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파싸움은 유교적 이상을 실현한 붕당정치였으며,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개혁군주였다는 점, 강화도조약을 낳은 운양호 사건이 일본의 교묘한 공작으로 발생했으며, 국권 침탈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국제법상무효라는 주장 등을 담았다. 그리고 일본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조선이 메이지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자수자강을 위해 노력을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일본의 반성은 기대할 수 없다면서, 이 책의 내용은 일본학생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저자 이태진
1943년 출생으로서울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1970년대부터 조선시대 사회사와 정치사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다가, 1990년대 초부터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탈취 관련 조약 문서들이 격식을어기거나, 비준을 결여하거나, 황제의 서명을 위조한 사실들을 발견하여 한국병합 불성립론을 제기하는 한편, 고종시대의 자력 근대화 노력의 성과에관한 연구를 함께 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한국사 설명의 새로운 패러다임 설정을 목표로 최신 학설 외계충격설에 대한자료 수집과 정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朝鮮儒敎社會史論』『고종시대의 재조명』『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등이, 엮은 책으로『史料로 본 韓國文化史』『朝鮮時代政治史 再照明』『일본의 대한제국 강점』『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한국병합의 불법성 연구』등이있다.
■ 차례
서문
제1차 강의 - 일본의한국사 왜곡 출발점으로서의 고종시대
제2차 강의 - 한국의 개국에 가해진 일본의 폭력과 왜곡
제3차 강의 - 청일전쟁 전후에 자행된일본의 폭력
제4-1차 강의 -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중국·일본의 방해(1)
제4-2차 강의 -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중국· 일본의 방해(2)
제5차 강의 -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주권 탈취 공작
제6차 강의 - 한국병합의 강제와 불법성
특별강연 - 동아시아의 미래 - 역사분쟁을 넘어서
근대한일관계사 연표
찾아보기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일본의 한국사 왜곡 출발점으로서의 고종시대
고종황제(1897~1907)와 메이지천황(1868~1911)의 두 시대는 시간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요. 일반적으로 “고종시대는 실패의 역사”, “메이지 시대는 성공의 역사”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는 이것이 과연 타당한지를 따져보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1910년 강제병합 후 일본은 한국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줄임말인 한국을 그 이전 왕조시대의 국호로 되돌린 것입니다. 그간의 제국으로의 격상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무시한다는 것을 내포한 조치였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는 동화, 곧 일본식 문명화를 완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을 결코 일본인과 동일시하지 않는 인종적 차별은 그대로 두었고 이런 관념 아래 한국 역사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과 평가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총독부가 동원한 일본학자들은 제일 먼저 고종시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한 다음, 앞 시대인 조선왕조, 중세 고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로 한국사 왜곡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역사의 기본 성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습니다. 첫째, 한국민족은 대륙에 붙어있는 반도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오랜 역사 속에 대륙 민족들로부터 잦은 침략과 지배를 받아 그 역사가 타율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둘째, 한국인은 두 사람만 모여도 싸움질할 정도로 당파성이 심하여 조선시대의 당쟁의 역사와 같은 것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안팎으로 이러니 사회가 발전할 수 없는 정체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이제 이 모든 한국사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주면서 조선의 문명화를 진행시켜주고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이 역사 왜곡의 주된 근거는 고종시대까지 계속되어 왔다는 ‘악정(mal-administration)이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도 잘못된 것들과 비판받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적용된 악정이라는 말은 한번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 중 악정이 가장 심한 것으로 보았던 때는 조선왕조시대입니다. 이 시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고려시대 1200년경부터 지방호족들의 지역할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고 1392년 조선왕조가 서면서 완전히 중앙집권 관료체제로 바뀝니다. 지역할거체제에서 민은 ‘군백성(郡百姓)’이라고 불렀습니다. 한 고을의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런 상태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왕의 백성으로 바뀌게 되지요. 이 새로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은 유교정치사상을 도입해 이론적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사상이 도입되었습니다. 민생의 안정을 근본으로 하는 국가운영체제를 만들기 위해 유교가 제공하고 있는 중앙집권 관료제를 극대화하고 필요한 인재 선발을 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문제가 왕정의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농업기술 향상과 농업노동력의 증대를 위한 의술의 수용 등에 큰 힘을 쏟았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조선 말기에 일본 측에 의해 강조되었던 유교망국론처럼 유교가 시종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유교는 조선왕조시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나름대로 기여를 했습니다. 게다가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왕조의 유학은 근대지향적인 변화를 보이면서 유교경서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논하는 대신 조선의 현상은 이러하니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는 형태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또 문화적?외교적인 자세로 조선중화주의를 강하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조선은 진정한 유교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며, 청조의 정통성에 반발하는 것이죠.
