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몰퍼스

   
김해솔
ǻ
열림원
   
12000
2025�� 09��



■ 책 소개


언어가 실패하고 무너져도
끝내 사랑을 발명하려는 목소리

김해솔 시인의 첫 시집 『아몰퍼스』가 열림원 ‘시-LIM 시인선’의 세 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김해솔 시인은 “자유롭고 대담한 시상” “삶의 진정성에 기반한 언어”라는 평으로 2023년 ≪쿨투라≫ 신인상 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와 「아우또노미아」가 선사하는 사랑의 밀도, 「아몰퍼스」라는 제목이 함의하는 무정형의 감각은 일찍이 기대를 모으며 “습작의 축적과 역량에서 큰 기대를 모으는 시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아몰퍼스』는 제목처럼 비정형의 상태를 전면에 내세운다. 단단히 응고되거나 투명하게 가시화된 세계 대신 파열과 균열, 붕괴와 복제, 오류와 변형을 통해 고정되지 못한 언어와 존재를 드러낸다. 언어의 불안정성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리고 이 시도의 가장 깊은 바탕에는, 타자와 세계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사랑의 의지가 놓여 있다.

■ 저자 김해솔
2023년 ≪쿨투라≫ 신인상 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 『반입자』(2024, 글라프레스)가 있다.

■ 차례
시인의 말

아몰퍼스
이징 모형
루트, 야떼모야
누워 있다
챠우챠우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비가 내린 날은 4월 7일이 아니다
아우또노미아
아우또노미아
에코그라피
아나모사
공중 공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
느낌의 기원
베단타
반입자
아몰퍼스
껍질을 까지 않은 채 달걀을 먹었다면, 지구 정도는 지켜 줘도 괜찮잖아?
모브, 사이코, 100
떠올리면 복잡한 마음이 든다
예언가들
창조적 퇴화
내 대리인의 목
기억한다
초유체
일 칵토 히포포타모
버드
부러진 지구는 개구리 뒷다리를 모른 척했다
너무 강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선인장 하마
토러스 틱택토
튜링 기계
미소 중력
어부는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정확하고 장황하게 펼쳐진 초원
채채로서의 5월 35일
제2법칙
그러자 직선 하나가 그어진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125
초개체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해설
픽스 아몰퍼스 1인용 TRPG | 멜트미러(게임개발자·영상작업자)

 




아몰퍼스


아몰퍼스

도서관을 하나 상상한다. 이 도서관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도서관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믿지 않으면 도서관을 상상할 필요가 없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면. 내가 도서관을 상상하는 대신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을 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상상 속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앉아 있던 도서관에 불 질렀다면. 방화범 되었다면.


그럼 벌 받아야지.


그래서 벌 받았다. 감옥에서.

벌 받으면서, 상상 속 도서관에서 도서관 하나를 다시 상상했다.


시간이 흐르고 감옥에서 석방된 뒤,


나는 도서관에 불을 지른 전과가 있는 사람.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노래하네. 전과자는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으니 상상할 수 없어. 상상할 수 없으니 함께할 수 없어. 나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러나 여전히 상상할 수 있었네. 내 상상 속 도서관에 앉아 책 태우는


아이를 


한 명 상상한다. 이 아이는 내가 상상하는 도서관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믿지 않아도 이 아이는 상상할 수 있지. 상상하지 않아도 함께일 수 있지. 함께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는 걸 내가 이 아이를 만나기도 전에 알았다면. 그래서 내가 너를 낳았다면. 그게 네게 상처가 됐다면,


그럼 벌 받아야지.


그래서 벌 받았다. 네 옆에서.

너를 끌어안으면서. 그 무엇도 상상하지 않으면서.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도서관 속에서.



비가 내린 날은 4월 7일이 아니다

벤치에 앉았다. 길바닥에 앉았다. 좌석 A-11에 앉았다. 휴게실 문을 열었다. 전차 의자에 앉았다. 먹구름 낀 하늘을 봤다. 사람들의 발뒤꿈치와 발목 사이를 봤다.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배우의 귓불을 봤다. 뒤집힌 쓰레기통 뚜껑을 봤다. 흔들리는 손잡이를 보지 못했다. 빗줄기가 정수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뛰기 시작했다. 배우의 머리통이 터지려던 찰나, 상대 배우가 등장했다. 뒤집힌 쓰레기통 뚜껑 위에 찌그러진 종이컵을 올렸다. 미끄럼틀 밑에 라이터처럼 쪼그리고 앉았다. 왼발에 오른발이 걸려 넘어졌다. 졸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모르는 인간의 어깨 위로 머리가 떨어졌다. 빗줄기가 미끄럼틀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잠 깨지 않았다. 발등 위로 굴러떨어진 종이컵을 봤다. 모르는 인간의 어깨가 머리를 내리쳤다. 횡단보도를 응시했다. 모르는 인간의 부축을 받았다.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종이컵을 짓밟았다.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며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산을 폈다. 자판기에 500원을 넣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적색의 아스팔트 바닥을 보았다. 500원을 꺼내 모르는 인간에게 주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고장 난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77번 버스를 탔다. 눈을 감았다. 빗줄기가 눈꺼풀을 내리치고 있었다. 77번 버스를 탔다. 자판기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의자에 앉았다. 꿈에 대해 생각했다. 모르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던 빗방울 중 하나가 동공을 찔렀다. 의자에 앉았다.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꿈속에서 사람을 한 명.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잡았다. 눈을 감았다. 차창에 번지는 빛과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아나모사

