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정창수
한양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경희대학교 NGO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 현재 경희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박사 과정에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거쳐,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예산감시국장을 맡고 있다. 2001년부터 「시민의 신문」에 역사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그림 심재봉
공주문화대학 만화예술과를 졸업했다.2005년부터 「시민의 신문」 화백으로 있다.
■ 차례
하나. 햄버거의 기원은타르타르 스테이크
중세의 흑사병, 현대의 사스
거꾸로 가는 간척사업
금수강산, 문전옥답은 조상들의 공덕때문이다
1℃가 바꾼 바이킹의 운명
나일 강의 선물을 팽개친 이집트 외
둘. 베니스분과 동동구리무
결코 화려하지 않았던궁녀의 일생
베니스분과 동동구리무
조선의 전문직 여성 다모
조선시대에도 남편의 출산휴가가 있었다
김치는 제2의고려양인가 외
셋. 중동 비극의 원인은 중국의 석유시추술?
만들어진신화 ― 유랑민족 유대인
아메리카 최초의 흑인국가 아이티
미국 최초의 식민지 라이베리아
필로요새를 기억하라
전쟁을 위해만들어진 미국의 명백한 운명 외
넷. 로또로 정치인을 뽑은 제노바공화국
뉴딜과 올드딜
로또로 정치인을 뽑은 제노바공화국
조선시대 왕의 비자금, 내탕금
참말로 거시기했던 황산벌 전투
영국의회는 백수들의 모임 장소였다 외
다섯. 유전음주 무전금주
추악한 올림픽의 역사
우리에게 필요한 소도
맥주잔에 담긴 사연
조선의 물류전사 한잡지류
메이데이에 노동절을 허하라 외
여섯. 토지세와 강남공화국민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권력에서 자유로운 신문
조선시대로스쿨 외
책을 마치면서 ―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는 노력을시작하며
타르타르 스테이크와 동동구리무
하나. 햄버거의 기원은 타르타르 스테이크
햄버거의 기원은 타르타르 스테이크
햄버거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애용하는 식품 중 하나다. 미국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상품이고 그래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나 미국을 찬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햄버거가 처음부터 미국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기원은 유럽도 아닌 몽골이다. 목축과 전쟁 때문에 장거리 이동을 하던 몽골인은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 생고기를 즐겨 먹었다. 이것이 13~14세기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때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타르타르 스테이크’라 불렸다. ‘타르타르’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옥 타르타로스를 어원으로 하는 ‘타르타르인’에서 유래한다. 유럽인들이 몽골을 비롯한 동양 유목민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부른 것이다.
몽골인은 질긴 말고기를 먹을 때 생고기를 잘게 다져 스테이크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몽골인은 말고기를 말의 안장 밑에 깔고 다님으로써 고기를 부드럽게 한 다음 여기에 후추와 소금, 양파즙으로 조리해 날로 먹었다. 이 습관이 200여 년 동안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에 전해진 후 다시 독일에 전해져서 익혀 먹는 습관이 생겨났다. 그전까지는 고기를 부위 자체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독일의 함부르크에 이것이 전해졌고 1850년대에 수백만 명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미국으로 전해졌다. ‘함부르크 스테이크’는 간략하게 ‘햄버크’가 되었다가 가공한 식품인 ‘햄버거’가 된다. 그러나 햄버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2차대전 이후 맥도날드가 등장하고부터다. 이때 고속도로와 자동차 산업이라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햄버거는 이들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하게 됐다.
‘햄버거 커넥션’이란 말이 있다. 중앙아메리카 열대림에서 방목하는 소의 숫자가 1960년부터 20년 동안 두 배로 늘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기의 대부분은 미국의 햄버거 재료로 쓰인다. 때문에 전 세계 경작지의 24%가 소 12억 마리의 사육장이 되어버렸다. 소들은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우고 있다. 현재 육류 소비의 폭발적인 증가는 숲을 파괴하고 식량난을 부추기는 최고의 환경문제가 되었다.
원래 동양은 육식 특히 쇠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양에서 소는 생산 도구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식을 좋아하지 않던 한반도에서도 동물의 고기를 골고루 이용하는 몽골의 식문화가 전해져 ‘육회’가 탄생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가난해서 고기의 모든 부위를 먹는다는 자학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몽골에서 기인한 것이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이용하는 지혜였다.
