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탈환하겠다는 명분으로 일으켜진 십자군 전쟁은,현대의 서구와 중동간의 충돌로 인해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수많은 기사와 영웅들이 등장하고 스러졌던 십자군 전쟁을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였다. 이 책은 서구 역사상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십자군이 무엇이었고, 또 무엇이 아니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반세기에 걸친 학술적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십자군의 역사를 다양한 측면에서서술하였다.
■ 저자 토머스 매든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 역사학과의중세사 교수이자 학장이다. 십자군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국립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십자군에 관한 강연을 했다. 저서로 『십자군』『제4차십자군-콘스탄티노플 함락』『엔리코 단돌로와 베네치아의 등장』등이 있다.
■ 역자 권영주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역서로 『다 빈치 코드의 비밀』『헬렌 니어링의 지혜의 말들』『발작』『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1. 소집
2.제1차 십자군 원정
3. 예루살렘 왕국과 제2차 십자군
4. 예루살렘 왕국의 쇠퇴와 제3차 십자군
5. 제4차 십자군
6. 자국 내에서의 십자군
7. 제5차 십자군과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8. 성왕 루이의 십자군
9. 후기 십자군
10. 십자군이 남긴 유산
결론
십자군
소집
‘십자군(crusade)은 현대에 들어와 생긴 용어다. ’십자가의 표식을 단 자들‘을 뜻하는 crucesignati에서 비롯된 말로, 12세기 이후 십자군을 가리키는 말에 사용되던 별명이었고, 오늘날에는 원대한 계획(특히 도덕적 의미를 지니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서구 사람들은 최근 9?11 사태를 통해 종교가 지금도 파괴적인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전
기독교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서기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국가 정치와 전쟁에 처음으로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은 긴밀하게 융합되었고 로마 세력이 쇠한 다음에도 기독교 세력은 여전했다. 서부 제국을 분할한 게르만족 역시 기독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7세기에 부유한 상인인 마호메트가 새 종교를 창시하면서 처음으로 심각한 경쟁자를 만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아랍의 무역 도시인 메카에서 예언과 전도 활동을 시작했으나, 622년 추방되자 근처의 메디나로 몸을 피해 그곳의 통치자가 되었다.
메디나에서 그가 창시한 것은 단순한 종교 이상의 것이었다. 마호메트는 정치와 종교를 모두 관장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슬람교는 신앙인 동시에 통치 형태이기도 했다. 마호메트는 메카를 비롯해서 다른 아랍 도시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을 지하드(Jihad), 즉 성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지하드가 아니라 오로지 불신자들과 유일신을 거부하는 자들과 싸우는 전쟁만이 지하드였다. 이슬람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고, 632년 마호메트가 세상을 떠난 후, 칼리프(후계자)들은 정력적으로 지하드를 벌였고, 백 년도 채 되지 않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은 페르시아와 이집트, 시리아를 정복했다.
클레르몽 공의회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우르바누스는 그리스도의 기사들에게 해방 전쟁을 일으켜 동방의 기독교도를 잔인하고 굴욕적인 이슬람 지배 상황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세 사람들에게 예루살렘과 성지는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성서에서 경배하는 거룩한 도시, 예수가 살고 전도했으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루살렘은 순례의 목적지로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장소였다. 우주의 중심이나 다름없던 그 곳을 7세기에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에게 뺏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치욕스러운 일이었는데, 이제 투르크족이 그 지역을 점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 대해 온갖 모독과 범죄 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군사적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는 기사들은 이 이야기에 노기충천했다. 그리스도의 기사들은 하느님이 받은 모독을 복수하기 위해 나서야만 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우르바누스 2세는 1096년 8월 15일을 출정 날짜로 정했다. 서둘러 원정 준비가 시작되었다. 준비에 들어간 것은 서유럽에 있는 기사들뿐 아니라 비잔틴 제국의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도시를 통과할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 제공할 식량 마련에 부심 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은 로마 제국 이래로 서유럽에서 시작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야심에 찬 군사 작전이었다. 따라서 자원과 인력에도 거액이 들었다.
민중 십자군
십자군 전도사 중 가장 인기 있었던 은자 피에르(Peter the Hermit)는 남루한 차림으로 당나귀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감정에 호소하는 열변으로 청중을 홀렸다. 피에르의 설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십자군으로 끌어들였으며, 그가 행한 십자군 전도는 그것 자체가 십자군 원정이 되었다. 프랑스의 귀족 고티에 상자부아즈(Walter Sansavoir)는 피에르보다 한발 앞서 하급 기사들과 열의에 찬 농민을 모아 만든 또 다른 오합지졸 대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1096년 7월 중순 고티에가, 몇 주 뒤인 8월 1일에는 피에르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8월 6일,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마침내 투르크족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아나톨리아를 거쳐 진군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지역 감정으로 인해 무리는 독일 및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두 진영으로 갈라졌고 그들은 전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다. 결국 프랑스에서 피에르를 따라 원정길에 나선 수천 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황제와 전술 논의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가 있었던 피에르뿐이었다.
