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는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내다버렸고 노동자 해방을 부르짖었던마르크스는 가정부를 45년 간이나 착취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 우월 주의자였고 논쟁을 즐긴 철학자 러셀은 의견이 다른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던 망상증 환자였다.
이러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폴 존슨은 지식인들이 당대나 후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한 만큼이들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윤리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지식인의 역할과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대중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제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 저자 - 폴 존슨(Paul Johnson)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레알리테」의 부편집장과 「뉴 스테이츠먼」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런던타임스」「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권위 있는신문과 잡지에 인문·종교에 관한 글을 기고했고 역사 분야에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 전 세계에 번역·소개됐다. 프랜시스 보이어 공공정책상과크루그상의 문학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예술: 새로운 역사』 『르네상스』 『유대인의 역사』 『현대: 2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세계』 『근대의 탄생』 『기독교의 역사』『요한 바오로 2세와 카톨릭의 복원』 등이 있다.
■ 역자 - 윤철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화전문지 「프리미어」「스크린」 등에서 기사 번역 및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역서로는 『위대한 영화』 『샤먼의 코트』『제임스 딘 : 불멸의 자이언트』 『런던』(근간) 『알프레드 히치콕: 서스펜스의 미학』(근간) 등이 있다.
■ 차례
01 장 자크 루소 - 위대한 정신병자
02 퍼시 비시 셀리 - 냉혹한 사상
03 카를 마르크스 - 저주받은 혁명가
04 헨릭 입센 - 거짓 유형의 창조자
05 레프 톨스토이 - 하느님의 큰형
06 어니스트 헤밍웨이 - 위선과 허위의 바다
07 베르톨트 브레히트 - 이념의꼭두각시
08 버트런드 러셀 - 시시한 논쟁
09 장 폴 사르트르 - 행동하지 않는 지성
10 메드먼드 윌슨 - 구원받은변절자
11 빅터 골린츠 - 고뇌하는 양심
12 릴리언 헬먼 - 뻔뻔한 거짓말
13 조지 오웰에서 노엄 촘스키까지 -이성의 몰락
원주
역자후기 - 귀감과 반면교사
지식인의 두 얼굴
1장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
위대한 정신병자
절대 권력을 발휘하던 성직자가 몰락하기 시작한 18세기,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이 출현하여 이 진공상태를 메꾸고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교회의 제단을 부수고 인간의 이성을 떠들기 시작한 것은 장 자크 루소보다 연배가 높았던 볼테르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루소야말로 근대 프로메테우스의 모든 특징을 결합시킨 첫 인물이었다. 루소는 기존 질서를 통째로 거부할 권리를 주장했고 자신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를 철저히 뜯어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며, 정치적 과정을 통해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본능과 직감, 충동이 인간의 행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이 비길 데 없는 인류애의 소유자이며,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킬 유례 없는 재능과 통찰력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놀랍게도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루소가 스스로 내린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그토록 비범한 도덕성과 지성을 인류에게 나눠준 루소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그러한 힘을 얻었을까? 루소가 얻은 명성의 큰 부분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이론-교육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학문과 예술론』, 『에밀』, 『사회계약론』, 심지어는 『신엘로이즈』의 기저에 깔린 주제였다에서 비롯됐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글로 쓴 것과는 정반대로 실생활에서는 아이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가 자기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을 연구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자신보다 더 즐거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화는 그에게는 고무적인 편이 못된다. 그는 성격상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루소가 그의 친자식들에게 한 행동은 욕지거리가 날 정도로 충격적이다.
1746~1747년 겨울에 테레즈는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성별은 모른다. 아이는 이름도 얻지 못했다. (루소의 얘기로는) 그는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테레즈를 설득했다.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이를 내다버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순종했다." 아이의 옷에 숫자를 적은 카드를 넣은 루소는 산파에게 고아원에 갖다버리라고 지시했다. 그가 테레즈에게서 얻은 4명의 다른 아이도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처분됐다. 맏아이 때처럼 숫자 카드를 집어넣은 수고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것만 달랐다. 어느 아이도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오래 살았을 성싶지는 않다. 루소는 아이 다섯 명의 생년월일도 기록하지 않았고,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1761년에 딱 한 번, 테레즈가 죽어가고 있을 때 마지못해서 맏아이의 행방을 찾으려고 숫자를 적은 카드를 활용해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현대의 어느 학자는 루소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루소는 마조히스트, 노출증 환자, 신경쇠약 환자, 우울증 환자, 자위행위 중독자, 방랑 충동의 영향을 받은 잠재적 동성애자, 정상적인 애정과 부성애를 갖지 못한 사람, 편집증 초기 환자, 죄의식이 가득하고 병리학적으로 소심하며 질병으로 인해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내성적인 자아도취증 환자, 예민하고 욕심 많은 도벽 환자, 유치증 환자였다."
