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

   
말콤 해리스 (지은이), 이정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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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사
   
26000
2025�� 02��



■ 책 소개


150년 실리콘밸리가 설계한 성장동력의 이면을 추적한다!

팔로알토는 명실상부한 실리콘밸리의 경제 중심지다. 실리콘밸리의 제품은 미국 전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함께 한다. 그러나 이곳은 동시에 자신들의 것을 빼앗긴 인디언의 묘지 위에 지어진 유령이 출몰하는 유독성 폐기물 처리장이며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의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를 다룬 최초의 포괄적인 글로벌 역사서인 이 책은 150년 동안 실리콘밸리를 설계한 이데올로기/기술/정책을 추적하면서 그 결과 어떻게 이곳이 남다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조사한다. 동부에 비해 발전이 미미했던 이곳이 어떻게 경제전쟁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는지, 어떻게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고도 재앙적인 21세기로 이끌었는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속하게 발달한 기술이 어떻게 수많은 인재와 자본과 연결되며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는지, 휴렛팩커드(HP), 제너럴 일렉트릭(GE),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등 전 세계를 흔드는 첨단기술기업들이 어떻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차례대로 나타났는지, 더 나아가 미국 자본주의의 욕망 뒤에 가려진 소문자들의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 저자 말콤 해리스
저자 말콤 해리스는 ‘요즘 아이들: 밀레니얼 세대 만들기(KIDS THESE DAYS: THE MAKING OF MILLENIALS)’, ‘무슨 헛소리야: 역사가 끝난 이래로 역사적인 일이야(SHIT IS FUCKED UP AND BULLSHIT: HISTORY SINCE THE END OF HISTORY)’ 등의 책을 낸 작가다. 1988년생으로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이사한 후 팔로알토에서 자랐고 메릴랜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2009년에 설립한 문화 및 문학 비평 온라인 잡지 ‘The New Inquiry’에서 활동 중이다. 2011년 월가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 등 사회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진지하면서도 무심한 듯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 역자 이정민
역자 이정민은 대학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국제학을 공부했다. MBC문화방송에서 번역작가 및 구성작가로 활동했으며 외교통상부에서 홍보에디터로도 근무했다.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 전문 번역가로서 잘 읽히면서도 원전의 가치를 오롯이 전달하는 글을 선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제너레이션: 세대란 무엇인가’(2024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MOM 맘이 편해졌습니다’, ‘평가받으며 사는 것의 의미’, ‘이집트에서 24시간 살아보기’, ‘인류의 역사’, ‘21일’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1부 1850~1900
1장 시간이 돈
- 빠르게 움직여 판을 깨라
- 은행의 탄생

2장 독점기업
- 누군가 멈출 수 있었을까?
- 철로와 노동자

3장 스탠퍼드
- 거칠 것 없는 속도
-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딴 대학

2부 1900~1945
4장 혼란, 그리고 성장
- 캠퍼스의 악몽
- 기술과학의 시대

5장 바이오노믹스와 우생학
- 탁월한 유전자 발굴 프로젝트
- 인종차별주의가 번영의 기반?
- 혁명주의자, 온 사방에 폭탄

6장 후버빌
- 광산 금융사기꾼 vs 대통령 후보
- 대장, 하버트 후버
- 대공황과 1차 세계대전
- 미국의 공산주의

7장 격동 속 젊은 인재들
- 전자 통신의 시대, 그리고 전쟁
- 그 시대 캘리포니아의 일본인
- 불평등이라는 성장산업

3부 1945~1975
8장 폭발적 산업화
- 전쟁이 끝나고
- 불평등의 고착화

9장 군사/산업/학계의 단단한 블록화
- 기술의 교차점
- 냉전과 아웃소싱 자본주의
- 낮은 비용, 급속한 성장

10장 PC의 등장, 개인 혁명
- 그 많은 LSD가 왜?
- 이기기 위한 수많은 실험

11장 탈식민, 제국을 파괴하는 방법

4부 1975~2000
12장 세계에서 으뜸가는 캘리포니아
- 하얀 반란
- 후버의 귀환

13장 레이건 대통령의 전쟁 자본주의
- 삶의 민영화
- 새로운 세계와의 새로운 질서
- 스탠퍼드 기술

14장 잡스와 게이츠
- 슛을 쏘다
- 너드

15장 온라인 아메리카
- 커피, 컴퓨터, 그리고 코카인
- 너무 많은 나쁜 놈들

5부 2000~2020
16장 B2K
- 예측할 수 없거나 틀린 행동
- 현실 세계

17장 날 부자로 만들어주는 게 좋을 거야
- 밀리언달러 스팟
- 제대로 진행되고 있나요?

18장 태양의 기포
- 적과의 동침
- 스피드
- 어떻게 멈출 것인가?

