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언론

Schreiben, Was Ist - Kommentare, Gespraeche, Vortraege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역자 : 안병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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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림
   
25000
2005�� 08��



■ 책 소개
1962년 10월, 수십 명의서독 검·경찰은 슈피겔 사무실을 급습해 4주간 편집국을 점거하고 각종 문건을 압수했다. 이어 발행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몇몇 기자가 체포되거나투옥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서독 언론사, 아니 현대사에서 언론 자유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슈피겔 사건이다.
 


 

정치적 시사주간지인 슈피겔은 서독 국방부의 일련의 스캔들을 잇따라 폭로했고, 기회를 노리고있던 당시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은 슈피겔이 서독군의 방어 태세를 다룬 기사를 다룸으로써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며 반역혐의로 아우크슈타인을 103일간미결감에 투옥시켰다. 아우크슈타인이 투옥된 후 슈피겔 독자는 물론이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가두 시위를 벌이며 슈피겔을 지지했고, 국외에서도 서독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결국 국가 권력은 슈피겔이 벌인 언론 자유 투쟁에서 패배했다. 아데나워 총리와 국방장관은 사임했고,1966년 아우크슈타인과 기소된 기자들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독에서 민주주의는 슈피겔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있을정도로 이 사건의 파장과 의미는 컸다. 


슈피겔이 움직이면 관리들이 떤다. 슈피겔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데 가장 선두에선 신문으로 그 명성을 떨쳐왔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포로 불리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이 신문의 창간인이자 발행인인 루돌프아우크슈타인은 2차대전 이후 독일 언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이 책에는 슈피겔의 발행인, 편집인으로 55년간 활동해 왔으며"세기의 저널리스트"로 선정된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이 창간 이후 슈피겔지에 발표해 온 가장 중요한 시사평론과 저명인사와의 대담, 강연이 망라되어있다. 


■ 저자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1923년하노버에서 출생했다. 2차대전에 참전한 뒤, 하노버에 있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했고 23살 때 정치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을 창간했다.2002년 11월 서거할 때까지 「슈피겔」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으로 일했다. 1,000여 편의 시사평론과 70회의 저명인사 대담 기사를 썼으며,역사서 『프리드리히 대제와 독일인』을 비롯해 12권의 저술을 남겼고, 극본 「시간이 다가온다」를 발표한 바 있다. 언론 자유의 길을 연 "슈피겔사건" 때 투옥된 경험이 있으며, "플릭 스캔들"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파헤친 탐사보도로 국제언론연구소로부터 세계 언론 자유의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100명의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선정한 "세기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 역자 안병억
1965년 충남 출생.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1991년 연합통신사 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 문화부에서 근무했고, 1994년 4월부터 YTN으로 옮겨경제부, 국제부 기자를 지냈다. 1999년 독일 방송국 연수를 거쳐 2000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유럽통합 전공 석사 학위를마쳤고, 현재 박사 과정에 있다. 석사 논문으로 〈독일 통일 시기의 영독 관계〉를 썼으며, 역서로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이있다.


■ 차례
역자의 말 - 영원한 화두, 권력과언론 
서언 - 스스로 기념비가 된 저널리스트 


제1부 민주주의의 대포를창간하다(1946∼1949) 
우리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신비한 신탁은 이제 그만 / 소련이 독일에 쳐들어온다면 /화초 애호가, 아데나워 / 독일인을 재무장시켜야 할까? / 기꺼이 맞겠습니다 


제2부 가차없는 슈피겔 스타일(1950∼1959)
슈피겔의 첫 탐사보도 / 이런 정당이 필요하다 / 정당의 입김은 전혀 없었다 / 그를 존경했습니다 / 우리의 길은 갈라졌다 / 동독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함 / 우리가 중상비방죄라고? / 슈피겔의 가장 큰 위험 / 독자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총리가 될 재목일까


