 어린이가 무장공비의 총칼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발언할 수 있었던 사회ㆍ역사적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그 발언이 전 사회적으로 추앙되고 그의 행동이 숭배되었던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였는가. 국가가 이승복이라는 평범한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일련의 과정은 어떠했으며, 어떤 효과를 노리고 있었던 것인가. 대중으로부터 나온 이승복이라는 영웅이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순교자가 된 소년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북한 측 남파 공작원들에 의해 열 살 소년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네 명이 살해되고 두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다룬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공비’들이 산골 외딴집인 이승복 가족의 집에 침입, 가족을 협박하여 강냉이를 먹고 가족 다섯 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그런데 그 때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며 얼굴을 찡그리자 공비들이 이승복의 어머니를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돌덩이로 머리를 내리쳐 숨지게 하고, “입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며 이승복의 입을 찢은 뒤 돌로 내리쳐 죽였고, 두 동생도 돌로 짓이겨 살해했으나, 함께 돌로 가격당했던 형 승권(「조선일보」에는 ‘승원’으로 잘못 기재됨)이 다행히 살아났다.
이 「조선일보」 기사는 이승복 사건의 사회ㆍ역사적 ‘사실’을 구성하고, 이승복 사건에 대한 대중의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사건이 있은 지 14년 뒤인 1982년, KBS에서는 그 해 완공된 이승복기념관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증언 10세 소년의 절규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당시 이승복의 형 이승권의 담담한 증언이 비중 있게 다뤄졌는데, 여기에 담긴 그의 증언 내용은 당시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이승복의 집에 침입한 무장간첩들은 방에서 메주콩을 주워먹고는 숙제를 하고 있던 이승복 옆에 앉아서 이렇게 묻는다. “너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 이에 이승복이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라고 대답하자 뒤에 있던 무장간첩이 “너 지금 뭐라고 말했니?”라고 했고, 다시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은 싫다고 말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무장간첩이 “야!”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승복의 멱살을 잡고 입에다 칼을 넣고 위협했다. 이때 형 이승권이 일어나서 “왜 이러세요?”라고 말하자 무장간첩 중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이승권은 정신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당당히 외쳤다는 반공영웅 이승복의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이승복은 무장공비의 장난 섞인 질문 때문에 그저 어린아이답게 솔직히 대답했다가 불행하게 살해된 불쌍한 소년일 따름이었다.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이 반공의지의 이성적 표현이었건, 무의식의 발로였건 간에 공산주의와 공산당을 이해할 수도 없었을 어린 소년이 총칼의 위협 앞에서 이처럼 발언했다는 사실은 어린이를 반공ㆍ반북의 맹목적 주체로 만들어놓은 1960년대 남한 반공교육의 특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의 숭배와 탈숭배
이승복 영웅 만들기가 대중들에게 항상 매끄럽게 다가갔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중에게 이승복은 숭배의 대상이기보다는 연민의 대상이었고, 반공주의의 모범일 따름이었다. 이승복의 영웅성의 자원이란 반공주의를 실천한 용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반공주의의 철옹성에 틈새라도 생기게 되면 영웅으로서의 이승복의 위치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 시절에는 반공정신이 투철한 어린이로 인식되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승복이 죽은 이유가 첫째, 버릇이 없어서(어른에게 반항해서), 둘째, 간이 부어서 죽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었고, 대학 때는 공비가 콩사탕을 주었는데 이승복이가 혀가 짧아 공산당으로 잘못 발음하였다고도 하였다. 이제 이승복기념관은 어쩌면 설립 목적인 반공교육이 아닌 시대의 뒤안길에서 사람들의 잊혀진 기억으로 전락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정명령, 「조경문화답사 동인지 제1호 다랑쉬」, 2000년
