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엄성우
ǻ
추수밭(청림출판)
   
19000
2025�� 06��



■ 책 소개


“괴롭힘당하는 아이를 보았을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드는가?”
흐트러져 있던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바른 마음’ 수업

한 아이가 길거리에서 어떤 무리에 둘러싸여 괴롭힘당하고 있다. 당신이 이 장면을 보고도 못 본 듯 지나쳤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바빠서 도와줄 겨를이 없어’, ‘괴롭히는 아이들 덩치가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괜히 애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가는 나만 다칠 거야’, ‘나는 저 아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등등…. 이같은 복잡한 손익계산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사이, 아이를 구할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고, 그렇게 ‘윤리’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서 한참을 밀려나고야 만다.

이 책은 단순히 ‘아이를 구하는 법’에 관한 책이 아니다. 또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당위를 뻔하게 반복하는 책도 아니다.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결단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민과 갈등 가운데 바로 세워져야 할 마음가짐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고, 숱한 삶의 갈피 속에서도 어떻게든 ‘선(善)’을 향한 갈래와 순서를 다잡기 위한 책이다. 

■ 저자 엄성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철학 학사와 석사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받고 듀크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국립보건원NIH 생명윤리학과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윤리학과 응용윤리(특히 생명윤리)이며 교내외에서 다양한 연구 및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 국제생명윤리협회에서 주관하는 제15회 세계생명윤리학술대회에서 〈Vices in Autonomous Paternalism(자율적 간섭주의의 부덕함)〉이 아시아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었고, 2022년 한국분석철학회에서 〈What is a Relational Virtue?(관계적 미덕이란 무엇인가)〉가 모하 분석철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주요 논문으로 〈Trustfulness as a Risky Virtue(위험한 덕목으로서의 신뢰심)〉(2024), 〈Honesty: Respect for the Right Not to be Deceived(정직: 속지 않을 권리에 대한 존중)〉(2023), 〈Gratitude for Being(존재에 대한 감사)〉(2020), 〈Modesty as an Executive Virtue(실행적 덕목으로서의 겸손)〉(2019) 등이 있다. 그동안 논문을 통해 선보여왔던 윤리학의 주제를 종합하여 쉽게 풀어낸 이 책은 동종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중교양서이자 저자의 첫 번째 단독 저서다.

■ 차례
들어가며: 나다움을 잃지 않고 어른답게 산다는 것

1장 겸손: 자신 있게 고개 숙일 수 있는 마음
겸손이란 무엇일까? | 왜 겸손해야 할까? | 겸손은 예의나 친절함과 어떻게 다를까? |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잘 알까? |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를 어떻게 의식할까? | 감사와 겸손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 겸손과 자기 비하는 어떻게 다를까? | 겸손과 오만은 어떤 관계일까? | 겸손하면서도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까? | 탁월한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만 겸손할 수 있을까?
+겸손의 덕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2장 감사: 나를 위한 좋은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
감사란 무엇일까? | 감사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 감사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 감사의 적절한 기준은 무엇일까? | 감사는 의무가 될 수 있을까? | ‘덕스러운 감사’는 어떤 것일까? | ‘나쁜 감사’도 있을까? | 존재에 대한 감사도 가능할까? | 감사와 비교할 만한 태도는 무엇일까?
+감사의 덕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3장 효: 부모다움에 보답하는 자식다운 마음
왜 지금 효를 이야기할까? | 효란 무엇일까? | 효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 효의 윤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 관계적 덕목으로서의 효란 무엇일까? | 현대의 효는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 인생의 시기에 따라 효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 부모답지 않은 부모에게도 효도해야 할까? | 부모에게 순종해야만 효도일까?
+효의 덕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4장 신뢰: 너에게 나를 기꺼이 내맡기는 마음
신뢰란 무엇일까? | 신뢰와 유사한 개념은 무엇일까? | 신뢰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 스스로의 의지로 신뢰할 수 있을까? | 자신에 대한 신뢰는 어떤 것일까? | 어떤 사람이 신뢰할 만할까? | 지혜롭게 신뢰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 못 믿는 마음과 잘 믿는 마음은 왜 나쁠까?
+신뢰성과 신뢰심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5장 정직: 속지 않을 권리를 지켜주는 마음
정직이란 무엇일까? | 왜 정직해야 할까? | 정직과 솔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정직한 것일까? | 일부러 속이는 행위는 항상 부정직할까? | 정직한 사람도 헛소리를 할까? | 정직한 사람은 약속도 잘 지킬까? |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 인공지능은 정직할까?
+정직의 덕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참고문헌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겸손: 자신 있게 고개 숙일 수 있는 마음

겸손이란 무엇일까?