제3부 슈피겔 사건을 거치며(1960∼1969)
최대의 언론 스캔들, 슈피겔 사건 / 그것은 투쟁이었다 / “반역죄를 저지르고 돈을 벌었다” / 독방에 누워 성경을 읽다 / 중요한 것은배상이 아니다 / 야당에 바란다 / 야스퍼스와 나치에 대해 논하다 / 하이데거 사후에 발표된 대담 / 아데나워와의 마지막 대담 / 저널리스트와권력의 관계 / 신랄하게 비판했다 / 주식의 절반을 직원에게 배분하다 


제4부 슈피겔은 슈피겔이다(1970∼1979)
파업 소문에 직면해서 / 정치로의 짧은 외유 / 친구에게 던지는 고언 / 오페라 비평가, 아우크슈타인 / 불법 도청 스캔들


제5부 새로운 통일을 꿈꾸며(1980∼1989)
미소를 띤 채 사실을 말하다 / 니체의 르네상스가 임박했는가 / 안드로포프는 좀 달랐다 / 분단은 부자연스럽다 / 플릭사의 뇌물 스캔들/ 새로운 아우슈비츠 거짓말 / 한 정치인의 의문사 / 고르바초프와 독일 카드 / 소련 작가 솔제니친과의 대담 / 악몽이었을 것이다 / 미하일고르바초프와의 대담 / 약간 다른 의견 


제6부 기차는 떠났다(1990∼1999)
귄터 그라스와의 텔레비전 토론 /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 대체 누구를 선동해야 하지요? / 내일 아침에 죽을 수도 있지요 / 권력에대한 유일한 경고자 / 나는 명목상의 인물일 뿐 / 제4의 권력, 언론 / 기네스북에 올랐어요 / 월드컵 축구와 콜 총리의 공통점 / 친구 마틴발저와의 대담 /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제7부 그것은 투쟁이었다(2000∼2002)
워싱턴은 인권을 위반하고 있다 / 아우크슈타인의 마지막 시사평론 


후기 - 있는 그대로 써라!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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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언론


제1부 민주주의의 대포를 창간하다(1946~1949)


우리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7만 마르크로 당시 하노버에 주둔해 있던 영국 군정의 허락을 받아 「디제보케(이번주)」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슈피겔’로 개칭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1년 반이 지난 하노버에서 초창기 시절을 아우크슈타인은 1997년 창간 50주년 기념 특별호에서 이렇게 회상한다.(슈피겔 특집 : 슈피겔 1947~1997)


2차대전 종전 후 1년 반이 지난 하노버 시. 당시 영국 군정의 존 챌로너 소령과 해리 보러, 헨리 오먼드 상사는 패망한 독일인들에게 인간다운 문화를 되찾아주고 싶어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슈피겔의 창간이었다. 1949년 동독이 된 지역이 러시아 군정하에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가 영국 군정 지역에 있음은 다행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뉴스매거진이 없었다. 1923년 미국에서 헨리 루스와 브리톤 해든이 창간한 「타임 TIME」이 뉴스매거진의 효시였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기자가 되어, 친구가 읽을 수 있게 글을 써야 한다는 「타임」의 원칙은 따를 수 없었다. 기사마다 스타일을 바꾸고 다시 써야만 했다. 당시 우리는 「타임」의 모토를 따를 정도로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피겔지를 만들면서 우리 독일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많은 점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요소도 생각해 내고 추가했다. 몇 명되지 않았던 우리는 “우리가 다른 잡지에서 읽고 싶었던 기사를 이 잡지에 써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정치적 신념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신념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권위 앞에서도 - 외세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 순종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변함이 없었다. 이 신념 때문에 슈피겔은 위대해졌다. 이 신념은 계속해서 슈피겔을 도와줄 것이다.


