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

   
드림프로젝트 (지은이), 이강훈 (그림), 김수경 (옮긴이)
ǻ
사람과나무사이
   
28000
2025�� 07��



■ 책 소개


위대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 속에 무엇을 감춰 놓았을까?
세계 명화도 이제 ‘통ㆍ조ㆍ림’으로 읽어라!

논에 고인 물은 비가 내리지 않고 한동안 햇볕이 내리쬐면 금세 말라 바닥을 드러내지만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샘의 원천’을 땅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세계 명화는 마르지 않는 원천을 품은 샘이다. 한 점 한 점의 명화는 『천일야화』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갈증을 풀어 준다.

『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은 세계 명화 89점에 감춰진 놀라운 비밀과 상상을 초월하는 수수께끼, 신비로운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또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 속 작은 사물, 인물, 배경이 암시하는 죽음과 운명, 화가와 모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에는 거장들이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한 특별한 기법과 시대마다 명화가 말려든 일대 스캔들을 비롯해 명화에 대한 우리 상식의 허를 찌르고 통념을 깨뜨리는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은 비유하자면, 89그루의 명화 이야기라는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자 89가지 기상천외하고, 은밀하고, 흥미진진한 명화 이야기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통조림’이다. 세계 명화도 ‘통째로, 조목조목 - 통ㆍ조ㆍ림’ 방식으로 읽으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들이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테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위대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 속에 무엇을 은밀히 감춰 놓았을까?’

■ 저자 드림프로젝트
방대한 정보 네트워크, 탁월한 기획력과 안목, 왕성한 창작력으로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콘텐츠를 화수분처럼 만들어 내는 일본의 대표적인 창작 마니아 집단. 이 책 『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은 명화에 관한 기존의 평면적이고 틀에 박힌 시각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이제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 코드의 비밀과 불가사의』 『2시간 만에 읽는 세계의 명작』 『2시간 만에 읽는 일본의 명작』 『재미있는 걸작 소설 70권』 『지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현명한 지혜』 『적극적인 사람으로 인정받는 기술』 『외국인에게 배우는, 인생을 편하게 사는 법』 등이 있다.

■ 역자 김수경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저작권 에이전트로 근무하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공저로『잘나가는 회사는 왜 나를 선택했나』가 있고, 옮긴 책에 『세계사를 바꾼 맥주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랑과 욕망 세계사』 『똑똑한 식물학 잡학사전』 『기획서는 한 줄』 『청춘이란』 『마두금 이야기』 『조금 다를 뿐이야』 『여자 나이 50』 『듣기: 직원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소통의 기술』 『준비된 습관』 등이 있다.

■ 차례
서문_ 거장이 감춰 놓은 메시지와 비밀을 푸는 입체적인 명화 읽기

Chapter 1.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속 말은 실제로는 당나귀였다?
1. 달리는 왜 밀레의 〈만종〉 속 농부 부부가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땅에 묻기 전 슬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을까?
2.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속 나폴레옹은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탔다?
3.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이 여러 장 존재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라진 기둥’의 비밀은?
4.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은 라파엘로가 아닌 그의 스승 페루지노의 작품이라는데?
5.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또는 “학살”〉 속 ‘흰 셔츠 입은 남자’의 모델이 예수라고?
6.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왜 망국민처럼 오랜 세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국외를 떠돌아야 했을까?
7. 제리코는 왜 〈메두사호의 뗏목〉에 실제보다 5명이나 많은 20명의 배에 탄 사람’을 그렸을까?
8.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미국 소장본과 일본 소장본 중 어느 것이 출세작일까?
9. 클림트는 왜 달콤한 키스 장면을 빌려 정반대되는 ‘죽음’을 암시했을까?
10. 벨라스케스 〈시녀들〉의 진짜 주인공은 왕이나 왕비도, 시녀들도 아닌 벨라스케스 자신이었다고?
11. 조토는 왜 〈동방박사의 경배〉에 베들레헴의 별 대신 ‘핼리혜성’을 그려 넣었을까?
12. 보티첼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최고 걸작 〈비너스의 탄생〉으로 인해 인생 말년에 명성을 잃었다는데?
13. 모로가 〈출현〉에서 세례 요한의 잘린 목이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14. 르누아르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에서 파리 시민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비결은?
15.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없었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칭송받는 빈센트 반 고흐도 없었다?
16. 무하가 창조한 세기의 걸작 〈지스몽다〉는 우연히 탄생한 작품이다?