ㆍ 콘스탄티노플로 - 제1차 십자군의 주요 병력은 교황의 요청대로 1096년 8월 중순에 출발했다. 여러 군대가 각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곳에서 비잔틴 제국군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알렉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온 귀족들에게 제국의 영토였던 땅을 십자군이 점령하면 황제에게 즉시 반환할 것과, 자신의 영토 내에 머무는 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해달라고 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모든 전과(戰果)를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셈이었다.
ㆍ 콘스탄티노플에서 안티오크로 - 십자군의 1차 목표는 니케아 시였다. 투르크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는 소아시아로 진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5월 21일 벌어진 격전에서 십자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넉 달 동안 십자군은 악조건 속에서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렀다. 혹독한 더위와 물 부족, 게다가 식량 부족이 심각한 문제였지만, 1097년 10월 21일, 마침내 로마 제국 최대 도시들 중 하나이자 총대주교구의 하나인 안티오크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굶주림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던 병사들에게 안티오크는 위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1098년 이집트의 파티마(Fatimid) 왕조가 팔레스티나의 투르크족을 공격해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함락했다는 소식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투르크족 다수는 모술의 아타베그 카르부가와 함께 안티오크를 구하기 위해 진격했다. 소식을 듣고 십자군은 두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승산 없던 불리한 전투에서 십자군은 쾌승을 거뒀다.
ㆍ 안티오크에서 예루살렘으로 - 1099년 1월 13일, 시리아로 출발한 십자군은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이른 봄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했다. 십자군은 6월 6일 그리스도의 탄생지이자 기독교 도시인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공성 장비를 갖추고 7월 13~14일 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15일 이른 아침, 마침내 그 지역 수비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우르바누스 2세의 꿈이 실현되었다.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하고 순진한 계획은 서부 유럽부터 중동까지 이동해서 서방 세계에서 가장 방어가 든든한 두 곳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과 제2차 십자군
제1차 십자군 원정이 거둔 승리는 값진 것이었지만 신앙심과 이상주의만으로는 새 왕국을 유지, 확대할 수는 없었다. 강력한 지도자와 단련된 군대, 풍부한 물자가 필요했지만, 십자군에는 이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2차 십자군
그 후 40년이 지나는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제1차 십자군의 영웅담을 들으며 자라났다. 1145년 12월 1일, 교황 유게니우스 3세(1145~1153년 재위)는 교서 “콴툼 프라이데케소레스(Quantum praedecessores)”를 발표했다. 이는 1146년 3월 1일 수정된 형태로 재차 발표되었는데, 제1차 십자군이 거둔 영광스러운 승리들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부활한 땅으로 갈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제2차 십자군은 동시에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전개된 작전 외에 남서쪽으로도 대공세를 펼쳤다. 교황 유게니우스는 스페인에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승인하는 별도의 교서를 발표했다. 북부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영주들은 제노바군과 힘을 합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려는 오랜 싸움을 계속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제2차 십자군의 수립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과거 십자군을 행동을 고려할 때, 서로마인들이 점령한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투르크족과 정전 협정을 맺어 투르크족이 비잔틴 영토를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십자군에게 배반되는 행위였다.
1148년 6월 24일, 프랑스와 독일의 두 왕은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아크레에 소집했다. 여러 방책들이 논의에 올랐지만 그들은 십자군의 원래 목적인 에데사 탈환이 아니라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148년 7월 24일, 다마스쿠스 공격에서 기독교 군대는 어리석게도 도시 방어가 약한 지점을 공격하려고 안전한 위치를 버린 탓에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로 인해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예루살렘 왕국의 쇠퇴와 제3차 십자군
제3차 십자군 소집
하틴에서의 대패와 기독교 최고의 성물을 잃은 것, 그리고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긴 것은 서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제3차 십자군은 십자군 운동의 정점에 해당한다. 제3차 십자군은 서유럽의 신앙과 기사도적 미덕을 바탕으로 중세 최대의 군사 원정을 수립했다. 이번 십자군은 처음부터 왕들과 고위 귀족들이 참가하는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1189~1199년 재위)는 교양 있고 말씨도 세련된, 대담한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반면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조소 섞인 위트와 냉소적인 스타일은 리처드의 정력적이고 호방한 성격에 비하면 더욱 매력이 없었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이 끝날 때까지 필리프는 리처드의 그늘에 내내 가려져 있었다. 1190년 7월 4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은 베즐레에서 출발했다. 또 지금까지의 육상 이동 경로를 버리고 해로를 택하기로 했다.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아크레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필리프와 합류하여 아크레를 함락했다. 카리스마와 자금을 모두 풍부하게 갖춘 리처드는 곧 십자군 전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제4차 십자군
사자심왕 리처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예루살렘은 끝내 수복하지 못했다. 비록 다시 한 번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곳은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자다르로 우회하다
오랫동안 출발을 지체하던 십자군에게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비잔틴 제국에서 망명한 젊은 왕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 이사키우스 2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을 감시하에 둔 숙부의 악행을 바로잡아달라는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는 그 대가로 크게 사례할 뿐 아니라 이집트 원정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 함대가 알렉시우스의 요청대로 자다르에 도착한 지 이틀 후, 자다르는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십자군은 자다르의 모든 것을 빼앗고, 파괴했다. 약탈품은 베네치아와 함께 나누어 가졌다. 자다르의 함락으로 인해 제4차 십자군은 파문 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자다르 점령은 당연한 일이라며 죄의 인정을 거부했다.