"역시 내가 제일 겸손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말은 오히려 오만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넙죽 엎드려서 "저는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로 하늘 같은 당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낮추는 것이 겸손의 척도라고는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오히려 '자기 비하'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겸손은 사회에서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한 소통의 기술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겸손의 진짜 의미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겸손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잘난 척하고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손이란 무엇이고 왜 겸손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관찰하며 철학적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이 평상시에 어떤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하는지, 겸손이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 쓰는지 먼저 생각해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을 때도 쉽게 우쭐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깔보지 않지요. "남들보다 내가 훨씬 나은 사람이다", "저 사람들은 나보다 못하다"와 같은 태도를 갖지 않고 남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는 일도 웬만하면 삼가지요. 또 자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자신이 가진 탁월함에 대해 "난 역시 최고야!",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할까?"라며 자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상을 받을 때에도 자신의 수고와 업적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이나 운에 공을 돌림으로써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에게 우리는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한 사람의 다양한 속성을 아우르는 핵심을 찾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맞게 가늠한다

'겸손'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특징을 하나씩 살피다 보면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겠지요. 우선 겸손은 우리가 신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기에 성립하는 덕목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신과 다르고, 그런 불완전성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기에 다른 동물과 구분되지요. 우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 우월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였다면 겸손이 덕목으로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반대로 개나 고양이처럼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고 평가할 수 없다면 겸손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면에서 불완전하고 그 사실을 때때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필요도, 겸손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고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이 '겸손의 조건'을 만족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일까요? 겸손의 핵심은 '다른 이와의 관계에 비추어본 자신의 가치를 알맞게 가늠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에 대한 태도만 겸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외모나 능력에 대한 평가는 겸손과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알맞게 가늠하는 태도란 '나의 팔 길이는 몇 센티미터다'와 같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나는 예쁘다', '나는 똑똑하다'와 같이 좋고 나쁨을 표현하는 가치 평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가치를 알맞게 가늠하는 태도를 지녀야 겸손해질 수 있는데, 여기서 '알맞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알맞게 가늠하는 데에는 자신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폭넓은 지식, 탁월한 운동 능력, 뛰어난 외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월하다고 해도 그 때문에 '나의 가치가 남들의 가치보다 높아', '나 정도면 남을 깔봐도 돼', '나는 특별하니까 사람들이 더 우러러봐야 해' 등의 자세를 갖지 않는 것이 알맞게 가늠하는 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 나를 위한 좋은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

감사란 무엇일까?

우선 감사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감사란 한마디로 '날 위한 좋은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입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감사의 본질과 두 가지 주요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주체'를 찾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주체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이 '그냥' 벌어졌음을 납득하기 어려워하고 '누군가'가 한 일이라고 받아들이려 하지요. 그래서 예전부터 번개가 치면 신이 노해서 벌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사냥에 성공하면 그걸 가능하게 해준 주체인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는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Day)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조상님께 감사하는 추석이 있지요. 이처럼 우리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의 '탓'을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의 '덕'이라고 여기며,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어떤 주체가 행하는 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감사의 두 종류


감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격적 감사(personal gratitude), 즉 '누군가'에 대한 감사와 비인격적 감사(impersonal gratitude), 즉 어떤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인격적 감사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주체에 대한 적절한 반응입니다. 흔한 예로 이사를 도와준 친구에게 감사하거나 힘들 때 위로해준 가족에게 감사하는 경우지요. 그에 반해 비인격적 감사는 특정한 주체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어떤 바람직한 '일'이 일어났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마음에 가깝지요. 대표적으로 오늘 날씨가 맑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나 내가 오늘도 잘 곳이 있다는 데 대한 감사 등이 있습니다.