대중의 유머는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이승복에 대한 영웅성이 과도하게 포장되었고 반공주의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고 무거웠던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승복 살해의 잔인함이 너무 자극적인 재현으로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니 ‘폭력’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은 그만큼 무뎌지게 되었다. 돌과 몽둥이, 총과 칼로 이승복 가족을 내리찍는 학살 장면을 재현한 기록화나 가마니 거적 위에 놓인 이승복 가족의 처참한 시신을 전시관 한가운데 걸어둔 사이, 이승복 가족이 겪은 폭력의 고통과 기억은 증발되어 버렸다. 이승복의 아버지는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형은 그런 아버지를 부여잡고 “차라리 같이 죽자”며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이승복을 소재로 한 대중의 유머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유머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독재 체제도 막을 수 없는 일종의 ‘작은 저항’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반공영웅 이승복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대중들이 언어유희로 전환시키는 가운데 이승복의 영웅성은 미끄러져 소멸되어버렸다. 다른 한편으로 유머는 ‘폭력이 남긴 고통’을 성찰할 여지를 앗아가버리고,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덧입히는 또 다른 폭력이기도 했다. 폭력의 감수성만 놓고 보자면 대중은 독재 체제를 닮아 있었다.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얼마 전 “민주노동당 연수원-이승복 동상 ‘어린 전태일’로 변신하게 된 사연”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활용하여 만든 민주노동당 남원연수원에 있는 이승복 동상에는 ‘이승복’이라는 글씨 대신 ‘전태일’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자 관계자들은 전태일을 써넣으면 당에 정체성에 걸맞는 상징물을 가진 연수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부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이 작은 사건은 ‘영웅 만들기’에 대한 좌파진영의 문화적 감수성과 문제의식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문화상징적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와 민주노동당의 태도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승복은 폭력의 희생자였다. 그 폭력에 대한 책임은 분명 무고한 민간인들을 처참히 학살한 무장간첩과 그들을 남파한 북한 정권에게 있다. 하지만 남한 정권이 폭력의 책임문제에 대해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던 것은 엄밀히 말해 대북(對北)용이 아니라 대남(對南)용이었다. 남한 정권이 ‘승복이의 원수를 갚자’며 복수심을 고취시켜서 만들어낸 대중의 반공의식과 대북 혐오감은 분단 체제의 긴장을 더욱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고, 폭력의 연쇄고리만 재생산했다.
이제 반공주의는 과거에 비해 쇠락해졌고, 이승복 동상은 독재시대의 낡은 조형물로 치부되며 사라져가는 중이다. 이승복에 관한 진실 게임 논란을 뒤로하며 대중의 집단기억에서 이승복의 존재는 서서히 망각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승복을 분단이 낳은 폭력의 희생자로 기억해야 한다. 폭력의 사슬을 끊기 위하여.
2부 역사영웅이 새롭게 거듭나다
비스마르크 : 히틀러가 재구성한 철혈재상의 기억
공개되어서는 안 될 사진
1898년 7월 30일 밤 11시경,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함부르크 교외, 프리드리히스루의 자신의 성에서 1년여의 고통스런 투병 끝에 어렵게 눈을 감는다. 사인은 동맥경화에 의한 마비. 그의 임종은 친족과 주치의만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시체가 안치된 방에는 유족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엄중한 지시가 내려졌다. 병상에서의 모습이 일반에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던 비스마르크의 평소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함부르크에서 온 전문 사진사 빌리 빌케와 막스 프리스터는 새벽 4시경 몰래 이 방에 잠입하여 곁에 놓인 시계까지 23시 20분으로 돌려놓고 이제 막 굳기 시작한 시신을 찍은 후 황급히 사라진다. 플래시를 이용하여 두 장의 사진을 찍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이 채 안 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파파라치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찍었던 두 장의 사진은 체포와 함께 압수되었다. 일반에 공개되는 일만은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사진 속의 비스마르크는 흘러내리는 턱을 막기 위해 감싸 두른 수건, 수척하게 말라 침대 중앙에 가라앉은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 시신 주변의 흐트러진 배경 등과 함께 철의 재상에 걸맞는 의연하고 위엄 있는 주검이 전혀 아니었다. 이 사진은 비스마르크 사후 55년이 된 1953년에 처음으로 한 잡지에 공개되었다. 감옥에서 풀려 나온 두 사진사는 자격증을 몰수당하여 사진사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다. 프리스터는 그 후 더 이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10여 년 후 마흔 다섯 살의 나이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영웅의 부활
황제 빌헬름 2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장례를 웅장한 국민적 행사로 치러, 마침내 그가 국민에게서 완전히 떠나갔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장례식을 자신이 제국 설립자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웅장한 국민적 장례식을 계획했던 황제나 그와 같은 장례식이 거행되리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비스마르크의 유족은 황제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자신의 성 한구석의 작은 교회에서 30여 명이 채 안 되는 초대된 조문객만으로 조용히 치르기를 원했다. 관도, 유족도, 장례절차도 없는 추도의식을 통하여 독일인들은 비스마르크를 죽은 이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제국의 영원한 영웅으로 자신들의 가슴속에 묻게 된다. 그리고 이는 생전의 비스마르크가 바라던 바로 그것이었다.