Chapter 2. 다빈치는 왜 〈최후의 만찬〉 주요리로 양고기 대신 ‘생선’을 그렸을까?
17. 페르메이르의 그림에는 왜 그토록 자주 ‘창문’이 등장할까?
18.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식탁에 주요리로 양고기 대신 ‘생선’을 그린 이유는?
19. 미켈란젤로는 왜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예수의 손동작을 기존 관례와 반대로 그렸을까?
20.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왜 거의 예외 없이 파란색 옷을 입고 있을까?
21. 보스의 〈쾌락의 정원〉에는 사람을 고문하는 악기가 있다?
22.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배경이 된 욕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3. 브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에 그려진 이상야릇한 인물들은 각각 무엇을 상징할까?
24.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그린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소름 돋는 그림인 까닭은?
25.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동〉에는 예수의 자손을 찾아 프랑스 왕으로 복귀시키려는 시온 수도회의 은밀한 계획이 숨어 있다?
26. 페르메이르의 〈저울을 든 여인〉 속 하얀 두건을 쓴 여인은 저울로 무엇을 재는 걸까?
27. 호가스의 〈결혼 세태〉 연작에 한 권의 추리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28.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비너스 여신을 찾는 특별한 요소 ‘어트리뷰트’란?
29.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결혼 증명서’였다는데?
30.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그림은 왜 앵그르의 〈필리베르 리비에르〉에 카메오로 출연했나?
31. 다빈치가 〈지네브라 데 벤치〉에 노간주나무를 그린 뜻밖의 이유는?

Chapter 3. 뭉크는 왜 자기 작품 〈생명의 춤〉 모델에게 총격당했나?
32.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의 모델이 그의 연인 알바 공작부인이었다고?
33. 프라고나르가 관능적인 작품 〈그네〉를 통해 전하고자 한 진짜 메시지는?
34. 쇠라의 〈화장하는 젊은 여인〉 속 화분 뒤에 화가의 얼굴이 숨어 있다는데?
35. 뭉크가 〈생명의 춤〉의 모델에게 총격당한 안타까운 사연은?
36. 라파엘로의 〈프시케 로지아〉 천장화는 그의 여성 편력 때문에 끊임없이 혹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데?
37. 가톨릭 수사였던 리피의 〈성모자와 두 천사〉 속 성모 마리아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성모 마리아 중 가장 아름다운 이지미로 손꼽힌다고?
38. 로랑생은 왜 철저히 남자를 배제한 채 여자들만 그렸을까?
39. 세잔이 그린 아내 초상화 27점이 제각각 다른 뜻밖의 이유는?
40. 르누아르는 왜 〈잔 에뷔테른〉을 비롯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을까?
41. 루소가 〈나, 초상 - 풍경〉에서 재혼한 아내의 이름 밑에 감춰 둔 여성의 정체는?
42. 퐁텐블로파의 대표작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 속 한 여성은 왜 다른 여성의 젖꼭지를 손에 쥐고 있을까?
43. 자기 작품 〈독일 소녀〉의 모델에게 프러포즈 받은 천재 화가 나오지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44. 철학자 발랑슈가 다비드의 〈쥘리에트 레카미에 초상〉 속 주인공과 같은 무덤에 묻힌 기상천외한 이유는?
45. 르누아르는 왜 지적인 여성을 극도로 싫어하고, ‘완벽하게 텅 빈 얼굴’의 여성을 좋아했을까?
46. 시게루가 〈바다의 양식〉을 완성한 다음 뒤늦게 자기 애인을 그려 넣은 이유는?