마치며
팔로알토, 자본주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


1945~1975

군사/산업/학계의 단단한 블록화

리 드 포레스트의 오디온 트라이오드는 에디슨의 기본 전구에 비해 월등히 복잡한 건 아니었지만 진공관 무선통신 호황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팔로알토가 연방 전신이 떠난 뒤에도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준 마이크로파 기술의 기반이기도 했다. 게다가 트라이오드는 모두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프레더릭 터먼, 알렉스 포니아토프, 찰스 리튼, 바리안 형제, 그리고 스탠퍼드의 나머지 팀(USA) 레이더 군단이 튜브와 파동의 힘을 이용해 히 틀러를 물리쳤다면 연합군의 또 다른 집단은 트라이오드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초기 컴퓨터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이렇다 할 기능이 많지 않아서 오디온 발명 이후 35년이 지난 뒤에야 진공관 컴퓨터가 선을 보였다. 마침 연합군이 나치 독일의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다양한 조건 속에서 포탄이 그릴 궤적을 계산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이야말로 전자 컴퓨터 개발의 도화선이었다. 트라이오드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기꺼이 투입할 만큼 중대한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스탠퍼드의 많은 유명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기술에 몰두했다. 리튼은 뉴어크의 ITT로, 휴렛은 미 육군으로, 프레더릭 터먼은 케임브리지의 RRL로, 쇼클리는 대잠수함전 작전 연구 그룹으로, 바리안 형제는 뉴욕의 스페리 자이로스코프로, 핸슨은 MIT로 각각 파견되었다. 그 사이 데이브 팩커드는 고향에서 휴렛팩커드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HP가 2차 세계대전을 위한 무기나 장비를 직접 납품한 건 아니었지만 미군에서 HP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고 연방정부로부터 하도급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미군이 전쟁에 막 발을 담그려던 시점에는 특수 무선통신 및 마이크로파 기술과제를 의뢰받았다. 가장 큰 프로젝트는 레이더에 대응해 적의 스캐너에 가짜 위치신호를 보내는 레오파드 프로젝트였다. 터먼의 무선통신 연구는 RRL 밖에서도 전쟁기술에 기여해 레오파드 프로젝트의 경우, 그가 학생들을 위해 설계한 상업화 경로가 사용되었다.


휴렛팩커드는 터먼이 미군에 처음 연결해준 전자통신 스타트업이었다. 처음에는 팩커드가 휴렛을 고집했고 대공황 시기에는 터먼과 팩커드도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종국엔 모든 게 터먼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군사 계약 및 하청이 봇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을 때 터먼은 학생들을 어디에 배치해야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을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터먼의 지식, 그리고 부친의 바람대로 그의 IQ는 조국인 미국, 고향 및 출신 기관의 잇속을 동시에 채워주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로 돌아왔을 때 휴렛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40년만 해도 매출이 4만 달러가 채 안 되던 곳이 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면서 직원은 200명이 넘고 연 매출은 150만 달러에 이르는 진정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설립자들이 루스벨트 정부를 상대로 계약을 따낸 데 비해 팩커드는 외부 투자자에 의존하지 않고 매년 100%씩 성장할 수 있는 수익원을 확보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향한 열정에 기반해 허버트 후버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모두의 신뢰받는 고문으로 거듭나면서 루스벨트의 전시 재협상 위원회에서 온 요청도 거부할 수 있었다.


관료 두 명이 팔로알토로 찾아와 HP가 과잉수익 규제안을 위반했다고 경고하자 팩커드는 그들이 이해도 못하는 자유시장 이론에 대해 성토한 뒤 ‘사실상 자신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캘리포니아 후버빌에서 루스벨트의 대리인과 사회민주주의 의제가 다시 한 번 무력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대형 계약의 씨가 마르자 HP도 매출의 3분의 2가량이 줄었다. 하지만 전시 수익이 두둑했던 덕분에 전후 경제를 향해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었다. 휴렛과 팩커드에게는 앞으로 뭘 만들지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냉전과 아웃소싱 자본주의

실리콘밸리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건 이 지역을 규정하게 된 일련의 발명가 및 투자자뿐만이 아니다. 국가 간 경쟁 및 동맹 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던 세계 질서에서 냉전의 양극 체제로 전환하기까지 실리콘밸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원한 건 무엇이며 팔로알토와 스탠퍼드에서 쏟아부은 막대한 자금이 이를 얻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미국은 그 자체로 모순의 땅이지만 미국 자본은 한결같이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해왔고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자본이다. 세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확보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필수 사항이었다. 이는 무역을 위해서나 ‘인권’을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높은 수익에 전념하는 국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토지 개혁과 압수 과세를 주장하는 노동자들 앞에서도 국가가 재산권을 존중하고 보장해줄 거라고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노동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본의 편을 들고 임금 통제에도 도움을 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보장이 없다면 해외에 투자했다 현지인들의 정치적 변덕에 휘말릴 수 있고, 그랬다가는 자칫 애초에 예상했던 투자수익에 손실을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캘리포니아의 자본가들이 20세기 전반기에 개인적으로 절감한 것처럼 전 세계 노동자들은 천연자원 및 생산 수단을 장악할 의지와 능력이 충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못지않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정반대의 이 두 체제는 모든 노동 현장에서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다. 정부의 10여 년에 걸친 인프라 확장과 전쟁 지출에 뛰어든 미국 자본은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959년, 휴렛팩커드는 자체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중 최초의 해외 제조 시설을 독일 뵈블링엔에 설립했다. 회사는 국제적 명성을 자랑했고 전후 회복기의 유럽에는 품질 좋은 테스트 및 측정 장비가 필요했지만 팔로알토에서 굳이 뵈블링엔까지 확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럽에 영업소를 추가할 때 HP는 대규모 상업 중심지로서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스위스 제네바를 후보지로 택했다. 하지만 뵈블링엔은 정반대였다. 1943년 10월 7일 밤, 영국 왕립공군 폭격기가 독일의 산업 도시 슈투트가르트 폭격에 성공했는데 그날 구름이 잔뜩 끼었던 탓에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뵈블링엔에도 폭탄이 투하되었다.