16, 17세기 조선에서는 정통 신유학, 곧 정주학(程朱學)이 발달했는데요. 이즈음 한국 유학의 특징은 심학(心學)과 예학(禮學)의 발달과 강한 도덕 지상주의 경향입니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누루하치의 남하로 인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조선의 통치자들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거나 패배의 쓴 맛을 봤습니다. 이런 와중에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관리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말기의 ‘유교망국론’은 이러한 것들을 그 근거로 삼은 것 같습니다. 메이지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한국의 역사를 악정‘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는 조선시대사를 공부하면서, 기록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끝에 근 15년 전에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천재지변에 관한 서양학계의 새로운 연구동향과 『조선왕조실록』의 천재지변 기록에 관한 분석을 통해 1490년경부터 1760년경간에 대량의 유성(운석)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함으로써 전지구적인 대자연재해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거론한 문제들이 모두 조선왕조 통치자들의 ‘악정’의 소치가 아니라 이 자연이상 현상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면 충돌시에 발생하는 먼지가 하늘로 치솟아 두꺼운 층을 이루게 됩니다. 먼지가 하늘을 뒤덮으면 태양의 열과 빛이 차단된 상태에서 대기는 더운 열기 속에 싸이고, 이 온실현상은 곧 큰 비로 이어지고, 대홍수 후에는 엄청난 추위가 닥친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의 이상을 아주 충실하게 관찰해서 기록으로 남긴 『조선왕조실록』이 시작하는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약 470년간의 천재지변에 관한 약 2만 5천여 건의 기록들을 얻어 이것들을 50년 단위 기간으로 배열해봤습니다. 그랬더니 1500~1750년 사이에 전 기록의 83%가 모여 있었고 이 기간에 계속된 유성(운석)의 추락이 장기 재난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도 왕정의 잘못이 아니라 이러한 자연현상의 산물인 것입니다.
잘못된 왕정 중에 대표적인 조선왕조의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실제 형태는 납속공명첩(納粟空名帖)의 발행이었습니다. 납속공명첩이란 것은 곡식을 내면 관리가 그것을 낸 사람에게 직명을 적어주는 단자(單子)입니다. 곡식의 양에 따라 직책의 등급이 다르기 때문에 직책을 쓸 난을 비워두어 공명첩이라고 했습니다. 정부에서 이 첩을 발행하는 과정과 그 존속기간을 조사해보니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 age) 자연재해 기간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구휼곡(救恤穀)이 재난이 장기화됨에 따라 동이 나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유 곡식을 구휼곡으로 동원하기 위해 이 제도를 시행했던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나쁜 정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의 개국에 가해진 일본의 폭력과 왜곡
1864년에 즉위한 고종(高宗)은 나이가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곧 대원군이 대신 왕정을 이끌어줬습니다. 1873년 22세의 나이로 직접 정치를 선언하는 고종은 아버지에 대해 두 가지 불만이 있었습니다. 일본 메이지정부의 새로운 국교수립 요청을 거부한 것과 질이 좋지 않은 중국 돈(청전)의 사용을 중단시키지 않고 방치한 점이었습니다. 고종이 지금 조선이 국제적인 대응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외적인 대응 문제에서 대원군의 입장은 선(先)정비 후(後)개국론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아버지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선개국이 불가피하다는 견지에서 직접 정치를 선언합니다. 고종의 정치적인 지향성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18세기에 자신의 선대왕들 중 가장 훌륭한 분으로 정조를 꼽고, 그의 민국(民國) 이념을 추종하고, 18세기의 군주들이 보여준 조선중화주의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에 대한 자주의식을 강하게 표시하는 외교정책이 이에 해당합니다. 서양 기계문명의 우월성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아버지와는 달리 아주 관대했습니다.