엄마가 배고픈 나를 위해 저녁밥을 짓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나에 대한 좋은 마음으로 애써 밥을 차려주는 주체인 어머니를 향해 갖는 태도는 인격적 감사이고, 내가 먹을 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는 비인격적 감사입니다. 살다 보면 이 둘을 잘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호의로 짐을 들어줬는데 "고맙습니다"라며 인격적 감사를 표하는 대신, "아, 다행이다. 오늘은 짐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운이 참 좋네"라고 말만 한 뒤 가버리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적절한 태도가 아닐 테니까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볼까요?


1. 인격적 감사

앞서 인격적 감사는 자신을 향한 호의로 은혜를 베푼 주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의란 "도움을 주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방을 위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게 만드는 무엇"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신이 미래에 받게 될 대가나 좋은 평판 때문에 남을 도울 경우 진정한 의미의 호의에서 우러나온 행위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적절한 대상이 되려면 스스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돌볼 수 있는 존재,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체'여야 할 것입니다.


노트북이나 나무는 다른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트북아, 내 글을 저장해줘서 고마워" 또는 "나무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면,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적절한 감사가 아니고 의인화에 해당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철학자 피터 스트로슨은 '반응적 태도(reactive attitude)'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같은 인격체들이 서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태도를 포착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감사나 분노가 있지요. 즉 우리와 같은 인격체가 좋은 일을 해주면 감사하고 나쁜 일을 행하면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지요. 그렇게 봤을 때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상대를 아무런 의지도 마음도 없는 기계의 톱니바퀴 정도가 아니라, 나를 향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인격체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감사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지요. 좁은 의미에서 감사는 인격적 감사를 말합니다.


2. 비인격적 감사

우리는 일상에서 비인격적 감사에 해당하는 표현 역시 자주 사용합니다. 비인격적 감사는 바람직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감사라기보다는 어떤 사태에 대해 '다행이다', '기쁘다', '행운이다' 등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소풍 가는 날 아침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오늘 날씨가 좋음에 감사해!"라는 말은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매사에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요. 이 말을 들으면 예전에 딸아이가 보던 《생글이와 투덜이》라는 동화책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투덜이는 부자이고 친구도 많은데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생글이는 가난하고 친구도 별로 없지만, 항상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지요. 물이 반쯤 차 있는 컵을 보고 투덜이는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할 테고, 생글이는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글이처럼 주어진 것에 집중하고 만족하며 기뻐하는 태도가 감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는 현실의 상황을 어떤 가능한 상황과 비교하는지, 그 마음의 습관에 달려 있습니다. 반쯤 찬 물컵과 가득 찬 물컵을 비교하면 비어 있는 반쪽에 집중하며 아쉬워하게 되고, 텅 빈 컵과 비교하면 반이라도 차 있는 쪽에 집중하여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자주 떠올리고 현실과 비교하는 지혜를 중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를 일컫는 말로 'appreciat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appreciate'에는 '감사하다', '다행스럽게 여기다'라는 뜻도 있지만 '감상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진가를 잘 헤아리고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내가 지금 소풍을 가려고 하는데 날이 이렇게 맑은 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하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고마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지덕지(感之德之)하다'라는 표현은 비인격적 감사에 들어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격적 감사와 비인격적 감사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지만 가까운 관계입니다. 한 가지 예로 자연에 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면 자연에 대한 감사도 인격적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강아지 혹은 인공지능 로봇에 대해서도 나를 향한 마음이 있다고 믿으면 비인격적 감사가 아니라 인격적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넓게 보면 인격적 신이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신에 대한 감사가 가능한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 신의 호의로 나에게 오는 것이니까 인격적 감사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효: 부모다움에 보답하는 자식다운 마음

왜 지금 효를 이야기할까?

효에 대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모색할 필요성

현대 사회에는 효를 고리타분한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유교적 덕목으로서의 효가 전통적인 가르침 그대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다움에 대해 보답하는 자식다움'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효마저도 거부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효라는 덕목을 현대에 맞는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효의 주체가 되는 자식들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효가 단순히 전통적 덕목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고 실천 가능한 가치를 지닌 덕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에 효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효란 무엇일까?

