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한국 서정시의 거장 도종환 시인의 신작 『고요로 가야겠다』는 오랜 침묵 끝에 도달한 내면의 결실이다. 삶의 고통과 상처를 통과해 얻은 언어는 한층 더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소음 속에서 자신만의 고요를 찾아간다. “외피가 돌처럼 딱딱한 벚나무에서 / 새로 솟아나는 연한 가지”(「부드러운 시간」)처럼, 그의 시는 고통을 뚫고 피어난 온화한 결심의 언어다.
곽재구 시인은 추천사에서 “도종환의 시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고 썼다. 그는 “난해한 정치판에 들어가 판을 향기롭게 만들었던 시인이 이제 그 향기를 시로 돌려주고 있다”며, 시대와 인간을 함께 품어온 그의 귀환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나희덕 시인 역시 “이 시집의 화자들은 폭풍의 시절을 지나 고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며, 그의 시가 “소음과 고요, 분노와 사랑, 격정과 지혜 사이에서 인간의 진실을 지켜온 언어”라고 평했다. 두 시인의 말처럼 『고요로 가야겠다』는 떠남이 아니라 귀환의 시집이며, 언어로 다듬은 마음의 집이다.
시집은 「이월」, 「고요」, 「달팽이」, 「사랑해요」, 「끝」 등 여덟 개의 사유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시는 명상적 공간이 되어 독자에게 멈춤과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 고요로 가야겠다”(「고요」)는 문장은 시인이 도달한 윤리적 결심이며, 도피가 아닌 회복의 선언이다. 고요는 침묵이 아니라 이해이고, 세상 속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고요로 가야 합니다. 거기 시가 있습니다.”
-도종환
■ 작가정보
도종환
청주에서 태어났다.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 『흔들리며 피는 꽃』『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사월 바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목차
추천의 말_곽재구(시인) ㆍ 나희덕(시인)
이월
February
이월
소원
곡우 무렵
도토리
연두
수선화
벚꽃
고요
Stillness
고요
과도한 소망
들꽃
꽃들 2
꽃들 3
봄밤
봄날 아침
파랑 이는 날
부드러운 시간
그대가 내게 온다면
낙화
현자
운명
철쭉꽃
하직
달팽이
Snail
달팽이
바다
거리에서
산양
모이
비와 하프
너는 꽃이다
수련
애벌레
파도
여우비
그리운 날
사막
산
해변
피
저녁
목동의 별
젖은 낙관
슬픔을 문지르다
To rub away sorrow
슬픔을 문지르다
연화蓮花
장일순
깊은 가을
늦가을
설선당說禪堂
양
밤이 온다
어린 은행나무
고음
저녁
사랑해요
I love you
사랑해요
사과밭 주인
두 손
다리 하나
당신의 동쪽
The East of you
당신의 동쪽
굴참나무
두보초당
사과 한 알
늦가을비
귀뚜라미를 조상함
저녁연기
운동화
군무
겨울 벚나무
겨울 오후
아기 국화
저녁
새벽 세 시
바람이 분다
산다음山茶吟
어떤 꽃
페어 스케이팅
담양 장아찌
상봉
손
Hand
손
노래
저녁 바다
불
쉼표
툇마루
끝
End
끝
전화기를 끈다
계엄이 있던 겨울
작품 해설_ ‘사이’로 향하는 필생의 시ㆍ노지영(문학평론가)
고요로 가야겠다
소원
올해도 소한 대한 지나며 폭설 퍼부을 것이다
사나홀씩 눈 쏟아져 산짐승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세상으로 낸 길도 다 지워지는 날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가고 싶다
올해도 청명 곡우 지나면 꽃사태 나고
남쪽에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지천으로 필 것이다
꽃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눌러 앉히곤 꽃출석부 들고 나가
뒤뜰에 오종종 핀 봄맞이꽃 주름꽃 꽃다지
출석 부르며 내 집 마당 먼저 꽃교실로 가꾸고 싶다
올해도 폭우 쏟아져 도시가 무릎까지 젖고
천둥과 번개의 번쩍이는 채찍이
인간의 마음과 캄캄해진 하늘을 쩍쩍 갈라놓곤 할 것이다
그때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
올해도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 골목골목 넘칠 것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외면하지 않아야 할 목소리 있을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 들을 줄 아는 귀와
균형과 중정(中正)의 지혜를 갖게 해달라 간구하고 싶다
올해도 가을 오면 굴참나무 잎은 지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장의 낙엽처럼 우주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순간순간이 은총이었던 날들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마른 얼굴로 하늘 올려다보고 싶다