고종이 시도한 근대화사업은 두 차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1880년대 초부터 진행시키던 것으로, 일본의 서구문물 수용 실태 조사를 목적으로 12명의 시찰단을 구성하여 내무성과 외무성 등 8개 기관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방해를 받아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뒤 1897년부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약 8년간 개혁사업을 추진합니다. 이것을 한국사에서는 광무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광무개혁이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를 거두자 일본은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한반도 정복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군사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는 정책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대한제국은 무능하거나 근대화의 의지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발전의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일본이 조기 박멸책을 써 망하게 된 것이 됩니다. 한편 일본은 이렇게 한국의 국권을 강제로 탈취하면서 대한제국의 현황에 대해 실상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됩니다. 고종시대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과 성과는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물론 광무개혁의 성과는 일본의 근대화 성과에 비하면 늦게 시작한 것이고, 성과의 양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화의 능력이 없다든가, 유교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규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고종시대의 재평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많은 학자들, 특히 한국의 역사학자들조차도 일제 당국이 의도적으로 주입한 역사왜곡에 휩쓸려서 자료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작업의 일환입니다.
한국의 개국과 관련하여 살펴볼 운양호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도 일본은 국제법상 국기를 게양한 배가 식수를 구하려 할 때에는 도와주도록 되어 있는데, 포격을 가했으니 이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조선은 국제법에 무지한 야만국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보고서는 나중에 메이지정부의 뜻을 따라서 변조한 것으로 밝혀졌고, 처음에 쓴 진짜 보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투는 9월 21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고 식수가 떨어졌다는 언급은 전혀 없으며, 국기를 달았다는 것도 둘째 날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이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서를 재작성한 것은 동경 주재 영국공사 해리 팍스가 강화도에서 충돌이 있었다고 신문들이 보도하자 일본 외무성에 강화도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처음에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 답변용으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운양호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측은 고종의 개방정책에 따라서 오히려 일본과의 수교조약 체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양호사건이 일어나기 전 조선정부는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에 대해 아주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오히려 일본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조선의 교섭 제안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운양호사건 후 사후대책이 마련되고, 조정의 방침이 결정된 뒤 2월 12일 제1차 회담을 시작하여 양측의 대표가 서로 만납니다. 2차 회담 자리에서 일본이 준비해온 조약안 13개조를 내놓는데, 조선은 13개 중에 제12조가 최혜국 관련 조항이니 폐기를 요구하고, 나머지 12개 조항 가운데 9개 조항에 대해 자구(字句) 수정할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의 구로다 대신 측은 조선정부의 수정안을 거의 이의 없이 받아들입니다. 강화도조약의 이런 체결과정을 알면 누구도 조선 측이 피동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조약상의 심각한 문제는 7년 뒤 임오군란의 피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지만, 한일간 첫 국제법적 관계 정립에서 출발점인 강화도 조약은 적어도 한국 측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일전쟁 전후에 자행된 일본의 폭력
여기서는 일본군의 1894년 서울 무단 진입, 그리고 이어서 있었던 경복궁 침입사건, 그 다음해에 발생한 왕비 시해사건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강의의 큰 주제인 불법과 폭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사건들입니다.
먼저 서울 진입건을 보면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봉기를 했습니다. 이 농민군 진압과 관련하여 일본군과 청군이 동시에 출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렇게 설명되어 왔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자 정부가 겁을 먹고 정부군으로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청국에게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외국군을 동원했다면 말이 되지 않지요. 이를 해명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일본외교사료』에는 재조선 일본공사관, 즉 나중의 주한일본공사관에서 조선정부가 청에 출병 요청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한 탐문조사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출병을 요구한 것은 위안스카이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조선민들 사이에 퍼져가는 반청 기운을 의식하고,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군이 한 번 더 한반도에 들어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정부는 청의 이러한 요청을 세네 번 거절하다가 결국 조건부 수락을 합니다. 청군이 오되, 농민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하륙(下陸)하지 못한다. 농민군의 움직임이 있더라도 국제법에 따라서 서울에서 200리 안쪽에는 들어오지 못한다. 이런 조건으로 파병 요청을 하게 되며, 그 요청서는 국왕의 이름의 아니라 좌의정의 이름으로 보내도록 했습니다.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아낸 일본공사 측은 서둘러 출병 준비를 마치고 청군보다 빨리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동학농민군 진압이 출병의 명분이던 일본군은 농민군이 활동하는 남쪽으로 가지 않고 인천에 도착해서 한국 관리들과 서양인 고문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바로 서울로 진입합니다. 일본 측은 농민군 봉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고, 그 내정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한국정부가 7월 18일까지 일본군의 서울 주둔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응락을 하지 않으니 일본군은 무력행동을 취합니다. 7월 23일 0시 30분에 오시마 여단 8천여 병력이 서울 성곽을 둘러싸고 1개 대대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밝힌 사건의 전모는 이렇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20분간의 소요가 아니라 새벽 0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7시간에 걸친 작전과 전쟁이었습니다. 조선군과의 총격전도 3시간이나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은 궁중 안에 있는 민족(閔族) 제거, 즉 왕비를 색출해서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호위하면서 둘러싸고 있던 조선군과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군이 맞닥뜨리자 왕이 직접 나서서 “우리 대신이 일본공사관에 가서 법적인 절차에 따라 처리를 하도록 교섭하러 갔으니 물러나라“고 호령하여 일본군이 더 이상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건 직후 일본군은 청군이 있는 충청도 성환 쪽으로 이동하고 이틀 뒤(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이 사건은 묻혀 버립니다.
