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풍속화를 통해 드러나는 조선 음식의 새로운 면면을 밝히면서,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이해를 넓히는 데로 나아간다. 요즘은 잘 먹지 않는 숭어찜을 먹는 장면이나, 조선 사람들이 차려낸 서양 음식을 보여주는 그림 등이 대표적인 예.조선 풍속화 속의 음식에 김치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비롯해 흔히 알려진 두레패도 없고, 등짐장수는 반질반질한 오지그릇 대신 질그릇을 나른다는 것등 새롭게 밝혀지는 모습들이 흥미롭다. 근대화로 덧씌워져 제 모습을 가까이서 만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사회상을 보여줌으로써 실제 "조선적전통"의 참모습을 전한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음식사 문헌 사료들을 곁들여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의 감칠맛 나는 해설이돋보인다.
■ 저자 주영하
196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풀무원 김치박물관에서 8년 동안 학예연구관으로 일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서 논문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북경의 중앙민족대학에서 「중국 쓰촨성(四川省) 량산(凉山) 이족의 전통칠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005년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중국, 중국인,중국음식』『한국의 시장-사라져가는 우리의 5일장을 찾아서』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 그림 속에 음식이 있고, 음식속에 역사가 있다
1. 그림으로 보는 서민의 음식 풍속
길가에 앉아 술한잔 마시며, 사또를 생각하다 - 김홍도 「노방노파」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엿판 들고 태평성대를 꿈꾸다 - 유숙 「대쾌도」
어부의점심시간, 숭어찜과 막걸리 한잔 - 김득신 「강상회음」
전전긍긍 굿판을 벌이니 제물도 부족하다 - 신윤복 「무녀신무」
조기잡이풍성하니 어깨춤이 절로 나네 - 김홍도 「조기잡이」
질그릇을 짊어진 옹기장이 - 권용정 「등짐장수」
힘든 김매기에 푸짐한 새참먹어보자 - 김홍도 「수운엽출」
흔할 때는 나그네도 대접하는 추수라 - 김홍도「벼타작」
2. 그림으로 보는 궁중의 음식 풍속
조선 시대,궁중에서 우유를 짰다 - 조영석 「채유」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 거만하게 일곱 잔 술을 받다 - 아극돈 「청연」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차린 정조의 마음 - 김득신 외「봉수당진찬도」
일본 사신, "승가기"를 동래 부사에게 바치다 - 작자 미상「동래부사접왜사도」
식탁 위의 서양 음식이 말하는 것 - 안중식 「조선통상장정 기념 연회도」
3. 그림으로 보는 관리의 음식 풍속
금주령, 그래도마셔야 했던 관리들 - 신윤복 「주사거배」
중양절에 퇴직 관리에게 국화주를 대접하다 -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102세 노모 경수연에남자 궁중조리사가 나선 이유 - 작자 미상 「조찬소」
돌 맞은 홍이상 책과 붓을 쥐어들다 - 김홍도 「돌잔치」
혼인한 지 60년,경사로다 회근연 - 작자 미상 「회혼례첩」
숯불 쇠고기에 한잔 술, "야연"의 희열 - 작자 미상 「야연」
4. 근대적 시선으로 그린 그림 속의 "조선음식"
국수틀에 사람이 올라간 사연 - 김준근 「국수 누르는 모양」
시집온 새색시 "큰상"을 받다 - 김준근「신부연석」
콩으로 두부 짜 잔치 준비 하여보세 - 김준근 「두부 짜는 모양」
새해 첫날 나라 잃은 사람들이 마신 "도소주" -안중식, 「탐원도소회지도」
나오며 : "조선"의 표상과 실재에 대해 다시생각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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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1. 그림으로 보는 서민의 음식 풍속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엿판 들고 태평성대를 꿈꾸다 - 유숙 「대쾌도」
요사이는 보기 드물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이북에서 음력 5월 5일 단오는 설날에 견줄 만한 큰 명절이었다. 시기적으로는 논에 모를 막 내고 난 뒤이며, 더위와 싸워야 하는 고된 김매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니, 한바탕 놀이가 더욱 필요한 때이다. 특히 단오가 되면 장터 근처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졌다. 이 그림이 표현하는 만화(萬花)의 때는 바야흐로 단오 전후라 여겨진다.
우선 그림의 중앙에는 갓 맞붙은 씨름꾼 두 사람과 겨루기에 몰입한 택견꾼 두 사람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더욱이 그림의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갓을 쓴 두 젊은 양반이 각각 대전별감, 곱추 하인과 맞붙어 술 한 잔 마시기를 의논하고, 술 장사꾼은 벌써 막걸리를 잔에 부어 이들을 유혹한다.