Chapter 4.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모델이 젊은 세탁부였다?
47.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여주인공 척추뼈가 정상인보다 3개나 더 많다고?
48. 같은 해에 발표된 훨씬 선정적인 그림 〈비너스의 탄생〉은 찬사를 받았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만 혹평에 시달린 이유는?
49. 동료 화가들이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을 보며 “피카소는 언젠가 자기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다”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은 이유는?
50.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실제 모델이 세탁부로 일하는 젊은 여성이었다는데?
51. 당대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이 ‘추한 그림’으로 낙인찍힌 이유는?
52.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왜 당대 비평가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비웃음을 사며 외면당했을까?
53. 마네의 〈올랭피아〉가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까닭은?
54. 〈다연발 총〉 스케치 등에서 선보인 다빈치의 아이디어가 실용화되었다면 세계 전쟁사를 다시 써야 했을 수도 있다?
55. 마티스의 〈춤〉 3부작 중 하나만 미완성으로 남은 수수께끼는?
56. 고야는 왜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왕과 왕비 사이에 부자연스러운 공간을 비워 두었을까?
57.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상습적으로 마감일을 어긴 뜻밖의 화가는?
58. 크라나흐의 〈비너스〉는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대량 생산된 그림이라는데?
59. 뒤샹이 미술 전시회에 ‘남성용 소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한 의도는?
60. 〈오필리아〉의 화가 밀레이는 왜 모델의 부모에게 고소당했을까?

Chapter 5. 홀바인이 〈대사들〉에 ‘해골’ 이미지를 은밀히 숨겨 놓은 이유는?
61. 17세기 화가 페르메이르가 〈우유 따르는 여인〉을 그릴 때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62. 카라바조는 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에서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의 모델로 자신을 그렸을까?
63.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세잔은 왜 실제 여성과 작업하지 않고 상상으로 그렸을까?
64. 인생 만년에 르누아르가 움직이지 않는 손에 붓을 매달아 그린 〈목욕하는 사람들〉이 ‘르누아르 미술 세계의 집대성’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65. 홀바인은 왜 〈대사들〉을 그리면서 ‘해골’ 이미지를 은밀히 숨겨 놓았을까?
66. 대낮에 출동하는 민병대를 그린 그림이 ‘야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67.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에 그려진 거울에 비친 남자는 과연 화가 자신일까?
68. 브뤼헐은 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가 아닌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델로 고대의 바벨탑을 그렸을까?
69. 영국 화가 터너의 〈국회의사당 화재〉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데?
70. 세이키가 〈독서〉에서 빛의 움직임을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71. 개성 넘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르침볼도의 기발하고 독창적인 작품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72. 모네는 왜 30여 년의 시간과 열정을 〈수련〉 연작에 쏟아부었을까?
73.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1884년〉은 치밀한 색채 연구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74. 라파엘로는 왜 〈성모자와 세례 요한, 또는 의자에 앉은 성모〉를 버려진 포도주 통 뚜껑에 그렸을까?
75. 요절한 천재 비어즐리의 삽화는 인쇄술 발달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76. 클림트는 여성을 그릴 때 알몸을 먼저 그린 뒤 그 위에 옷을 그렸다는데?

Chapter 6. 모네는 왜 대중의 찬사를 받은 자기 작품 〈일본 여인〉을 졸작으로 깎아내렸을까?
77. 시들해진 고갱의 창작욕과 예술가의 열정을 되살려 낸 한 타히티 소녀의 비밀은?
78. 로트레크는 왜 다른 화가들은 그리기 싫어하는 포스터를 즐겨 그렸을까?
79. 화가 에곤 실레와 독재자 히틀러의 인생 여정은 싱크로율 거의 백 퍼센트다?
80. 보티치니의 〈토비아스와 세 천사〉에 다빈치가 모델로 등장한다는데?
81. 렘브란트는 아무도 주문하지 않는 자화상을 왜 지치지 않고 그렸을까?
82.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라이벌 미켈란젤로를 그려 넣은 까닭은?
83.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는 어떤 상징과 의미가 담겨 있을까?
84. 들라크루아의 베일에 싸인 출생 비밀이 그의 작품 〈키오스섬의 학살〉과 관련 깊다는데?
85. 모네는 왜 전문가와 대중의 찬사를 받고 비싼 가격에 팔린 자기 작품 〈일본 여인〉을 졸작으로 규정했을까?
86. 〈후가쿠 36경〉의 화가 호쿠사이가 평생 93번이나 이사하며 살아야 했던 절실한 이유는?
87. 고귀함을 일관되게 추구한 푸생은 왜 야만스러운 폭력 장면이 가득한 〈사비니 여인의 납치〉를 반복적으로 그렸을까?
88. 10개월 동안 4번이나 화풍을 바꾸면서 150여 점을 그린 도슈사이 샤라쿠는 화가 한 사람이었을까, 화가 집단이었을까?
89.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의 미소년 파르미자니노가 갑자기 늙어 버린 흥미진진한 이유는?