그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는데, 곧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직도 서구열강의 간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힘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생겨난 분노가 조선 왕실에 대한 보복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진행하는 개혁사업에 고종이 찬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왕비가 러시아?미국 공사관 쪽과 접촉한 사실이 일본공사관에 의하여 파악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1년 전에 실패한 왕비 시해 음모를 1895년 10월 8일에 다시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결국 1894~1895년은 일본이 한반도 진출을 위해서 폭력과 불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비 시해사건 후 일본은 국제적으로 큰 부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한반도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10년간 일본은 전열 정비의 기간으로 삼았고,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력 근대화에 매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중국?일본의 방해(2)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에서 지금말로 하면 국토개발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플랜이 확인됩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완성도는 절반에 못 미친 상태에서 끝나고 말았지만, 광물 매장이 많은 북한 지역의 개발을 우선시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철도 업무에 중심 역할을 한 이채연이라는 사람은 곧 이어서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이 되어 서울 도시개조사업의 주역이 됩니다.
당시 공사중이거나 공사예정인 철도는 모두 일본인이 쥐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대한제국이 스스로 서북철도를 신설하려고 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진출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에 해당하는 구간을 대한제국 정부가 스스로 관장한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소기의 목적 달성에 큰 차질을 가져올 일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가 공사를 착공하자 일본은 한국에 대한 정책의 모든 것을 서북철도 부설권 탈취에 두고 실제로 러일전쟁을 일으키자마자 일본군이 서북철도 건설공사를 경의선 부설이란 이름으로 탈취해 대신 진행시켰습니다.
이외에 대한제국 정부가 전국철도노선을 조사하여 앞으로 시설할 예정이던 노선 중에는 원산-평양-진남포를 잇는 노선이 있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의 동서를 횡단하는 노선으로 일제에 의해서도 추진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함경북도 경흥에서 평안북도 의주까지 횡단하는 선로를 하나 더 제시했는데, 이것은 광산 개발에 대해 특별한 목적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상정할 수 없는 선로입니다. 철도노선 조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양지아문이라는 측량 전담 부처가 규모를 확대한 사실도 확인됩니다.
정부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가정 먼저 착수된 서울 황성(皇城)은 당시 서울에 주요 간선도로들이 인구 집주 현상으로 좁아지자 그 도로를 침범한 가가(假家)들을 걷어내는 것으로 도시개조사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근대적 도시 만들기 사업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업의 모델이 된 것은 미국의 워싱턴 DC였는데, 방사상 도로 체계와 많은 기념시설들과 공원들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인물조각상들과 같은 워싱턴DC의 주요 특징을 서울에도 도입하려는 것이 개조사업의 핵심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하늘에 대해 서고(誓誥)하는 장소인 원구단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영은문을 통과해서 서울에 들어온 중국 칙사 일행이 숙박하던 건물인 남별궁이 있던 곳인데, 그 건물을 헐고 원구단을 세웠다는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표시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호텔이 들어서면서 조상신을 모시는 황궁우만 남아 있습니다. 일본이 1907년 7월에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협약으로 통감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내정감독권을 획득한 후 원구단을 헐어버리고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을 지은 것입니다. 일본이 청국을 대신해서 종주국이 된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지요.