우선 '효란 무엇일까?'라는 질문부터 탐구해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무엇인지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효도란 어디까지나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효도를 논할 때 고려해야 할 부모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부모란 무엇일까?

-실질적 부모

우리가 '부모'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구체적으로 자녀와 관계를 맺는다 할 수 있는 '실질적 부모'를 일컬을 것입니다. 실질적 부모는 아이에 대한 돌봄과 발달을 목표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아이와 교류하며, 건강, 안전, 신체적·정서적·지적·도덕적 발달 등에 책임을 지는 존재를 말합니다. 생물학적, 법적 부모가 아니더라도 양부모, 조부모, 보육원 교사 등이 이러한 역할을 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태어났을 때 길러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태어나서 적어도 3년 동안은 누군가의 헌신적인 돌봄이 없으면 살아남기조차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를 먹이고, 재우고, 보살펴주는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부모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심신의 보살핌을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며, 무엇보다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잘해내는 부모를 '부모다운 부모'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부모다움'이란 바로 그런 훌륭한 부모가 갖는 덕목을 말합니다.


효는 부모다움에 보답하는 자식다움이다

효란 '부모다운 부모에 대해 자식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자식다움'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움'이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품성 상태, 즉 '○○로서의 덕 또는 탁월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효자'(또는 '효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부모님을 자식답게 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효를 아는 사람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선 부모님께 사랑과 감사,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물질적·금전적으로 부모님을 잘 모시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한 점이겠지요. 또한 부모님께 자주 연락드리고 소통하는 것도 효자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효심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것 역시 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효의 덕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가정에서의 효 교육

가장 우선적이고 자연스러운 효의 교육 장소는 가정입니다. 가족은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속하게 되는 공동체이지요. 가정에서는 효의 대상인 부모님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면서 자라게 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효의 의미를 배우고 실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가정 구조와 사회적 환경에서는 효를 가정에서만 온전히 가르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대가족이 일반적이어서 부모님뿐만 아니라 삼촌이나 조부모 같은 가족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부모와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직접 효에 대해 가르치는 데는 어색하고 민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삼촌이나 이모가 "너 이렇게 매일 밥을 차려주시는 게 쉬운 것 같니? 너희 부모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단다"라고 말하면 아이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은혜를 되새기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부모가 스스로 "너 이렇게 매일 밥을 차려주는 게 쉬운 것 같니? 나한테 항상 감사해야 해!"라고 말하면 이기적인 생색으로 비칠 위험이 있습니다. 효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베푼 혜택에 대

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하는 타산적 요구로 보일 수도 있지요. 이런 이유로 효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수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학교 등 외부 기관에서의 효 교육

부모가 효를 직접 가르치기 어렵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학교와 같은 외부 기관의 역할이 중요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태권도장에서는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감사 편지를 쓰게 하고, 초등학교에서는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아드리도록 하는 숙제를 내주고 있습니다. 부모님께 안마를 하고 '인증샷'을 찍어 오는 과제를 내주는 곳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직 부모에 대한 은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데 미숙한 아이들에게 학교나 다른 기관의 효 교육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 기관에서의 효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효란 본래 가정교육의 영역에 속하는 사적인 가치인데, 학교나 공공 기관이 이를 가르치는 것은 사적 영역을 침범하고 간섭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에 따라 효라는 덕목을 사적 영역에서만 가르쳐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오지는 않으니까요. 더욱이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가정 형태가 존재합니다. 맞벌이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처럼 부모님이 바쁘거나 교육을 충분히 제공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학교나 외부 기관이 차선책이나 보완책으로 효 교육을 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효의 마음 기르기

하지만 결국 효라는 덕목을 기르는 것은 외부의 교육에만 의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효심은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효라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실제 자신의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존재인지, 또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상기시켜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점을 자주 떠올리면 그 소중함과 감사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부모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종종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소홀히 하거나 잊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곁에 계시지 않을 상황을 상상해보며 지금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후회 없이 해드리는 것이 효도겠지요. 따라서 현재 부모님이 계시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며 효를 실천하려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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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