 




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


클림트는 왜 달콤한 키스 장면을 빌려 정반대되는 ‘죽음’을 암시했을까?

엄격하고 경직된 역사주의,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회화,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경향이 싹텄다. 19세기 말의 상황이다.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확산된 이 국제 장식미술 운동을 흔히 '아르누보(ArtNouveau, New Art)'라고 하며, 독일에서 아르누보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Youth Style)'이라 불렸다.


한편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 가운데 유겐트슈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이 1897년 '빈 분리파(Wiener Sezession)' 그룹을 결성했다. 빈 분리파를 주도한 예술가들은 화가이자 금세공사, 장식미술가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비롯해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래픽 아티스트, 가구·장신구·세라믹 디자이너, 유리 공예가 등 거의 모든 시각 예술 장르에 포진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아카데미의 고루한 전통과 단호히 결별(분리)하고 새로운 예술, 자유로운 예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 예술을 지향했다.


클림트의 대표작을 꼽을 때 황금빛이 찬란한 키스(연인) (The Kiss(The Lovers))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클림트는 1907년부터 2년 가까이 제목 그대로 입맞춤하는 연인을 공들여 그렸다. 그림 속에 두 사람만의 시간, 그 황홀한 순간이 그대로 멈춘 채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연인의 감정을 따라 가만히 숨 죽인 채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다 화가가 실제 금박을 활용해 장식한 화면 구석구석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 피어난 작은 꽃들이 풍기는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향기가 감도는 가운데 연인은 하나가 되었다. 남자의 머리, 여자의 얼굴, 어깨, 손, 발은 비교적 사실적, 입체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 밖의 것, 곧 그들의 몸, 의상, 꽃밭, 배경 등은 모두 장식적, 평면적으로 그려졌다. 연인의 몸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에게 흡수되고, 그들의 의상과 배경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입맞춤하는 연인을 주제로 한 작품은 예전부터 있어 왔지만 클림트는 전통적인 회화의 공식과 기법을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작품 속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은 누구를 모델로 그려졌을까? 이와 관련해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미술사가들은 클림트 주변의 수많은 여인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동반자 관계를 이어간 여인, 죽음이 가까워진 클림트가 찾은 여인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를 키스(연인)의 주인공으로 추정하곤 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물론 '사랑'이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지극히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사랑 속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죽음'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발끝이 꽃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다. 꽃밭은 여인의 발 아래로 급작스럽게 끊긴다. 이로써 가파른 절벽 끝에 내몰린 듯한 간절함과 애절함이 연인의 사랑에 더해졌다. 이 사랑의 끝은 죽음일까?


클림트가 왜 키스하는 연인을 절벽 끝에 배치해 '죽음'을 떠올리게 했을지 헤아려 보자면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은 오랜 세월 동안 중부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거지이자 구심점이었다. 특히 클림트가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이 도시는 번영과 발전의 정점에 있었다. 또한 국제 도시 빈에서는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전통에 반기를 든 인상주의, 유겐트슈틸, 빈 분리파 같은 새로운 예술 경향의 움직임이 유독 활발했다.


세기말, 세기초의 빈은 비록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그늘에서 쇠락과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민족이 우후죽순 들고 일어나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제국은 무너지기 직전의,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희망과 절망, 발전과 쇠퇴가 공존하며 불안이 점점 고조되어 가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 클림트의 키스(연인)에도 반영된 게 아닐까. 절정으로 타오른 불은 결국 꺼지고야 마는 운명이니 말이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비너스 여신을 찾는 특별한 요소 ‘어트리뷰트’란?