기꺼이 맞겠습니다

1949년 5월 배우 구스타프 그륀첸스는 포병으로 있던 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쓰지 말라는 조건을 달고 슈피겔 발행인에게 넘겨주었다. 아우크슈타인은 이 사진을 겉표지 네 번째 페이지에 확대해 실었다. 이하는 두 사람 간의 서신 왕래.(『구스타프 그륀첸스 - 서신, 에세이, 연설』에서)


친애하는 아우크슈타인 씨!
분별력 있고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아 정신이 똑바로 박힌 듯이 보이는 젊은 기자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염병할 사진을 내가 당신에게 주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이 사진을 다시 돌려달라고 말한다면 아무리 고귀한 저널리스트라도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여길 테지요. 하지만 그 사진을 슈피겔 표지 사진으로 사용할 경우 내 정신이 훼까닥 돌아서 하노버로 가 당신을 때려죽을 것입니다. 그만 정신을 차리고 내게 그 사진을 보내주시오. 멋진 내 시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추한 기억이기 때문이오. - 구스타프 그륀첸스 배상


친애하는 그륀첸스 씨
귀하의 경고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 사진은 벌써 겉표지에 게재됐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당신이 너무 격노하니 보기 좋지 않군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많은 사항이 잘못 기록됐지만 그렇다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 때문에 당신이 슬픈 둥지 하노버에 온다면 기꺼이 맞아죽겠습니다. - 아우크슈타인 올림



제2부 가차없는 슈피겔 스타일(1950~1959)


정당의 입김은 전혀 없었다
이 글에서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슈피겔지 몇몇 호는 비용 절감을 위해 분량을 줄였다며 독자의 이해를 구했다.(슈피겔 1951년 17호)


슈피겔은 어떤 정당이 돈을 주거나 아부한다고 해서 휘둘리는 그런 신문이 결코 아닙니다. 기민당이나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사는 언론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 돈을 주는 사람이 눈짓을 보낼 때에만 비판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이 됩니다.


슈피겔은 그 어떤 정당이나 이익단체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입니다. 슈피겔은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결코 ‘돈벌이’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뿐, 필요 이상의 돈을 결코 벌지 않을 것이며 적게 벌 경우 문을 닫을 것입니다.


슈피겔의 가장 큰 위험
의회민주주의에서 언론, 특히 슈피겔의 역할에 대해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1953년 4월 13일 기조 연설을 했다.(뒤셀도르프 라인루어클럽에서의 연설)


슈피겔은 말 그대로 ‘뉴스를 발굴’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항상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마르크를 주고 구입하는 슈피겔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뉴스와 정보 전달에서도 독창적이어야 합니다. 슈피겔은 이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발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미 잘 알려진 사건이라도 추가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종종 이것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한 권을 낼 때마다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써야 한다는 압력은 계속됩니다.


이것이 슈피겔이 받고 있는 유일한 압력입니다. 슈피겔은 통속적인 잡지가 겪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어리석은, 대중의 본능을 자극해야만 한다는 압력은 알지 못합니다. 슈피겔 편집진은 자신을 일반 독자라 여기고 있으며 그들도 1마르크를 주고 산 다른 신문에서, 읽고 싶은 기사를 슈피겔에 씁니다. 즉 슈피겔 편집진은 그리 똑똑하지도 않고 아주 지적이지도 않습니다. 결코 천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 편집진은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합리적인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써도 됩니다. 그들에게는 강요된 ‘편집 지침’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선입견과 오류에서만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슈피겔의 존재 가치가 달려 있는 아주 귀중한 자유입니다. 독일에 슈피겔과 같은 신문이 있기 때문에 더러운 많은 음모가 꾸며지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신문이 없다면 많은 이단적인 아이디어나 금기사항도 논의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부정적인 면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환영도 없을 것입니다.


정당이 상호간에 혹은 제3자에 대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수록 언론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집니다. 오늘날 언론은 실제로 합헌적인 단체와 비슷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여론이 지배 계층에 다가갈 수 있고 공공의 양심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론이 위험할 때 보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독립 언론은 국가 기구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지켰고 강자에 대해 약자의 권리를 지켰습니다. 바로 슈피겔과 같은 언론기관이 특히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 - 국가와 사회기구의 막강한 권력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옹호 - 을 했지요. 자유경제 질서는 정치 질서가 자유로워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자유는 시장경제를 따르는 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유정치체제의 국가에서도 적합한 슬로건입니다. 슈피겔은 그 창간 배경과 구조에서 알 수 있듯 전후 독일의 가장 두려운 금기사항 - 분단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 을 끄집어내 논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싫든 좋든 이 잡지를 만든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또는 그렇다라고 대답해야만 하겠지요. 내가 꿈꾸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반면 나 없이 생명을 얻지 못했을 이 창조물의 메커니즘을 내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합니다.