비스마르크에 대한 국민적 숭배는 이미 그가 프로이센의 재상으로 재직하던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국민의 큰 신뢰는 무엇보다 그가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을 통하여 40여 개의 작은 국가들과 도시들로 나뉘어 있던 독일연방을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묶어놓은 일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신생 독일제국을 탁월한 외교술과 강권적 지배를 통해 유럽 내의 강대국으로 발돋움시켜 놓은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불굴의 재상에게서 제국의 미래를 지키며 독일 국민에게 애국적 의무감을 주지시키고 귀감이 될 덕목들을 지켜나가는 여러 면모들을 발견하였으며, 그를 영웅시하고 살아 있는 신화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다.
퇴임 이후에도 명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이는 바로 비스마르크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든 살 생일 축하연이나 자신에 관한 박물관의 설립 등을 직접 지휘하였고, 1890년부터는 회고록을 작성하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위들을 정당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또한 현실 정치에 직ㆍ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후계자들뿐 아니라, 빌헬름 2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를 기념하는 사업들은 1898년 그의 죽음을 계기로 최고점을 맞으며 자연스럽게 독일 민족에 대한 숭배로 연결되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자유와 중단 없는 발전’, (신화화된)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근원적 인종’이라고 믿었으며, 다른 한편 ‘우리’로 묶여지지 않는 이들과의 경계짓기를 통하여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혈연적 유대감에 바탕을 둔 국수주의적 공격성을 드러냈다. 이런 과도한 민족주의 신화에 대한 집착은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서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열강과 맞서 ‘말과 과반수’가 아니라 ‘피와 철’로 독일제국을 일으킨 초인이었다. 동시에 이런 숭배현상의 뒤에는 물질화 되고 근대화 되어가는 세계와 이런 변화 속에서 ‘민족 공동체’의 해체에 대한 두려움, 식민지 경쟁 속에 짙어져 가는 전쟁에 대한 불안 등이 감추어져 있었다.
바이마르 시대, 영웅을 기다리다
전쟁에서의 패배와 제국의 몰락은 독일의 민족적 자존심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놓았다.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과 이에 따른 엄청난 전쟁 배상금의 부과, 국토의 상실, 의회 민주주의의 도입, 여기에 비스마르크에 의해 ‘제국의 적’으로 지목되었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카톨릭 중앙당의 집권 등, 많은 중산 시민계층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뿐이었다. 빌헬름 제국 시대에 경제적 발전과 함께 부상한 시민계층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다.
구심점 없는 혼돈의 시기에서 과거로 도피하고 싶은 막연한 동경이 하나의 민족적 염원으로 떠돌았다. 새로 올 지도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며, 민족과 제국을 구원할 메시아였다. 전쟁의 패배와 1918~1919년의 정치적 변혁을 통해서도 비스마르크 신화는 상처받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고, 여전히 그는 전후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독일 국민이 돌아가야 할 하나의 지향점이었다. 특히 바이마르 체제의 마지막 시기는 정당간의 크고 작은 수많은 정쟁과 부패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것이 의회제도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시민 세력은 의회 민주주의에 적대적 반감을 드러내며 강력한 누군가가 나와 마침내 모든 것을 몰아내고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주길 고대했다. 그러나 어디에서 지도자를 구할 것인가?