아름다움의 대명사 비너스 여신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 가운데서도 특히 자주 서양 명화에 등장하는 모델이다.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세 여신, 곧 헤라, 아테네, 비너스 여신이 모여 서로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장면이라든지, 사랑의 여신답게 수많은 애정사와 관련된 장면, 아들 큐피드와 함께 있는 장면 등 비너스 여신과 관련된 그림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비너스 여신의 탄생' 주제에 도전하는 화가가 많았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아버지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생식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졌더니 거품이 부글거리며 일어난 가운데 눈부신 여신 비너스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있으면 누구든 그림 속 인물이 비너스 여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제목이 없는 경우도 있고, 제목에서 '비너스'를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그림 속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방법이 있을까? 서양미술사에서 벌거벗고 등장하는 여인은 한두 명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과 님프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을 특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가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장치, 곧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지시물이나 상징물을 '어트리뷰트(Attribute)'라고 한다. 예를 들어 그림 속 여인 옆에 성경, 백합꽃, 장미꽃, 투명한 물병 등이 놓여 있으면 그 여인은 바로 성모 마리아다. 백합꽃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장미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자비를, 투명한 물컵은 빛이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듯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의 어트리뷰트이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비너스 여신의 어트리뷰트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비너스 여신이 탄생할 때 장미꽃이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바다에서 태어난 여신을 육지로 밀어내는 바람을 불 때 장미꽃이 함께 날아온다. 비너스 여신과 함께 등장하는 장미는 사랑, 아름다움과 함께 짙은 향기로 인한 매혹을 상징한다. 여기에 더해 그토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가 가시를 품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의미도 포함한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1538)에서 비너스는 오른손 가득 장미꽃을 쥐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가 그린 단장하는 비너스(The Toilette of Venus)(1751)에서 장미는 비너스의 발아래에 놓여 있다. 부셰의 그림에서 비너스가 팔로 감싸안은 비둘기 또한 비너스 여신의 어트리뷰트다. 전통적으로 비둘기도 사랑을 상징해 왔기에 비너스 여신과 함께 등장하곤 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어트리뷰트를 좀 더 꼽아 보면, 신 중의 신 제우스는 독수리, 제우스의 부인 헤라 여신은 화려한 공작새, 지혜를 상징하는 아테나 여신은 부엉이가 있다. 이런 어트리뷰트를 찾아 그림 구석구석을 뒤져 보는 것도 명화 감상이 주는 즐거움이다.


같은 해에 발표된 훨씬 선정적인 그림 〈비너스의 탄생〉은 찬사를 받았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만 혹평에 시달린 이유는?

서양 미술사에서 '근대 미술(Modern Art)'이라고 하면 대개 19세기 후반부터 제1·2차 세계대전까지의 미술을 뜻한다. 이 시기에 유럽은 그 한 세기 전 시작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결과 사회 전반이 요동치고 있었다. 정치, 종교, 사상, 과학 등에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온 가치가 급변하는 시대를 대변하지 못하고 힘을 잃어 갔는데, 예술에서도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느긋하게 흘러 오던 물줄기의 방향이 급격히 전환하며 물살도 거세지기 시작한 지점, 그 한가운데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있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근대 미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그림은 1863년에 발표되었는데, 당시 최악의 작품이라는 혹평과 함께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눈에 딱 알아차릴 수 있는 도드라진 이유가 하나 있다. 화면 중앙의 벌거벗은 여인, 주위의 어두운 색채와 대조적이게도 눈처럼 하얀 피부의 여인이 도발적인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인이 여성 누드화를 자주 못 봤을 리는 없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양 회화에 수없이 등장하는 게 벌거벗은 여인이니 말이다. 더 가까운 예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같은 해 파리 살롱에 발표되어 엄청난 찬사를 받은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1863)이 있다. 이 그림에서 벌거벗은 여인의 자세는 훨씬 더 관능적이며 자 극적이다. 그럼에도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비난은커녕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재위 1852~1870)가 즉시 구매해 황제의 소장품 목록에 추가됨으로써 그해 최고의 작품이라는 명성을 획득했다. 나아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보자르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림 속 여인이 현실의 인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여인의 누드는 그리스 · 로마 신화 속 여신이나 요정, 종교화에서는 선악과를 베어 물기 전의 이브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바다 한가운데 부글거리는 거품에서 솟아오르며 태어난 아름다운 여신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신의 몸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여인의 알몸을 감상하고 싶어 한 은밀한 욕망은 차치하고, 아무튼 그림 속에 여인의 누드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신화 속 이야기의 등장 인물' 같은 수긍이 갈 만한 필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한 부유한 후원자가 비밀스럽게 감상할 요량으로 자기 애인의 누드를 의뢰한 그림 옷을 벗은 마하가 발각되어 고야가 종교 당국에 불려가 진땀 흘리며 해명한 사건도 있었잖은가. 여인의 누드는 함부로 그려질 수 없었다. 이는 오랜 미술 전통의 공공연한 규범이자 질서였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바로 이런 맥락을 깨부수고 나왔다. 이는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림의 등장인물은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고 풀밭 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현대인이다. 그런 터라 파리 시민들이 즐겨 가는 숲(그림의 배경이 파리 서쪽의 불로뉴 숲이라고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에 가면 벌거벗은 여인과 그 일행을 실제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그 점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사람들이 부도덕한 상상을 하도록 부채질하는 '천하에 몹쓸 그림'인 것이다.