최근 영국에서 비만세를 검토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패스트푸드를 본격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과다한 육류 소비로 비만이 날로 늘어나는 것이 인류에게 심각한 위기임을 인정한 것이다. 공포의 타르타르 스테이크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제는 전 세계를 비만이라는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둘. 베니스분과 동동구리무
베니스분과 동동구리무
화장을 영어로는 코스메틱(cosmetic)이라고 한다. 희랍어의 코스모스(cosmos)에서 비롯됐다. 우주의 명령을 받아 아름다운 것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미를 가꾸기 위한 화장은 문명의 탄생과 함께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화장은 병, 재앙, 마귀를 몰아낸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500년경에 이집트에서 피부가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야생 카스트로 나무의 기름을 발랐다는 것이다. 또 살갗에 녹색 선을 그려 마치 혈관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화장법도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향료를 화장품으로 이용했고 로마인들은 바디오일, 백악과 백납으로 만든 가루분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치아를 하얗게 만들기 위한 포르투갈산 소변이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16세기 유럽에는 베니스산 분이 인기를 끌었다. 베니스분은 백연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몸에 몹시 해로웠지만 여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동방무역을 독점하던 베니스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의도한 고도의 상술 때문이기도 했다. 서양의 화장술은 피부 손질과 관리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백인들이 다른 인종에 비해 피부가 가장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오비디우스가 쓴 『미의 기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화장술 책인데, 이 책을 통해 남자들도 화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여인들도 오래 전부터 화장을 했다. 화장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고구려 수산리와 쌍영총 고분 벽화의 시녀들을 보면 낮은 신분의 시녀들도 볼을 빨갛게 하고 눈썹을 다듬는 등 신분에 관계없이 화장을 하고 있다. 백제인들의 화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일본측 사서(史書)와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일본이 백제에게서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법을 배워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발전한 화장품 산업은 조선 전기에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상업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탈피하진 못했다. 그러다 개항 이후 ‘구리무’ 열풍이 몰아치더니 1920년대에는 종로4가의 베오게 시장에 있던 포목상 박승직(두산그룹 창업자 박두병의 부친)의 부인 정씨가 만든 ‘박가분’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렸다. 그러나 원료 중 하나인 납에 유독 성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폐업했다.
서양인들은 한국 여인의 맑고 고운 피부를 부러워한다. 현재 우리의 화장품 시장은 세계 최대 수준이어서 다국적 기업들의 주 공략대상이라고 한다. 염려되는 것은 혹시 우리만의 미를 살리거나 개성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마치 ‘베니스분 바르듯’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남편의 출산 휴가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600여 년 전인 1426년, 세종8년에는 관청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백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이것을 법에 명시하도록 형조에 지시했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3년 뒤에는 산전휴가 30일을 더 주도록 했다. 놀랍게도 여자 노비에게 출산휴가 130일이 법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1434년에는 산모의 남편에게도 산후 30일간 쉬게 하라고 했다.
남편에게 육아휴가를 주는 것은 선진국도 최근에야 실시한 것으로서 세종대왕의 이런 조치는 아마도 세계 최초일 것이다. 대부분은 태아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도였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자.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00년대)에는 태아를 유산하는 아내를 처벌하고,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해도 아이 낳는 일을 포기할 수 없도록 규정했던 기록이 있다. 대부분은 이런 정도의 관심도 없었다.
주당 35시간의 노동시간과 재정지원으로 새로운 베이비 붐이 일어나고 있는 프랑스 같은 경우를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다. 조선시대 정도라도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노동법에는 산전, 산후 모두 합해 9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정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이를 외면하고 있고 출산휴가를 이용하려는 사람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세종이 단지 마음이 좋아서 이런 정책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하다. 이 사람들이 무늬만 우익인지 아니면 노비보다 못한 현실을 옹호하고 싶은 아주 전근대적인 우익인지 모르겠다.
셋. 중동 비극의 원인은 중국의 석유시추술?
중동 비극의 원인은 중국의 석유시추술?