루소는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그의 인생과 가치관 모두는 치명적일 정도로 불안정했다. 루소를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은 그가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밝혔던 소피 두드토였다. 대단히 장수해서 1813년까지 생존해 있던 그녀는 이런 평결을 내렸다. 그는 겁이 날 정도로 못생겼어요. 그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는 딱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상냥하고 친
절하게 대했어요. 그는 흥미로운 미치광이였어요."
2장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
저주받은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는 근대 그 어떤 지식인보다도 실제 사건이나 인류의 정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가 활용한 개념이나 방법론이 매력적이라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개념이나 방법론이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된 것은 그의 철학이 세계의 두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그들의 많은 위성국가에서 제도화된 덕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닮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마르크스가 스스로를 위해 상상했던 개인적 독재 권력이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추종자인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세 사람에 의해 현실로 구현되면서 인류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 첫 질문은 도대체 그는 어떤 의미의 과학자였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심한 증거 수집과 평가를 통해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그는 어느 정도나 관여했는가? 마르크스의 전기는 표면적으로는 그를 학자로 묘사한다. 그의 친가나 외가는 모두 학자 가문이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랍비이자 탈무드 학자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는 학자가 아니었고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찾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시인과 저널리스트, 도덕주의자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과학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모든 요소에 있어 그는 비과학적이었다.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재정과 산업에 대한 글을 썼지만,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이와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한 명은 네덜란드에 사는 삼촌 리온 필립스였는데, 훗날 대기업 필립스전기회사를 창립한 성공적인 사업가였다. 자본주의의 총체적 과정에 대한 필립스 삼촌의 관점은 박식했고, 마르크스가 그걸 탐구해보려는 수고만 했었다면 그런 관점은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고급 재정과 관련한 기술적 문제에 대해 삼촌에게 딱 한 번 의견을 물었을 뿐이다. 그는 필립스를 4번이나 찾아갔지만, 방문의 목적은 집안 재산과 관련한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다른 전문가는 앵겔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같이 방적공장에 가자는 엥겔스의 초청을 거절했다. 우리가 아는 한, 마르크스는 일생을 통틀어 제분소, 공장, 광산이나 다른 작업장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런 경험을 했던 동료 혁명가, 즉 정치의식을 갖게 된 노동자들을 향한 마르크스의 적개심이다. 1845년에 런던을 잠깐 방문했을 때 그런 사람들을 처음 만난 그는 독일인 노동자 교육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 이 목격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묵시론적 비전에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마르크스의 학술적 전문용어들을 사용할 줄 몰랐다. 마르크스는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혁명의 병사들,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늘 자신과 비슷한 중산층 지식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했다.
마르크스는 영국 자본가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사례를 많이 발견했지만, 말 그대로 무임금으로 일하는 사례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노동자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도 그의 집안에. 마르크스가 가족들을 거느리고 공식적인 일요 산책에 나설 때, 소풍 바구니와 다른 용품들을 들고서 맨 뒤에서 따라가는 땅딸막한 여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가족들이 렌첸"이라고 부른 헬렌 데무스였다. 그녀는 숙식을 제공받았지만 임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렌첸은 189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마르크스 집안에 남았다.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는 그녀를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대단히 금욕적인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했다. 요리와 설거지뿐 아니라, 아내인 예니가 영 재주가 없던 생활비 관리까지 도맡았다. 마르크스는 그녀에게 동전 한 닢도 주지 않았다. 렌첸은 마르크스가 잘 알고 지냈던 유일한 노동계급 인물이었고, 그가 실제로 접촉했던 단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였다.
3장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1828~1910)
하느님의 큰형
레프 톨스토이는 우리가 검토하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뻔뻔함 앞에서는 경외심이 생겨나고, 이따금은 두려움까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의 지성을 원천 삼아, 내면에서 분출하는 영적인 힘으로 사회를 도덕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적었듯,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25살 때 쓴 일기는 그가 특별한 권능과 뛰어난 도덕적 숙명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남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늘 거리감을 느꼈다.