하늘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듯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또한 여러 고전 작품을 참고하고 학습한 결과였다. 마네에게 특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전원 음악회 (Pastoral Concert)(1500~1525)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거장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는 들판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두 젊은이 곁에 벌거벗은 여인들이 있는 그림이다. 미술사가들은 이들 여인이 젊은이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 넣는 여신으로, 젊은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300년도 더 전에 그려진 전원 음악회를 근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변주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대중과 평론가의 몰이해와 혹평 속에 묻힐 뻔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긍정적 의미에서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으로 새롭게 눈 뜬 이들이 바로 후에 '인상주의자'라고 불릴 젊은이들이었다. 마네의 대담한 색채 사용과 평면적인 붓 터치, 빛과 그림자의 직접적인 처리, 명암의 단순화, 생생한 화면 구성, 동시대인의 삶이라는 주제 등은 진보적인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젊은 화가들의 우상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면,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아카데미즘 미술은 점차 고리타분한 과거 예술로 전락해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인생 만년에 르누아르가 움직이지 않는 손에 붓을 매달아 그린 〈목욕하는 사람들〉이 ‘르누아르 미술 세계의 집대성’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프랑스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대중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밝고 화사한 그의 그림이 보는 이를 기분 좋고 즐겁게 만들기 때문으로, 그는 평생 '삶의 기쁨'을 노래했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삶의 행복을 그린 화가'라고 불린다. 그가 추구하는 행복은 평범한 일상에 있었다. 그는 현실의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에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았다. 그가 생애 마지막까지 여인의 누드를 즐겨 그린 것을 두고 여인의 몸에 대한 집착 또는 탐닉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르누아르가 그린 여인의 누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닌 근원적 생명력, 그 빛나는 에너지를 상징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는 동안 우리가 자주 잊어 버리곤 하는 우리 내부의 힘과 아름다움을 르누아르는 그의 그림으로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르누아르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전 시간이 날 때마다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고대 조각과 옛 거장들의 그림을 묘사했다. 특히 그는 라파엘로, 부셰, 앵그르가 그린 고전적 여인, 여신 이미지에 매료되었는데, 그의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인의 누드' 주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르누아르가 생애 마지막까지 그린 '목욕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 누드'라는 오랜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연작 그림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 그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목욕하고 나온 다이아나(Diana Resting after Her Bath)(1742)라고 한다.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그림에서 대상의 형태는 불분명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풍경보다 인물에 초점을 둔 르누아르는 1880년대 중반부터 인상주의의 밝고 환한 화면 속에 고전적으로 묘사한 인물을 접목시켰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목욕하는 사람들(The Great Bathers)(1884~1887)에서 르누아르의 여성들이 단단한 윤곽선과 매끈하고 아름다운 피부를 되찾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짧고 거친 붓 터치로 가득했던 인상주의 스타일을 버리고 붓 자국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부드럽고 섬세한 기법으로 여인들의 몸을 묘사한 반면, 뒤쪽 풍경에서는 다분히 인상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시간이 지난 다음 르누아르의 스타일은 다시 또 크게 변화한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의 일이다. 이때의 변화는 그의 취향이나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그가 의도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긴 탓이었다. 만년에 르누아르는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무척 고생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상이 점점 심해져 걸을 수도, 붓을 쥘 수도 없게 되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그림을 그만둘 만도 하지만, 르누아르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손에 붓을 묶어 달라고 한 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1900년대 초에 제작한 그림이 이전과 다른 스타일로 옮겨 간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스타일이 변했다고 해서 작품의 수준이 저하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시기의 작품 역시 르누아르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손가락이 붓을 쥘 수 없게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그의 열망이 누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려움 속에서 놀라운 집중력과 숙련된 기술을 발휘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반스 재단에 있는 구성, 다섯 명의 목욕하는 사람들(Composition, Five Bathers)(1917~1918),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목욕하는 사람들(The Bathers)(1918~1919) 등은 그가 생애 마지막에 수행한 작업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오르세 미술관의 목욕하는 사람들을 완성한 해에 르누아르는 78세로 생을 마감했기에, 이 작품은 그의 '회화적 유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여인의 풍만한 몸에서 발산되는 감각적 매력이 가득하다. 현실을 초월한 자연의 모습을 그리며 한껏 즐거워하는 동안 노화가는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르누아르가 추구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삶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테다.