서기 208년 중국에서는 조조, 손권, 유비의 위, 오, 촉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촉은 대부분이 산간지역이고 인구도 적어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 더구나 바다에 접하고 있지 않아 소금을 구할 수 없었다. 북으로는 조조의 위나라, 동으로는 손권의 오나라가 막고 있었고, 남으로는 베트남의 밀림이었다. 촉나라 사람들은 지하수를 이용해 소금을 얻었다. 땅속을 1킬로미터 이상 깊이 파면 염수층이 나온다. 여기에는 고도의 시추술이 필요했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이런 시추술로 염수를 끌어올려 큰 솥에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도 발견했다.
다른 나라에서 석유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되었는데 구약성서에도 기록이 있으나 19세기까지는 주로 등화용이었다. 시추술을 몰라서 지표면에 흘러나오는 것을 사용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828년 앙베르라고 하는 프랑스인 선교사가 중국의 시추술을 유럽에 알렸고 1841년부터 석유시추가 시작됐다. 미국은 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이 시추술을 배워 1859년 처음 이 방식을 이용하게 된다. 서양이 석유시추술에 있어서는 중국보다 최소한 1900년이나 늦은 것이다. 이 기술의 전달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석유가 대량공급되자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었다. 이때 최대의 산유국 미국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곤란하게 된 것은 중동이었다. 1900년대 들어 석유 소비가 증가하면서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는 중동은 1차대전부터 격전장이 된 것이다. 중동은 석유의 혜택을 몰랐고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채굴 초기부터 석유 자원은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소유가 되고 만다.
소금을 얻어 생존하기 위해 개발했던 평화의 기술이 중동에 저주가 되고 전쟁의 원인이 되어 돌아온 작금의 현실을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이 다시 와서 본다면 기가 막힐 것이다.
넷. 로또로 정치인을 뽑은 제노바공화국
로또로 정치인을 뽑은 제노바공화국
로마시대의 이야기다. 어떤 총독에게 노예 5천 명이 있었는데 노동의욕 저하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노예 5천 명에게는 하루 일당으로 빵을 하나씩 주었는데 그중 5분의 1씩을 빼앗았다. 그러면 천 명분의 빵이 되는데 그 중 절반을 추첨을 통해 한 명에게 모두 주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이 가진 것이다. 노예들은 매일 이벤트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을 잊었다고 한다. 천 명분의 빵은 인생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권의 기원설 중 하나다.
현재와 같은 근대복권의 효시는 1530년경 피렌체에서 등장한 ‘로또’다. 제노바공화국에서는 90명의 정치가 중에서 5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한 것에 착안해 5/90게임이 복권으로 등장했다. 치열한 경쟁보다는 공평하게 게임처럼 정치인을 뽑는 시스템을 선택한 것이다.
복권은 미국 식민지 개척의 자금으로도 쓰였다.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던 버지니아 사는 제임스1세에게 건설자금을 위한 로또 발행을 승인받았고 당시 이 회사 수입의 절반은 복권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미국은 복권으로 모은 돈으로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의 계 중에 낙찰계나 작백계, 산간계처럼 복권과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더디었던 데다 평등주의적인 정서 때문에 발전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가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승찰’이란 근대 복권을 처음으로 발행했고 1947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했다.