알렉시우스 4세의 짧은 치세
앙겔루스가 알렉시우스 4세로 등극하자 그는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분할로 지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빚을 갚을 돈을 마련하기가 점점 더 벅차게 되었다. 알렉시우스에게서 돈을 못 받을 것 같다고 판단한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에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받을 것을 전부 받아내겠다고 했다. 젊은 황제에게는 이러한 위기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십자군에 대한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시위대는 황제를 갈아치울 것을 요구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감금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신뢰하는 부관 무르추플루스를 불러 몬페라토의 보니파체를 데려오도록 십자군 진영에 보냈으나, 그의 부하는 알렉시우스를 유폐한 다음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새 황제임을 선언했다.
무르추플루스와의 전쟁
무르추플루스는 1204년 2월 5일, 알렉시우스 5세로 등극했다. 비록 그는 교활했지만, 용감한 군인이자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엔리코 단돌로와 만났다. 단돌로는 황제에게 십자군이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알렉시우스 4세를 석방하고 그에게 십자군에게 줘야 할 돈을 지불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무르추플루스는 당연히 그것을 거부했고 알렉시우스 4세의 목을 졸라 죽이라고 명했다. 제4차 십자군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무르츠플루스는 살인자이며, 콘스탄티노플을 다스릴 권리가 없기에 전쟁은 올바르고 정당한 행위라고 선언했다. 1204년 4월 8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4월 12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재공격했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생각이 없는 비잔틴군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스도의 군대는 맹렬한 기세로 콘스탄티노플에 달려들었고, 십자군과 라틴계 피난민들은 탐욕과 육욕, 증오로 가득 찬 추악한 무리로 변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수많은 성물은 서로마로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제5차 십자군과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1213년 초 이단과의 전쟁이 그 주된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확신한 교황은 알비 십자군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대부분 폐지함으로써 경건한 군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제5차 십자군
새 계획이 제4차 십자군처럼 비극적으로 탈선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결심한 교황은 교회가 십자군을 전적으로 관리 감독하게 했다. 유럽은 다시 한 번 경건한 종교적 열의에 휩싸였다. 교회의 소환에 응한 왕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은 젊은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년 재위)였다. 십자군 준비를 정력적으로 감독하던 인노켄티우스의 죽음 후 후임인 호노리우스 3세(1216~1227년 재위)가 그를 대신했다. 당시 레반트는 살라딘 사후, 그의 형제인 알 아딜과 살라딘의 두 아들이 나누어가졌다. 1200년 알 아딜은 조카들을 밀어내고 아이유브 제국 전부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관리를 위해 그는 제국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세 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알 아딜은 이런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기꺼이 기독교도들과 평화를 유지할 용의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가의 서약을 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이집트를 향해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도들을 물리친 후 알 아딜의 세 형제의 화합은 깨졌다. 프리드리히는 알 카밀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늑장 원정에 대해 1227년 9월 29일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파문했다. 그 사이 십자군은 점점 분열되고 있었으나, 프리드리히는 신경 쓰지 않고 알 카밀과의 협상으로 십자군을 종결짓는 방법으로 해결을 도모했다. 예루살렘 왕국과 이슬람이 10년 간 강화조약을 맺는 대신,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에게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사렛, 그리고 성지에서 해안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준다는 것이다. 처음 십자군은 환호했으나, 협상 조건을 알게 되면서 기쁨은 경멸로 바뀌었다.