시선을 오른쪽 대각선으로 옮겨 보면 택견꾼 오른편에 서서 흰엿을 담은 목판을 목에 걸고 다니는 젊은 장사꾼이 보인다. 찹쌀이나 멥쌀로 물엿을 만들고 이것을 더 졸여 식히면 고체의 강엿이 만들어진다. 강엿을 다시 약한 불에 가열하여 녹인 후 이것을 여러 번 잡아늘이면 흰엿이 된다. 당시에 엿은 씨름판을 구경할 때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려주는 단맛 내는 간식거리였을 것이다. 여기에 엿장수의 엿타령까지 보태어지면 씨름판은 한껏 흥이 난다.
2. 그림으로 보는 궁중의 음식 풍속
식탁 위의 서양 음식이 말하는 것 - 안중식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
기록에 의하면 이번 그림은 고종 20년인 1883년 6월 22일 조선측의 전권대신인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영목(1826~1884)과 일본측 전권대신인 판리공사 다케조에 신이치 사이에 조인된 조일통상장정 조인식을 끝낸 뒤에 있었던 연회를 그린 것이다. 당연히 민영목과 다케조에가 이 연회에서 주빈이다. 그림의 왼편인 주빈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사모관대를 갖춘 조선의 대신으로 민영목이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어야 하는 다케조에는 민영목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고, 무관세 조약을 맺은 일본은 관세자주권을 침해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재협상을 요구하던 조선이 1882년 4월 6일, 미국을 필두로 하여 영국?독일과 관세와 수출세 등을 규정한 통상조약에 조인하자 더 이상 무관세 무역을 고집할 수 없었다. 결국 5월에 협상대표를 조선에 파견하여 마지못해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그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군인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일본공사관은 불타버리고 협상대표는 겨우 탈출하여 인천을 통해 귀국하였다.
자국에 대한 감정이 이처럼 악화되자 당황한 일본은 다케조에를 신임 공사로 임명하여 서울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협조를 구했다. 미국 공사는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협력을 얻도록 도와주었고, 결국 조선과 일본은 이날 통상장정에 조인을 했다. 따라서 민영목의 왼쪽에 앉은 사람은 묄렌도르프일 가능성이 많다.
참석한 모든 사람의 앞에는 서구식 식기가 놓였다. 나이프와 포크, 스푼과 함께 빨간 줄이 매달린 사기로 만든 양념 단지인 캐스터와 각설탕을 담은 분청사기 통이 놓여 있다. 아울러 이들 식기 가운데에는 커틀릿으로 여겨지는 음식이 접시에 담겨 있다. 또 모양이 각각 다른 잔이 다섯 개씩 놓였다. 잔의 모양으로 보아 모두 술잔일 가능성이 많다. 그에 걸맞게 술이 담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백자 주전자와 육각 모양의 뚜껑이 있는 분청사기 그릇이 놓여 있다. 특히 술잔의 형태로 보아 포도주는 물론이고, 위스키나 잔과 같은 증류주도 이 연회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건이 있은 다음해인 1884년 영국대사관의 주차영사로 근무했던 칼스는 조선 정부의 예조에서 거행되는 만찬은 기생과 악사만 빼고는 모두 유럽식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미 서구의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와 왕실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았던 당시, 우리는 열강의 아귀다툼 속에서 그래도 유럽식으로 격식을 갖추어 손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상의 가운데에는 반드시 화병과 함께 조선식의 괴임음식을 세 접시나 올렸으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우리만의 독자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좌석의 배치다. 좌석 배치의 위계로 볼 경우, 민영목이 앉은 자리가 가장 높고, 좌우가 차석, 그리고 민영목이 자리에서 멀수록 좌석에 앉은 사람의 위계가 낮다. 이러한 배치 방법은 조선 왕실의 규칙에 가깝다. 조선 시대 때는 각 관서별로 서열에 따른 지정 좌석이 정해져 있었다. 즉 최상위자는 주벽이라 하여 북쪽에 앉아 남향하고, 차상위자는 동벽, 차하위자가 서벽에 자리를 잡았으며, 최하위자는 남상이라 하여 남쪽에 앉았다. 이를 보면 일본대사 다케조에가 서벽에 앉았으니 실상 민영목과 묄렌도르프보다 낮은 위계에 놓였다.