북생수섬에 사는 생수어를 구사하는 부족이다. 아프리카에서 18만 년 전에 건너온 직계 후손으로, 현재 북생수섬에서 약 400명에서 500명 정도가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영토인 북생수섬으로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힘들다.


사용법

제품명: 아나모사. 품목명: 인간 샘물. 내용량: 2.5kg~150kg. 출신: 북생수섬. 포장 재질: 용기-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폴리에틸렌. 보관 및 취급 방법: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용 시 주의 사항: 가열 또는 냉동 등의 급격한 온도 변화 시 기분 기복이 생길 수 있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제품에는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본 제품은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시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에 의해 교환 또는 환불받을 수 있습니다. 유통기한: 용기 상단 표기 제조일로부터 사망일


사용법에는 없는 주의 사항


만나면 좋은 아나모사인들은

만날 땐 좋지만

헤어진 뒤

좋았던 만큼 아프게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니 아나모사인들을

너무 자주 만나거나

좋아하진 마세요

그들은 당신을 떠나

그 존재가 생성된 곳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물론


이 주의 사항엔 거짓이 섞여 있다



베단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낮에는. 밤에는 누군가 내 목을 꿰뚫기 위해 창살 사이로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다. 밤에는 나를 보러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사냥당한

사자다


그러나 내가 정말 사자라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리 없지. 한다고 해도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아니면 너도 사자든가. 하지만 너는 너무 사람이고 내가 그걸 알고 그걸 아는 나는


너를 흉내 내며


마치 나에게도 무기라는 게 있고, 그걸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듯 군다. 가령


투명하지만


깨끗하지는 않은


물이 바닥에 고여 있다면

나는 물을

마시는 일을 좋아한다 뜯어서 당기듯이

먹는 일을 좋아한다


먹는 것


그것은 내게 먹히는 대상을 내가 관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없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일 같은 거. 없다는 거. 알지만 나는


우물거린다


우물우물. 새까만. 빛 하나 없이 깜깜한 우물 안을 들여다보며. 무섭다고 생각한다. 무섭다고, 중얼거리다 더는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씹어 먹으면서.



떠올리면 복잡한 마음이 든다


복잡한 마음이 드는 일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는 나는

떠올리는 일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다


떠올리는 일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떠올린다

나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일만 떠올리고 싶다


떠오르지 않는 일은 내가 답을 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일


내가 답을 내도 될 것만 같은 일

그런 일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복잡한 마음을 느끼는 일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는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떠올리는 일을 반복한다


나는 떠올리고 있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떠올리고 있다


복잡한 마음은 간단하게 정의할 때 안심된다


나는 간단한 마음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간단한 마음에 안도하고 있다


라고 적으면 간단한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원하지 않는 마음인 것만 같은 나는


떠올리고 있다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한다


무지개는 물로 이루어진 문이라는 설명문을. 종일 대답하고 다녔으나 그 누구도 내게 질문한 적 없음을. 유효기간이 측정되는 사람과의 만남을. 갑자기 높아진 하늘과 하늘보다 먼저 시야를 지배한 구름.


어딜 가나 공장. 세계의 공장.


문을 닫았을 때 점프하는 것처럼 보였던 물방울을.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비가 내렸고 자전거를 처음 탔던 날을. 모자 쓴 남자가 은색의 가늘고 날카로운 끈으로 또 다른 남자의 목을 따는 장면을 목격하는 꿈을. 그때 내 표정.


테라스의 난간과 두 달째 밀린 월세를. 자취방 창문에 설치된 구멍 난 모기장을.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였던 친구의 옆모습을. 해마는,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


번호를 착각하고 잘못 탄 버스를. 뭔가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덜컹거리는 건 버스인데 왜 내가 멀미에 시달려야 하는지. 이럴 땐 어떤 자세를 취해야 덜 토할 것 같지?


발신 메시지함에 보관된 굿나잇 문자.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