화가 에곤 실레와 독재자 히틀러의 인생 여정은 싱크로율 거의 백 퍼센트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인 화가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방식의 미술과 분명히 선을 긋고 장식적 화면에 치중한 당대 회화의 흐름과도 또 달랐다. 그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날카로운 선과 불안정한 구도로 드러내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에곤 실레는 빈으로부터 북서쪽으로 45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시 툴른에서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열여섯 살에 빈 미술아카데미에 진학했으나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두 해 전, 곧 실레가 열네 살일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기울었다. 이런 환경적 변화로 인해 그의 내면 성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때 한결 빨리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는 깊은 사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그가 비교적 어린 나이일 때부터 자화상 그리기에 열중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일찍이 실레의 자질을 알아봐 준 인물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 젊은이들의 우상이던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실레는 빈 미술아카데미의 고루한 방식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을 때 클림트를 찾아갔다. 1907년의 일이다. 클림트는 자기 그림과 여러 면에서 정반대 지점에 있는 실레의 화풍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클림트는 그의 그림을 구입하고, 자기 작품과 교환할 것을 제안하고, 그림 모델을 주선하고, 후원자를 소개해 주었다.


이 시기, 곧 1907~1909년 사이 실레의 작품은 클림트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실레는 클림트의 스타일을 빠르게 습득한 후 곧 자기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는 클림트의 장식적 에로티시즘과 형상 왜곡을 더욱 대담하게 밀고 나갔다. 이렇게 확립된 실레의 화풍을 한마디로 말하면,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모두 삭제해 버리고, 최대한 날것 그대로인 대상과 날것 그대로인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1915년에 그린 죽음과 소녀(Death and Maiden)는 실레의 독자적인 화풍이 원숙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한편 실레보다 한 해 먼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그와 비슷한 길을 걸을 뻔한 유명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희대의 독재자이자 악인으로 꼽히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 어째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에곤 실레와 비슷한 길을 걸을 뻔했다고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유대인 수백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히틀러 역시 빈 미술아카데미 진학을 꿈꾸던 화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히틀러는 실레와 상당히 비슷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 실레와 마찬가지로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실레가 빈 미술아카데미에 합격한 이듬해에 히틀러도 빈 미술아카데미에 도전했으나 두 번이나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히틀러는 화가로 성공하고 싶은 열망을 충족시켜 줄 만큼 예술적 재능을 가지지는 못했다.


실레와 히틀러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독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정치가로서 데뷔했고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두었다.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화가로 일찍이 인정받았으니, 대중의 존경과 높은 명성을 누리며 성공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는 논란과 외설 시비를 몰고 다녔고 미성년자 유혹 혐의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1918년에 대대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3일 뒤에 실레도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동안 실레와 히틀러는 불과 300미터 남짓 떨어진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를 꿈꾸던 두 청년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따금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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