복권은 요행증후군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개인의 진보가 불가능한 사회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복권의 구입자는 대부분 서민이어서 공익보다는 ‘소득의 역진성’과 ‘이중조세’만 야기한다는 비판이 많다. 지금 우리나라는 23종의 복권을 발행하고 수백억 원이 넘는 상금을 걸고 있다. 그 돈은 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정부가 공공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 시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심각한 현실에 대해 정치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정치인들을 아예 로또로 뽑아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 된 이유
미국의 수도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워싱턴이 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정부의 내각은 국무장관 제퍼슨과 재무장관 해밀턴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각각 주의 독립성을 보장하려는 공화주의자와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상한 연방주의자를 대표하였고 지역적으로는 남부와 북부를 대표했다. 두 사람은 독립전쟁 당시의 채권 문제로도 충돌했다. 해밀턴은 이제 독립했으니 국가의 신뢰를 쌓기 위해 즉시 갚아야 한다고, 제퍼슨은 채권은 국내의 부유층들이 모두 헐값에 매입했으므로 채권을 갚자면 부유층을 위해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둬야 하니 안 된다고 했다. 결국 해밀턴은 남부가 요구한 수도 이전을 승인해주는 대신 채무인수법안의 통과를 요청했다. 워싱턴 대통령조차도 뉴욕에 머무르길 원했지만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미국의 제일 큰 도시였던 뉴욕은 하루아침에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수도 워싱턴을 건설하는 것은 새 정부 최대의 사업이었다. 프랑스인인 랑팡이 설계한 도시는 50개 주와 5억 인구의 수도를 예견하고 인구 80만 명 규모로 계획했다고 한다. 당시 백악관 건설 비용만 해도 40만 달러 정도였는데 국무부의 국내예산이 8천 달러에 불과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의 수도 이전은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틀을 바꾸려는 혁신이기도 했다. 당연히 뉴욕 중심의 북부는 불안을 느끼고 반대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지금도 미국 최대의 도시는 여전히 뉴욕이며 미국의 경제 중심지로서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다섯. 유전음주 무전금주
유전음주, 무전금주
국가적으로 금주를 위한 시도는 세계 어디에서나 있었지만 이를 전국적으로 시행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서양에서도 핀란드와 미국이 1919년 전국적으로 금주를 채택했다가 폐지한 적이 있다. 주로 술의 원료인 곡물을 낭비하는 것을 막거나 종교적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금주를 단행했다. 미국은 종교적인 이유로 금주법을 시행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소지를 없애기 위해 헌법까지 개정했다. 1차대전 중 발의한 수정헌법 18조는 미국 내에서 술의 제조와 판매, 운송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맥주, 양주, 증류수의 수출입도 중지되었다.
미국의 금주법은 제조자와 판매자를 단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모순이 있었다. 그래서 갱들이 등장했다. 특히 맥주에는 중과세 되었는데 갱들 때문에 사실상 이중과세가 되었다. 맥주를 즐겨 마시던 노동자계층은 더 타격을 받게 되었다. 원래 비싼 술을 먹던 계층은 수입이나 다른 방법으로 이 난국을 타개했다. 금주법도 계급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이 수시로 발효됐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조 때는 이를 단속하는 책임을 밭고 있던 형조판서가 실행이 어려우니 화주(소주)만 금하자고 주장했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당시 소주는 고급주였다. 몽골이 들어왔을 때 전해진 이 술은 3번 이상 걸려야 했고 곡물이 많이 들어가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비싼 술은 주로 양반들이 먹었는데 양반 집에 들어가 단속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값싼 탁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단속했고 그래서 원성이 자자했다. 형조판서는 청주나 소주처럼 고급술은 단속 대상이 아니거나 소비하는 사람이 상류층이어서 처벌되지 않으니 집중적으로 단속하자는 의도였다. 유전음주(有錢飮酒), 무전금주(無錢禁酒)였던 당시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던 것이다.
여섯. 토지세와 강남공화국민들
토지세와 강남공화국민들
토지가 완전한 사적 소유의 개념으로 정착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철저하게 진행된 시기는 유럽에서도 1848년부터 1875년 세계공황까지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왕이나 봉건적 질서에 의한 토지소유 개념이었고 공황 이후에는 시장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에 제한을 두었다.
미국이 초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강력한 동력은 토지 문제였다. 기회의 땅이라는 것은 ‘토지를 가질 기회의 땅’을 말했다. 미개척지도 많았는 데다, 제퍼슨이나 페인 등 미국의 건국세력이 토지의 평등권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링컨의 택지법으로 구체화되었다. 택지법에 의해 가족당 160에이커(약 20만 평)의 공유지를 분배하고 거기에 집을 짓고 5년간 일하면 토지소유권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약 3억 에이커(3672억 평)의 땅이 분배되었다. 우리나라 면적의 40배나 되고 미국 본토의 절반에 가깝다. 따라서 미국의 초기 세원은 토지세가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2백만여 가구가 이렇게 배분받은 땅으로 중산층을 형성했다. 이들이 아직도 미국의 농촌에서 미국의 중심을 잡고 있는 중산층들이다. 하지만 미국도 이 시스템이 파괴되면서 폐해를 드러낸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 가치의 주기적 상승이 생산을 압박하고 그것이 공급과 수요를 연쇄적으로 유발함으로써 불황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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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세를 인하하려고 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미국 세금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세금도 거부하는 저들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토지문제는 결코 개인적이거나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살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강남공화국민들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