슈피겔이 직면한 주요 위험은 무엇일까요? 최대한의 흥미를 추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무시할 때입니다. 현실 자체가 아니라 재미있는 현실을 반영할 때 가장 위험합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슈피겔이 직면하고 있는 유일한 위협입니다. 슈피겔이 어느 정도나 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는가에서 저는 우리 잡지의 성공을 측정합니다. 부수가 많아 기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성공 잣대가 아닙니다.



제3부 슈피겔 사건을 거치며(1960~1969)


최대의 언론 스캔들, 슈피겔 사건
1962년 슈피겔과 본(Bonn)의 통치자 간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이것이 슈피겔 사건의 발단이다. 대개의 동화처럼 끝이 좋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당시 아데나워 정부가 얼마나 슈피겔을 매질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 사건은 슈트라우스 국방부 장관과 아데나워 총리가 주도하고, 철통같은 보안 속에 이루어진 국가 권력이 저지른 행위였다.


모든 국가권력이 슈피겔 사건에 관련되었다. 칼스루에의 연방검찰과 연방범죄수사국, 경찰특공대 등 최소한 3개 기관이 참여했다. 그들은 밤에 슈피겔 사무실을 급습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파괴의지(슈트라우스)”로 글을 쓰는 “더러운 신문(아데나워)”을 궁극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편집국을 점거하고 몇몇 편집진을 체포하고 투옥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우리의 명예가 상실되는 것은 물론이고 벌금과 경찰의 감시와 기타 등등, 이에 따르는 부가 처벌도 무시할 수 없었다.


2차대전 종전 후 17년이 지나서 냉전의 절정에 있던 1962년 ‘반역죄’라는 말은 우리가 소련제국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즉 반역죄는 우리를 때려잡으려 한 몽둥이였던 셈이다. 이 사건처럼 국가 권력이 무자비하게 언론기관을 탄압한 전례는 없었다.


하지만 연방검찰이 몇 주 간 슈피겔 사무실을 수색했지만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자 사건은 연방법원으로 넘어갔고 1966년 8월 그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우리는 국가 기밀을 누설하지도 않았고 반역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언론의 자유를 확인했다. 외국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슈피겔과 언론 자유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그때까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제4부 슈피겔은 슈피겔이다(1970~1979)


불법 도청 스캔들
슈피겔은 1977년 3월 ‘시민 T씨에 대한 도청’이라는 표지기사를 통해 원자력 발전소 운영자 클라우스 트라우베에 대한 불법 도청 관행을 폭로했다. 그러자 함브르크의 언론인 게르트 부체리우스는 주간지 「디차이트」에서 슈피겔이 언론윤리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슈피겔은 취득한 비밀 자료를 공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이를 공표할 경우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슈피겔은 공표에 대한 찬반을 저울질했고, 공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비밀 자료를 공표했다고 말한다.


일주일 후 「디차이트」지에 ‘천만에요’라는 제목으로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의 반박문이 실렸다.


내 오랜 친구 게르트 부체리우스가 「디차이트」에 발언권을 신청, 슈피겔이 “국가반역에 가담했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언론인 부체리우스가 아니라 등기소 직원이 그 글을 쓴 것 같다.