이것은 근대국가의 외교관례에 비추어 보면 의전예법에 알맞지 않은 방식이다. 조일통상장정의 문서에 실제 조약 당사자로 나오는 민영목과 다케조에는 조선과 일본의 양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이 조약 체계를 기념하여 베푼 연회에서 조선 왕실의 좌석 배치 규칙을 따른 점은 당시 연회를 주관한 조선측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근대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미 서양이 세계적 질서의 중심에 있던 당시에 조일통상장정기념연회의 형식과 내용이 보이는 차이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하겠다. 내용은 서양식의 식기?음식?술?식탁?의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형식(context)을 구성하는 좌석의 배치와 식사의 규칙은 조선식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1883년의 조선 왕실과 외교통상 업무를 맡은 통리아문의 관원들이 인식한 서양 혹은 근대에 관한 동도서기 사유의 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3. 그림으로 보는 관리의 음식 풍속
중양절에 퇴직 관리에게 국화주를 대접하다 -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이번에 볼 그림은 단원이 59세가 되던 1804년 개성에 열린 기로연(70세와 80세에 이른 사람들을 모아 연 모임)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세련계(世聯?)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70세의 노인들 모임인 기영회와 80세 노인들 모임인 구로회를 합쳐 연회를 베푼 데서 연유한다. 그림의 상단의 머릿글을 보면 1804년 늦가을에 지금의 개성 송악산 만월대 아래에서 기로연이 열렸으며, 마침 김홍도가 그것을 보았기에 부탁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연회장의 중심에는 붉은 옷칠을 한 발이 높은 사각 화상(花床)이 놓였다. 조선 시대 왕실이나 관청의 연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화상이다. 보통 봄에는 매화, 여름과 가을에는 백일홍 모양의 지화(紙花)를 만들어 화병에 꽂아둔다. 이 두 꽃은 모두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연회상 차림에서 핵심적인 상징이 된다.
화상 옆에도 발이 높은 사각 상이 놓였다. 크고 작은 백자 항아리 3개에는 술이 담겨 있다. 기로연의 성격상 술이 빠질 수 없다. 생각건대 그중 한 항아리에는 중양절에 마시는 국화주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로연은 중앙의 예조판서나 관찰사가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주관했는데, 이 그림 속의 계절이 늦가을이라 하니 가을의 중양일(重陽日)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다른 항아리에는 아마도 당시 약주의 대명사인 백하주(白霞酒)와 조선 중엽부터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유행했던 송절주(松節酒) 같은 술이 담겨 있지 않을까.
원래 기로연은 문과 출신으로 정2품의 실제 관직을 한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는 자리다. 이 그림에 묘사된 기로연은 지방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왕실의 기로연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삼현육각 여섯 악기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흥겨운 가락을 몰아가고, 가운데 마당에는 무동 둘이 춤을 춘다. 그런데 이것을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으니 가을 들놀이의 절정인 중양절이 예전에는 얼마나 짜임새 있고 큰 축제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4. 근대적 시선으로 그린 그림 속의 조선 음식
콩으로 두부 짜 잔치 준비 하여보세 - 김준근 「두부 짜는 모양」
기산 김준근은 비록 조선적인 풍속을 조선의 필묵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그 기법은 서양식이었다. 그의 그림은 당시 조선을 찾았던 서양인들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국내보다는 독일?덴마크?오스트리아?미국 등지에 그림이 흩어져 있다. 이번에 볼 기산의 그림은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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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자세히 보면 판때기의 안쪽에는 칼로 줄을 그어놓았다. 두부에 자국이 가게 만들어 칼로 썰 때 줄을 잘 맞추도록 한 배려이다. 우물에서 갓 길어온 차가운 물이 담긴 다른 함지박에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부 주머니를 넣는다. 두부는 잘 부서지기 때문에 물 속에 넣고 주머니를 벗겨내야 한다. 주머니를 벗기면 마치 아이의 속살처럼 하얀색의 두부가 등장한다. 이것을 칼로 네모나게 잘라 접시에 담으면 두부 제작은 모두 완성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회갑잔치나 제사 때 특별히 두부를 만들었다. 조선두부는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계식으로 바뀐 일본식 두부로 변화하게 된다. 비록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자 일제가 두부 장사마저도 허가제로 하도록 강요하지만, 그래도 공장 두부와 집 두부는 나란히 허용되었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이 근대적으로 바뀌면서 결국 오늘날에는 모든 두부를 공장에서 공급받아서 먹고 있다. 그런데 요사이 미국에서 두부가 ‘토푸(Tofu)’라는 이름으로 일대 유행을 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근대의 도래를 통해서 두부를 서양에 알린 탓에 그 이름도 ‘토푸’가 되었지만, 그 우수한 영양가가 ‘토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다. 만약 이 그림을 그린 기산 김준근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애통해했을까?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타자의 눈으로 본 시선만 있었지, 근대적 변환을 위한 사유는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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