과도한 소망
도시로 나가 일하면서도
아침이면 잠시 고요에 잠긴 뒤 일터로 나가
오전에 일하고 이영소
좋은 사람 만나고
오후 시간에 짬을 내
짧게라도 글 읽거나 음악 듣고
밀린 일 마친 뒤
천천히 돌아오는 저녁을 꿈꾸었다
돌아와 찬물에 손 씻으며
지치고 빛바랜 마음 헹구어 널고
밤이면 강변을 산책하게 되길 바랐다
휴일 날 창에 매달려 닝닝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나뒹구는
나나니벌 한 마리
뜨락으로 내보내 살려주고
햇감자 얇게 썰어
된장 풀어 국 끓이며 생각해보니
하루에 그중 한 가지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과도한 소망이었다 내 바람은
가만가만 말 걸어오는 나뭇잎과
침묵으로 대화하는 오후
고전음악의 고요한 선율이
물방울처럼 가슴을 적시는 저녁
밑줄 그은 시 몇 줄 공책에 옮겨 적고는
몇 번을 다시 펼쳐보는 밤
명상의 숨결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는
가만히 멈추어 있는 새벽
고요든
강바람이든
느린 시간이든
그중 어느 하나라도 만난 날은
며칠 만에 잠깐이라도 만난 날은
그나마 사는 것 같았다
아수라 한복판에서
저녁
지구가 하루 한 번
반대편 쪽으로 돌아눕는 건
고마운 일이다
양귀비꽃을 가려주어
붉은 꽃잎에게 긴장 풀 시간을 주고
느티나무에게 바람의 손길을 내려보내
바삭바삭 마르는 잎들의 체온을
눅눅하게 낮춰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도
내 안에 끓어오르는 것 때문에 힘들었다
마른 구역질이 났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많이 걸어온 건
다행이었다
바람이 느티나무를 토닥이고 있다가
내게 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느티나무처럼 나도 체온이 조금 내려갔다
먼 곳에서 찾아온 저녁 구름이
내 곁에 한동안 같이 있어주었다
내 안에서 나를 불 지르던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비를 조금 데려온다 하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사랑해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랑해요 라는 말로
맥박이 뜨거워지고
낡아가는 나를 씻어낼
맑은 힘이 생기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랑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있다는 건
낯선 것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세상에서
저녁연기
굴뚝을 빠져나온 연기가
하늘로 오르려 애를 쓰다가
지붕의 비스듬한 선을 타고 밀려 내려옵니다
오후 내내 무겁던 공기가
초저녁 무렵에는 더 차고 무거워져
저녁연기를 내리누릅니다
가등 한쪽 면을 감싸고 맴돌던 연기는
꼬리를 여미어 쥐고 뒷모습을 감춥니다
흉터는 남았지만
상처는 아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끝났다고
다 지나갔다고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었는지
내게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는 상처를 침묵으로 덮고
무게 없는 시간으로도 덮고
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제공받았고
그렇게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니
지난날의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용히 지워지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가벼워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워
나는 향을 다시 피웁니다
향 연기의 꼬리가 끌고 가는 가느다란 침묵을
따라가다 돌아오곤 합니다
그 사이에 산벚나무들은 일찍 잎을 버렸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가득한 앞산 뒷산은
구릿빛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목련잎이 돌아갈 준비를 하는 뜰을 거닐다
낮달이 오랫동안 나뭇가지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목련잎을 지나 회화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구름빛 낮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도 내게 터럭 같은 기대를 지닌 이들에게
지금 이 저녁 구름을 보내주고
늦가을 초저녁의 무거운 빛깔 일부를 잠깐
보여주고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른 나뭇잎 밟는 소리가 유일한 소리인
적막한 시간에
가슴에 남아 있는 게 있다면 이렇게
부서지기를 소망합니다
잘게 잘게 부서져 흩어지기를 바랍니다
허공으로 오르지 못하는 저녁연기가
메마른 육신을 어루만지다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