기이하게도 그는 자신이 도덕적 재판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느꼈다. 소설가가 됐을 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됐을 때, 그는 이런 신과 같은 권능을 아주 수월하게 행사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극도로 성욕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여자를 가져야만 한다. 육욕은 내게 단 한순간도 평화를 주지 않는다."(1853년 5월 4일), 지독한 색욕이 육체적 질병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1856년 6월 6일)
말년에 그는 그의 전기를 쓴 아일머 모드에게 자신의 성욕이 너무 강해서 81살이 될 때까지 섹스 없이는 살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젊었을 때 여자 앞에서 무척이나 숫기가 없던 그는 성욕을 풀기 위해 유곽에 의지했는데, 그의 메스꺼움의 대상이었던 유곽은 으레 생기는 결과를 그에게 안겨줬다. 1847년 3월에 씌어진 초창기 일기에는 그가 관습적인 출처에서 얻은 임질"을 치료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는 1852년에 형 니콜라이에게 보낸 편지에 또 다시 성병에 걸렸다고 적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집시와 코사크, 원주민 여성 등 다양한 매춘부들의 단골이 됐다. 가능한 경우에는 러시아 소작농 여자들도 상대했다. 그의 일기의 분위기는 자기혐오와 요부에 대한 증오가 변함 없이 뒤섞여 있다. 톨스토이는 매춘부를 찾아다니고 소작농 여성들을 유혹하는 것이 못된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죄악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여자들은 더욱 강하게 비난하곤 했다. 그가 보기에 모든 여자는 아담을 꼬여 선악과를 먹게 한 요부 이브와 같은 존재였다.
톨스토이는 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렇듯이, 톨스토이에게도 자신을 노동자"와 동일시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간헐적으로 불끈불끈 솟아나던 그런 필요성은 1884년 1월 진지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는 작위를 버렸다(그러면서도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평민 레프 니콜라예비치"로 불러달라고 주장했다. 톨스토이는 농민처럼 입기 시작했다. 계급적 복장 도착(倒錯)은 드라마와 의상을 향한 톨스토이의 애호에 적합했다. 그의 부츠, 작업복, 수염, 모자는 새로운 세계적 예언자 톨스토이의 유니폼이 됐다. 부지런히 일을 하고난 톨스토이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노동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영혼이 꽃을 피운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글 쓰기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진정한 재주는 무슨 일이건 오래 붙들고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움에 맞서는 인내심, 끈기, 지구력이 부족했다. 톨스토이가 자기 농지에 펼쳐놓은 혼란 상태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입혔다.
톨스토이의 사례는 지식인이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추상적인 관념을 좇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역사가들은 톨스토이의 사례를 조만간 러시아 전체를 집어삼킬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소규모의 개인적 차원에서 보여준 서막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1917년,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의 결과로, 그리고 그가 예상했다면 몸서리를 쳤을 법한 방식으로 마침내 변혁이 일어났다. 그 덕에 사회의 개혁에 대해 썼던 그의 저작 모두는 난센스가 됐다. 그가 사랑했던 신성 러시아는 파괴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히. 그 결과로 도래한 지상천국의 주요 희생자들이 그가 사랑했던 소작농이었다는 것은 지긋지긋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2,000만 명의 소작농이 관념을 위해 차려진 희생의 제단에 끌려가 대량학살됐다.
5장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
시시한 논쟁
역사상 그 어떤 지식인도 3대 러셀 백작인 버트런드 러셀만큼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게 조언을 하지는 못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된 해에 태어난 그는 워터게이트 직전에 사망했다.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스티븐 크레인보다 생일이 몇 달 늦고, 캘빈 쿨리지와 맥스 비어봄보다 생일이 몇 주 빠르다. 그런데도 그는 1968년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스토파트와
핀터의 작품을 즐길 정도로 장수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그는 놀랄 정도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언과 훈계, 고발과 경고를 꾸준히 제기했다. 러셀이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충고를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게 즉각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가 그토록 많은 글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글을 쓰는 것이 수월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러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폭넓게 경험했거나, 대중의 관점과 감정에 큰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아니었다. 러셀은 인간의 지성을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동시에 지성의 힘을 확신했다. 추상적 지성에 대한 애정과 구체적인 운동에 대한 의혹은 러셀을 수학자로 만든 할머니의 청교도적 가르침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재미있는 일은 러셀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현실적 무지의 위험한 조합을 곧잘 간파-그리고 개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러셀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모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보통사람에게서 발견했을 때는 개탄해마지 않던 불합리한 감정이 행사하는 영향력에 자신도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환 대부분은 온건한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남녀노소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따른다면, 직관적인 논쟁 대신 논리적인 논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극단적인 방식에 다져드는 대신 온건한 해결책을 실행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인간관계는 조화로워질 것이며 인류의 생활 여건은 꾸준히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학자 러셀의 관점이었다.