새 도시체계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경운궁입니다. 1910년 2월, 일본인 관리에 의해 그려진 이 궁의 평면도에 의하면 역대 선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선원전과 궁궐의 중심 건물인 중화전을 연결하는 중심 축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서양식 건물들, 동쪽은 한식(韓式) 건물들을 배치했습니다. 경운궁 안팎에는 근대화사업을 수행하는 관청들, 궁내부, 탁지부 등이 서양식 건물들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1904년 4월 경운궁의 황제 거처에서 불이나 중화전과 그 동편의 한식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 타버렸습니다. 화재 후 새로 짓기는 했지만 1905년 10월 이후로는 일본 고문부가 대한제국 황실이나 정부의 재정을 장악하고 복구비를 최소화하였기 때문에 1층으로밖에 짓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사업은 전체적으로는 국토개발계획안을 갖고 있었지만,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것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이었습니다. 이밖에 중립국을 목표로 하여 국방군을 3만~5만선으로 설정하여 추진한 것도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이러한 발전적 변화상을 모두 세세하게 지켜보다가 1904년 2월 드디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5만여 명의 군대를 한반도를 통과하게 하거나 주둔시켰습니다. 그런 압박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국권과 관련되는 조약들을 여러 개 강요하고, 러시아와 벌인 전쟁의 전세가 호전될 때마다 하나씩 내놓고 승인을 강요하였습니다.
한국병합의 강제와 불법성
일본의 한국 국권 탈취 관련 조약 다섯 개 중 오늘은 최종 병합조약에 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전에 조약체결 진행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1910년 6월에 일본정부는 한국병합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지금까지 한국문제에 관계했던 베테랑 관료들을 총동원해서 병합을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 측에서 갖추어야 할 문서들도 모두 이 준비위원회에서 준비했습니다. 최종 병합조약은 이전의 4개 조약과는 달리 정식조약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 즉 전권위원에 대한 위임장, 협정문안, 그리고 비준서에 해당하는 문서 등을 다 갖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오전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일방적으로 통감부에서 선별한 한국 측 대신 4, 5명이 황제 앞에서 ‘여기에 서명날인을 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요청을 했습니다. 위임장에 황제가 서명하자 이완용은 이것을 들고 데라우치 통감의 관저로 갔습니다. 통감이 미리 준비하여 내놓은 조약문의 끝장을 보면 제8조 다음에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서명날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약 명칭을 따로 두지 않고 전문(全文)을 길게 써서 그 속에 ‘병합조약’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서명날인을 마친 뒤 데라우치 통감이 다시 이런 각서를 내놓았습니다. 두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요. 병합조약 및 양국 황제폐하의 조칙을 쌍방이 약속(訂合)하여 동시에 공포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조칙이라고 한 것은 각각 양국 황제가 병합을 자국민들에게 알리는 내용을 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2조는 “이 조약문과 조칙을 언제라도 공표할 수 있도록 바로 필요한 수속을 해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조약은 공표가 됨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조약체결 절차상으로는 비준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합을 알리는 조칙으로 비준을 대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두 황제가 발부했던 조칙들을 모아놓은 책자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습니다. ‘조칙철’이라는 표제가 붙은 이 책자의 맨 끝에 병합을 알리는 조칙이 들어 있는데요. 이 조칙에서 서명날인이 들어갈 부분을 보면 여기에 사용된 도장은 국새와는 다른, 행정결재용으로 사용하던 어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도장만 찍히고 위에 반드시 있어야 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황제의 이름자 서명은 1907년 7월의 협약으로 통감부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감독권을 강제로 획득하면서 일본 정부의 서명 제도와 동일한 것을 요구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책자에서 병합을 알리는 칙유 앞에 철해진 1909년 11월 4일자의 조칙문에 어새가 찍혀있는 것은 통감부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907년 7월 24일 한일협약에서 통감부가 한국의 내정권까지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업무 수행 명분으로 통감부가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장이 찍힌 것은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서명 부재 상태를 한국 병합조약에 대해서 한국 황제가 승인하지 않은 명백한 증거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러던 중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에 실린 순종황제의 유언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종황제가 병합조약을 자신이 승인하지 않았고, 양국의 조칙, 즉 나라를 내주는 조칙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의 보도였습니다. 황제는 전권위임장에는 할 수 없이 서명날인했지만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 공포 조칙에는 서명날인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1886년 한성조약 때까지 양국 간에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과정을 보면, 조선 측이 예컨대 전권위임장을 협상장소에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일본 측이 그것을 보지 않고서는 협상을 시작할 수 없다고 주장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보호국화 내지 병합의 목적을 분명히 세웠을 때는 반대로 스스로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요, 불법이므로 나는 한국병합의 역사는 일본의 불법과 폭력의 소산으로 보며, 따라서 그것은 법적으로 무효일뿐더러 절차와 형식을 완전히 무시한 점에서 성립조차 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6회에 걸친 나의 강의도 “한국병합은 성립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결론을 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