후기 십자군
십자군 국가의 붕괴
루이의 십자군 원정 실패 후, 앙주의 샤를은 1277년 예루살렘의 왕위를 사들였다. 그러나 그는 동방으로 가지 않았고, 그의 섭정을 보냈다. 키프로스의 위그가 왕권을 주장하며 예루살렘 왕국은 두 편으로 갈라져 아크레는 샤를을, 티레는 위그를 지지했다. 맘루크 왕조 칼라운은 여러 도시들과 개별적으로 조약을 맺어 십자군의 내부 분열을 이용했다. 칼라운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알 아슈라프 할릴이 1291년 4월 6일,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백 대 이상의 공성 장치를 이용해서 아크레를 공격했다. 굳건히 버티던 성채는 한 달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와 위용을 자랑하던 아크레와 티레, 트리폴리는 폐허가 되어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세계의 흔적으로 남았고, 십자군 왕국의 상실은 유럽에 큰 충격을 줬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성직자의 조세 문제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격하게 대립했다. 프랑스의 왕과 화해하고자 클레멘스 5세는 교황으로 취임한 후 수년간 가스코뉴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아비뇽에 정착했다. 교황청은 14세기의 대부분 동안 이곳에 남아 있게 되었다.
15세기의 십자군
15세기에 들어 교황의 세력과 권위, 그리고 기독교 기사도 문화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교황은 아비뇽에 있음으로써 신임을 잃었고 대분열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의 치부, 그리고 면죄부의 판매 같은 직권 남용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인 그들의 이미지에 한층 더 먹칠을 하는 데 일조했다. 한편 14세기에 변화하기 시작한 기사도는 15세기에 들어 예의범절과 문학 작품, 복고적인 취향의 여흥에 불과하게 되었다.
신성 동맹
종교 개혁 이후, 십자군은 자연히 유럽의 카톨릭 세력권 내로 한정되게 되었다. 교황들은 꼬박꼬박 투르크족과 맞서 싸울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것을 촉구해서 신성 동맹(Holy League)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른 카톨릭 국가들과 새로운 십자군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교황청 외에 동방 십자군을 가장 크게 후원한 나라는 스페인과 베네치아였다. 그러나 신성 동맹들은 단지 작은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17세기에도 카톨릭 유럽에서는 십자군이 계속해서 거론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사적 표현에 불과했다. 17세기 후반 투르크족은 더 이상 유럽에 심각한 위협을 미치는 세력이 아니었다. 유럽의 세력은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십자군이 남긴 유산
서유럽에 남긴 유산
세속 권력의 성장 및 교회 제도의 쇠퇴, 그리고 수백 년 간 계속된 종교 전쟁의 폐해로 인해, 유럽인들은 점차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중시하게 되었다. 반면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고딕 건축의 미와 중세 기사도의 미덕, 그리고 중세 시대의 신앙이 갖던 경건함을 칭송함으로써 중세 시대를 부분적으로나마 회복시켰다. 19세기 중반 십자군은 유럽 제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유럽의 모든 식민 열강들이 유명한 십자군 전사들을 뽐냈다. 외국의 적과 싸우기 위해 진격하는 십자군 기사의 낭만적 이미지는 1차 세계 대전에서도 크게 부각되어, 정치가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성스러운 전쟁으로 묘사했다. ‘십자군’이라는 말은 점점 도덕적으로 정당한 목표를 위해 싸우는 위대하고 명예로운,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는 없는 세속적인 전쟁을 뜻하게 되었다.
중동에 남긴 유산
서양인들에게는 중동 사람들이 최근에야 비로소 십자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뜻밖일 것이다. 십자군은 유럽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어도 이슬람에게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 벌어지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이교도와 벌인 다른 전쟁들이나 십자군이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십자군은 실패했으므로 의미도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함락된 후 유럽의 식민 열강이 중동을 지배하면서 그들은 중세의 맥락으로 이해한 십자군의 개념을 중동에 들여왔다. 20세기에 들어와 두 개의 주요 집단이 등장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유럽의 지배를 벗고 주권 국가들로 독립하기를 요구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코란과 이슬람의 역사에 의거해서 이슬람교도들이 지하드를 재개하고 이슬람 세계의 단결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서로 적대시했으나, 유럽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
중세 사람들에게 십자군은 신앙과 사랑, 자애의 행위였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세계와 문화, 생활 방식을 지키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면서 십자군이 호소력을 잃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노선을 따라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세계에 십자군이 설 자리는 없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십자군을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현대이든, 중세이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본성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 중동에 새로운 존재를 심고 유럽인들에게 거의 200년 가까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대 사건이었다. 또한 아랍 및 투르크족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십자군이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 범위와 정도는 확언할 수 없어도 십자군이 이슬람의 진출을 더디게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간접적인 의미에서도 십자군은 이슬람의 위협을 최종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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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