독선적인 진보주의와 특권층의 양쪽 세계에서 최선의 것만을 뽑아내는 능력은 많은 지도적 지식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런데 이런 능력 면에서는 어느 누구도 버트런드 러셀을 능가하지 못했다. 러셀은 가문과 명성, 인맥과 작위가 그에게 안겨주는 혜택을 노골적으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런 혜택이 주어질 때는 결코 거절하지 않았다. 러셀은 사소한 특혜들도 즐겼다. 쇤먼은 공공도서관이 러셀에게 별도의 스릴러 쿼터를 배정하도록 일을 처리했다. 당대의 다른 케임브리지 지식인들이 많이 그랬듯, 러셀은 탐정소설을 엄청나게 탐독했다. 종전 직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 유명한 스카치 증류소가 "러셀 백작"이라는 마크가 찍힌 위스키 상자를 매달 그에게 보냈을 때에도 러셀은 항의하지 않았다. 논리 문제를 보자면, 그 역시도 필요할 경우에만 들먹거려졌다.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러셀은 다른 많은 문인과 더불어 항의서한에 서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 서한을 『타임스』에 싣는 일을 맡았다. 관습에 따라 서명들을 알파벳 순서로 늘어놓고 나니, 편지의 제목은 킹즐리 에이미스 씨와 그 일동이 보내는 편지"가 됐다. 나는 제목이 메리트 훈장 수상자 러셀 백작과 그 일동이 보내는 편지"가 되면 공산권에 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고, 『타임스』의 독자투고란 담당자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렇게 편지가 실렸다. 그런데 이 조그만 속임수를 발견한 러셀은 성을 냈다. 그는 항의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마침내 나에게까지 다다랐다. 러셀은 그 편지를 기획한 사람이 자기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내가 고의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고, 편지가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자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말했다. 논리적으로는 시시한 일이야!" 러셀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쾅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5장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
행동하지 않는 지성
장 폴 사르트르는 버트런드 러셀처럼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고자 했던 전문 철학자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접근방식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러셀은 철학을 대중은 참여할 수 없는 성직자들의 과학으로 봤다. 러셀처럼 세속적인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지혜의 극히 일부만을 추출해서 신문기사나 대중서적, 방송 등을 통해 아주 희석된 형태로만 유포시킬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카페에서 철학을 토론하는 나라에서 연구한 사르트르는 희곡과 소설을 통해 대중을 자신의 사상체계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르트르의 시도는 최소한 한동안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그 어떤 철학자도 세계 전역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정신과 태도에 그처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인기를 얻은 철학이었다. 사르트르의 희곡들은 히트를 쳤다. 그의 저서들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중 일부는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는 삶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불명료한 형태이긴 했지만, 세속적인 교회의 지배자였다. 그런데 그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됐는가?
대부분의 지도적인 지식인들처럼, 사르트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는 버릇없는 외동아들의 전형적 사례였다. 사르트르는 당대에 가능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혐오했다. 그는 굉장히 계급 의식적인 사람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반항아, 특히 이유 없는 반항아였다. 그는 어떤 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를 출세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프랑스에게 전쟁은 재앙이었다. 니장 같은 친구들에게 전쟁은 죽음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은 고난과 치욕을 안겨줬다. 그렇지만 사르트르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전쟁이었다. 그는 육군 포병부대 사령부의 기상관측 분대로 징집됐다. 동료들은 그를 비웃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사르트르는 절대로 목욕을 하지 않는 것으로, 구역질날 정도로 더러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독일군의 침공으로 전선이 무너지면서 포로가 됐을 때(1940년 6월 21일)에도 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 1941년 3월에 부분 실명자"로 분류되어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소설과 희곡을 계속해서 썼다.
사르트르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위스키, 재즈, 여자들과 카바레를 사랑했다. 자크 오디베르티는 그를 도서관, 극장, 영화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차하면서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는 트럭"으로 묘사했다. 사르트르는 밤이 되면 놀이에 열중했고, 밤이 깊어지면 보통 술에 취해 있었는데,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 돼 있는 경우도 잦았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서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는 카르티에의 왕, 성난 사람들의 왕, 업게 종사자들의 왕, 지하실의 쥐새끼들의 왕이었다. 사르트르가 왕이었다면, 여왕은 누구였을까? 사르트르는 1960년대를 풍미한 남성 우월 주의자"의 원형이었다. 어른이 된 그의 삶을 어린 시절의 천국"으로 재창조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의 사생활은 다양한 섹스를 즐기는 데 바쳐졌고, 그의 시간은 하렘의 여인들이 공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휴가를 보냈다. 아를레트와 프랑스 남부에 공동으로 소유한 별장에서 3주, 완다와 이탈리아에서 2주, 엘렌과 그리스 섬에서 몇 주, 그리고 보통은 로마에서 드 보부아르와 한 달. 파리에서는 여자들의 아파트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다.