T씨 기사를 보자. 슈피겔은 비밀자료를 공표(부체리우스가 말한 ‘공무상 비밀 누설’이 아니라), 최대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이게 슈피겔에게 유리한 점인가? 짐은 되지 않는가? 물론 슈피겔에서 일하는 몇몇은 1962년의 슈피겔 사건을 통해 수감 생활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개인으로서 저널리스트는 국가와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 기껏해야 기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기사를 써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체리우스 자네! 그런 심약한 행동을 우리에게 보이지 말게나! 전직 국회의원이자 자유주의 언론인인 자네에게 정치가와 언론인은 이득을 얻게 될 때 사회 전체에도 이득을 주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항상 권리와 법의 회색지대에서 움직이는 사회질서 보호는 헌법을 해석하는 데 적합해야 한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네. 기본법에 관한 한 사회질서 보호는 역사를 보면 불구가 된 팔을 지니고 있네. 연방이나 주정부, 법이나 권리에서 매일 사회질서 보호가 이뤄지지 않고 있네. 내무부와 의회가 이를 제대로 통제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이런 점을 기사로 써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 덜 유능한 국가 기구에 이런 권한을 넘기고 침묵해야 한다고 자네는 말하려나? 천만의 말씀이네!



제5부 새로운 통일을 꿈꾸며(1980~1989)


플릭사의 뇌물 스캔들
1984년 한스 베르너 킬츠와 요하힘 프로이스가 저술한 『플릭 - 매수된 공화국』은 플릭 사건을 다루었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그 책의 머리말을 썼다. 그는 머리말에서 인간의 부패 가능성과 사법부의 거부, 그리고 탐사보도에 대해 언급했다.


플릭 기부금 스캔들에 대해 「쥐트도이췌차이퉁」지는 “언론의 측면 지원 없이 수사당국은 아마도 그렇게 과감하게 수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렇게 확실하게 방해받지 않고 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독일에서 수사당국을 지원했는가? 누가 그들이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슈피겔 본 지사의 디르크 코크 지사장이 독일 수사당국을 지원해주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썩은 기둥을 뽑아내야 한다며 편집국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논리에 굴복했는데 원칙상 올바른 결정이었다.


이 사건은 의회에서 플릭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당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민주 법치국가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슈피겔은 이를 보도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건국 이후 “이제까지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심각한, 대기업이 국회의원을 매수한 사건”이다.


나를 포함해 슈피겔에서 일하는 세 명이 검찰 문서를 인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우리가 검찰의 문서에서 인용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쥐트도이췌차이퉁>은 “그 플릭 스캔들을 다룰 때 ‘중대한 공익’을 내세워 파헤치지 않았더라면 수사당국이 과연 확실하게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을까”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파헤친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촘촘하게 얽힌 부패의식이 문제였다. 정당은 이런 부패의식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본법 21조에 따르면 정당은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금을 장부에 기록해야 하는데 1967년 정당법에서는 이 규정이 슬그머니 약화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규정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 규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플릭사가 여러 정당에 1년에 2만 마르크 이상 기부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데 왜 그 이름이 정당법에 따라 장부에 기록되지 않았는가? 플릭사는 수십 억 마르크에 이르는 세금을 줄여보려는 의도로 정당에 기부를 했고 모든 정당의 고위당직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처럼 이 사실을 모른척 해야 할까?

우리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랄하게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난에 익숙해졌다. 또 한 장관의 사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람과 12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오히려 법을 만들어낸 정당이 그 법을 지키도록 타일러야 한다는 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다. 법을 위반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정당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6부 기차는 떠났다(1990~1999)


제4의 권력, 언론
1995년 1월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첫호를 낸 월간지 「슈피겔 스페셜」 사설에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루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읽지 않고, 무엇보다도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이 적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이 시작되면서 인쇄 매체의 전성시대가 끝났다. 이 때문에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이 우리나라에서 의미를 잃어 가는 것 같아 두렵다. 센세이션과 비난을 일삼는 시청률 경쟁이 정치적?사회적 모든 과정을 감시한다는 언론의 기능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정보를 전달하고 가능하면 깨우쳐 알려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르포르타주나 인터뷰 혹은 사설 등 여러 형태로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잘 쓴 글은 항상 그리고 계속해서 읽을 만하다.