이러한 민족 구원에 대한 열망을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이해하고 이용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히틀러였다. 그는 바이마르 체제의 혼란의 책임을 민주주의적 제도에 전가시키면서 이러한 무기력한 상황은 오로지 정치적 지도력과 권위의 부재에 기인한다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를 ‘지도자’로 지칭한다. 그의 존재가 국민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의회 선거로 나치당이 급부상한 이후였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히틀러의 등장 배경에는 대량 실업 사태나 경제적 위기 등 다양한 원인이 제시될 수 있지만, 동시에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정 체제를 거치면서 수많은 비스마르크 숭배자들이 조성하고 발전시켜온 민족 지도자를 갈망하는 종교적 열정이 배경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그늘 속으로
1933년 이후 진행된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나치의 영웅 숭배는 그 시작부터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전제와 목적을 갖고 진행되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국민적 영웅 만들기 작업이 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사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나치 시대에는 1923년 11월 9일 뮌헨에서 실패한 나치 반란과 같이, 소위 나치 ‘투쟁기’에 싸우다 희생된 당원들이 주된 영웅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이처럼 급조된 영웅들과는 달리 독일 역사에 등장했던 전통적 영웅들도 필요했다. 아직은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기반도 카리스마도 없는 히틀러로서는 카를 대제, 프리드리히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등이 갖는 역사적 연속성과 정통성에 기대야 했다.
제국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갈망과 관련하여 국민에게 가장 이상화된 형태는 비스마르크 제국이었다. 특히 히틀러로서는 자신에게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여러 적대자, 특히 보수적 시민계급에게 자신을 프로이센 전통의 수호자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자신도 우선은 비스마르크의 강렬한 그늘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히틀러 카리스마 성공 비결은 결국 그가 정치적 신화와 상징의 마력을 인식했고, 비스마르크를 포함하여 이러한 상징적 요소들을 자신의 정치를 연출하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자와 카톨릭 교인들을 ‘제국의 적’으로 몰아 탄압했듯이, 히틀러도 공산당원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노조 간부들을 소위 ‘민족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이것이 히틀러를 향한 일반 국민의 기대를 고무시켰으며, 짧은 시간 내에 내정의 혼란을 잠재우며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이 새로운 물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점차 고립되었고, 밀고와 테러의 위협 속에 급격히 소수로 남게 되었다. 1933년 4월 1일, 나치가 집권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비스마르크의 생일, 나치는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이날을 경축했고, 괴벨스는 라디오를 통해 독일 민족의 놀라운 ‘재탄생’을 역설하면서 히틀러와 비스마르크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으로 보나 지금까지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로 보나, 객관적으로 히틀러를 비스마르크와 비교할 만한 그 어떤 요소도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히틀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의식적으로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포즈를 취했고, 자신을 그의 이미지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비스마르크 숭배는 지금까지 주변적 인물에 불과하던 히틀러에게 정통성을 부여했고, 독일 중산계급이 그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비스마르크 숭배는 그에게 일종의 “정치적 우파와 민족주의적 시민계급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를 넘어서
1938년 3월 12일 열광하는 오스트리아 국민의 도열 속에 독일 군대는 국경을 넘어 빈으로 입성했고, 다음 날 히틀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인 영웅광장에서 수많은 오스트리아 군중들의 환호 속에 “독일 제국과 제국의 지도자 겸 수상으로서, 역사 앞에 이제 나의 고향이 독일 제국에 귀속되었음을 선포”했다. 대독일 제국의 완성이라는 19세기 이래의 독일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국민은 히틀러에 환호했고, 히틀러는 스스로를 비스마르크의 완성자이자 동시에 그를 넘어선 인물로 연출했다. 이제 그는 비스마르크를 넘어서 오로지 자신만이 중심인 제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성공적인 오스트리아 합병은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히틀러의 위상을 안정된 위치에 올려놓는다.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비판까지 하는데, 그는 비스마르크의 패배가 투쟁을 최후까지 밀고 나갈 도구가 그에게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히틀러에 따르면 비록 비스마르크가 제국의 통일은 이루어냈으나 사회적 통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여 민족국가로서의 진정한 정신적 기반을 세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유대인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으며, 자유주의적 시민계급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양보하여 자신의 승리를 패배로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치로서는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비스마르크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새롭게 평가를 내려야만 했다.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듯이 히틀러 또한 빈으로 진격했지만, 대독일주의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부정적 시각은 히틀러가 추구하는 비스마르크 상과의 충돌을 내재하고 있었다. ‘대독일 제국’이라는 구호는 일반 국민뿐 아니라 이 시대 많은 역사가들에게도 독일사 완성과 같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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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