러셀처럼 사르트르는 대중적으로 표방한 관점에 일관성을 부여하거나 체계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다시 한 번 러셀처럼 그가 대변한 것은 좌파와 젊은이의 진영에 속하려는 모호한 욕망에 불과했다. 한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인생 철학과 동일시되었던 사르트르의 지적인 몰락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불만족스럽더라도 지적인 지도자를 요구하는 교양 있는 대중은 항상 넘쳐났다. 루소는 극악무도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사망 이후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지적인 도시 파리는 또 다른 대스타"사르트르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다. 대부분이 젊은이인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몽파르나스묘지까지 사르트르의 관을 따라갔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에게 존경을 표하러 온 것일까? 거기 모인 군중은 어떤 신념, 인류에 대한 어떤 빛나는 진실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6장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1905~1984)
뻔뻔한 거짓말
빅터 골란츠가 천년왕국이라는 목표를 위해 진실을 뜯어고친 지식인이었다면, 릴리언 헬먼은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뿜어낸 지식인인 듯 보인다. 골란츠처럼 헬먼은 스탈린주의의 공포를 서방세계에 감추려는 거창한 지적 음모의 일원이었다. 골란츠와는 달리 헬먼은 자신의 잘못과 거짓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아주 마지못해서 무성의한 태도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녀는 골란츠보다 훨씬악독하고 뻔뻔한 거짓말로 출세의 길을 밝으려들었다. 여기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릴리언 헬먼을 괴롭히는 것인가? 그녀는 필수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불가피하게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가 중첩되는 삶을 살아가는 상상력 풍부한 예술가 아닌가? 또 다른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경우처럼, 픽션 창작자에게 절대적인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진실을 경시하는 성향이 그녀의 삶과 작품의 한복판을 차지하게 된 것은 헬먼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헬먼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여류 극작가로, 세계 전역의 교양 있는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둘째, 그녀는 말년 수십 년 동안, 부분적으로는 기만행각의 결과로 미국 지식인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위세와 권력을 성취했다. 헬먼의 경우는 정말로 중요하고 보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지식인 계급은 그들이 숭배하는 인물에게 어느 정도의 진실을 기대하고 요구하는가?
대부분의 지식인처럼, 헬먼은 다른 작가들과 악의에 찬 다툼을 벌였다. 이런 다툼들은 그녀의 정치적 입장에 독이 되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헬먼은 좌파의 성공한 여걸이었고 축복 받은 유명인사였다. 1940년대 후반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그녀의 삶은 이후로는 순교의 시대를 이겨낸 전설적인 급진주의자로 찬양 받았다. 한편 반미활동심사위원회는 영화계를 샅샅이 조사했다. 정치활동에 대해 묻는 위원회의 심문에 답변을 거부한 소위 할리우드 10인"은 국회모욕죄로 소환됐다. 헬먼도 1948년에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4년 후인 1952년 2월 21일에는 위원회에 출두하라는 무시무시한 소환장을 받았다. 그녀가 패배 직전에 승리를 낚아챈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녀는 홍보에는 늘 재주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브레히트나 사르트르 같은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공유한 장기 중 하나였다. 우리가 앞서 봤듯, 브레히트는 위원회 출두를 그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든 성공적인 선전활동으로 탈바꿈시켰다. 헬먼의 성공은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이 성공은 그녀가 급진파의 순교자-여왕이라는 뒤이은 명성을 쌓는 데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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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먼은 1984년 7월 3일에 사망했다. 이때쯤 그녀의 명성의 토대가 됐던 판타지 세계는 그녀의 귀에 들릴 정도로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급진적 좌파의 공격적 여왕이었던 헬먼은 모든 면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 영웅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폭로와 발각, 너무나 많은 거짓말의 적발에도 불구하고, 릴리언 헬먼의 신화는 평화롭게 제갈길을 가고 있다. 그녀가 사망하고 18개월 뒤인 1986년 1월, 위인전이라 할 연극 <릴리언>이 뉴욕에서 막을 올려 성황을 이뤘다. 198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이성의 여신에게 바치는 촛불은 여전히 불타고 있고, 세속적인 미사는 계속 울려 퍼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영웅 스탈린처럼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좋은 사람으로 묻히게 될까, 아니면 그 많은 날조된 이야기들과 함께 투쟁하는 진보적 사상의 심벌로 남게 될까? 그것은 두고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난 200년 간의 경험은 세상을 떠난 이 여성에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삶과 거짓이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