슈피겔이 창간된 후부터 우리는 비록 정당한 비판을 했지만 너무 부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이 체제의 강점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저널리스트들은 자기의 역할을 과대평가할 필요 없이 의회민주주의의 약점을 파헤쳐야 한다.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는 언젠가 “정치의 맛을 본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이는 악습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현재의 권력자뿐만이 아니라 역사상의 권력자들도 다루게 되었다. 때문에 저널리스트는 때때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놓치기도 한다. 저널리스트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판 대상인 정치인 같은 사람들을 편하고 나태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제7부 그것은 투쟁이었다(2000~2002)


워싱턴은 인권을 위반하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위싱턴에서 테러가 일어난 후 미국 정부는 세계의 동정을 받았고 다른 나라의 비판을 반미주의라고 규정했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슈피겔 2002년 5호에서 부시 정부의 인권 위반을, “이제 분명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타는 복수심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럽의 정치인들과 법학자들은 미국 정부가 인권을 위반하는 정책을 취해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미국의 정책에 대해 느끼는 불만을 안으로 삼키고 있다. 누가 요즘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비판하겠는가? 그리고 미국인들은 보아하니 다른 나라의 비판이나 반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비스킷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 대통령을 한마음 한뜻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9?11 테러 이후에 워싱턴은 세계의 동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호의를 등에 업고 전세계적인 반테러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자유사회의 높은 윤리심과 인권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워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다. 서구 문명이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화답하듯 베를린 정부는 재빨리 머리를 숙이고 미국의 정책에 대해 ‘무한정한 연대감’을 느낀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테러리스트에 대한 서구 문명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 효과적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 더 이상 정의가 아닌, 불타는 복수심만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사로잡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 전사를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로 끌고 갔다. 바로 미국의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기지이다. 또한 미 정부는 이들에게 포로의 지위를 주지 않기 위해 이들을 “비합법적인 전투요원”이라고 규정한다. 전문가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다. 국제법에 따르면 미국의 이런 정책은 위법이다.


또한 미국은 사로잡은 전사들을 수송하는 것에서부터 인간다운 대접을 하지 않았다. 쇠사슬로 묶고 강제로 마취시킨 것은 위법이다. 눈을 가린 것도 고문을 금지한 1984년 규약에 어긋난다. 위생을 이유로 포획된 전사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기르는 수염을 자른 것은 어떤 법에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완전히 불필요하게 전사들을 모욕한 것이다.


현재 미국이라는 법치국가의 고위층에서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제기되는 토론 - 혐의자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해도 되나,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고문을 해야 하나 - 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미국 내 강경파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에게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미국이 전세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유엔을 이용하자 유엔인권위원회 메리 로빈슨 위원장은 공개적으로 미국에게 탈레반과 알 카에다 전사들의 인권을 존중하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미국인들이 이 발언에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전체의 여론이 이렇지만은 않다는 것은 「뉴욕 타임스」에 실리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몇몇 용기 있는 교수들도 미국의 국제법 위반조치를 비판했다.


미국인들이 모든 것을 자기들의 척도로만 재단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함을 뽐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장 사악한 테러 혐의자들조차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좋은 정치 체제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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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있는 그대로 써라!

이 책은 아우크슈타인이 행동하고 글로 쓰면서 보여준 리더십 일부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적이고 친절한 면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첨꾼과 수다쟁이에 대한 날카로운 조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루기 힘든 탐사보도를 격려했고 또 한편으로는 종종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기자들의 실패에 엄격하기도 한 그였다.


아우크슈타인은 정치가들을 봐주면서 비판하는 완곡한 표현을 기자정신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아우크슈타인과는 반대로 완곡한 표현을 앞세운 기자들은 그와 충돌하곤 했다. 옌스 다니엘이라는 가명으로 본(Bonn)의 정치 지도자에게 쓴 시사평론의 제목은 ‘있는 그대로 써라!’였다. 슈피겔 편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우크슈타인의 정언적 명령은 당시나 지금이나 이렇다.


‘있는 그대로 써라!’

- 요헨 뵐쉐(「슈피겔 스페셜」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