그 결과 수백 채의 건물이 무너지고 수십 명이 사망하는 등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말 서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익과 성장에 힘입어 외국인 투자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HP의 공장은 옛 추축국 영토가 공산주의에 점령되는 걸 막기 위한 반공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서방 점령국들은 독일과 일본의 자본주의를 최대한 빠르게 안정 궤도에 올려놔야 했다.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동아시아를 지키는 경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후 지도에서 두 체제 사이의 경계는 늘 위태로웠다. 하지만 애초에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의 보수파들은 해외에서 계속 돈이 나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들이 패전국들에 재건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1975~2000

잡스와 게이츠

너드

미국인들은 실리콘밸리의 마이크로 컴퓨터 산업 초기를 발명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발명의 역사는 데이비드 팩커드,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빌 게이츠와 폴 앨런 같은 상징적 천재 사업가의 스토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나 프로그래머는 아니었지만 일찌감치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임에 분명했다. 진정한 발명의 길은 결코 깨끗하거나 단순하지 않지만 과학적 공로가 순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때 대중은 늘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결국 발명가의 공로를 인정하는 건 어렵기로 악명 높다.


모든 혁신은 이전 혁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발명가는 이런저런 커뮤니티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이상이 같은 아이디어를 동시에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돈이 일종의 점수판 기능을 해 본래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의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기도 한다. 릴런드 스탠포드가 서던퍼시픽의 유명 그림작품에 등장했던 것처럼 스티브 잡스는 ‘씽크 디프런트’ 포스터를 고안해냈다. 유다와 워즈니악은 직접 개발한 제품의 브레인으로 역사 속에 묻혔고 철로를 깔고 칩을 조립한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배경화면의 등장인물로 남았다.


산업화 이후의 이 시기를 가늠하기 위해 지역 비즈니스 환경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실리콘밸리에 경제적 성공이 비단 개별 리더나 기업의 차원이 아니라 이들을 모두 넘어선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집중될 수 있었던 이유가 핵심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발명가나 고립된 선각자보다 매개자가 더 큰 역할을 했다. 스탠퍼드 총장실에서 실리콘밸리의 탄생을 조율한 프레더릭 터먼, 혹은 일본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업의 가족 구조를 채택한 벤처 캐피털리스트 같은 이들 말이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이 이야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지만 사회의 비인격적 힘이 의인화한 대상으로서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프랭크 노리스가 말한 것처럼 “밀과 철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신이 말하는 건 인간이 아닌 힘”이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만약 잡스와 게이츠가 아니었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들의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의인화된 대상으로서 그와 같은 힘을 입증하고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적잖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빌 게이츠는 1세대 개인용 컴퓨터의 운영체제를 개발하기에 제격인 때와 장소를 타고났다. 하지만 누가 정확히 운영체제를 개발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게이츠가 차별화될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과는 달리 PC-DOS에 대한 법적 권리를 따냈기 때문이었다. 왜 게이츠였고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용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편지는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재산권을 주장한 획기적 주장이었다. 컴퓨터가 취미였던 시대와 마이크로 컴퓨터 산업을 확실히 구분하려는 시도였으며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홈브루 클럽은 컴퓨터 과학을 본질적으로 공공의 영역으로 보았고 1970년대에는 기술적으로 그들이 옳았다. 심지어 컴퓨터가 개인 소유였던 시절에도 미국 내 거의 모든 전산전력 비용이 공공자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게이츠가 하버드에서 방위고등연구계획국 PDP를 사용했다는 사실 역시 지적될 수 있다. 다들 공식 프로세서를 사용해 개인 프로젝트를 처리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베이직 인터프리터 작성에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대학, 민간 방위산업체나 군대 등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빅사이언스 컴퓨터로 코딩을 배웠다. 그 작업의 결과물인 지식 제품은 결국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대중에 귀속되었다. 그 지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건 용인될 수 있었지만 일부 주요 지침에 울타리를 쳐놓고 독점 사용료를 받는 건 대담한 행동이었다. 게이츠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와 취미로 컴퓨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게이츠는 주로 공공 시스템이 아닌 곳에서 코딩을 배웠다. 부와 특권에 있어서도 기술 못지않게 새 시대를 누린 시기의 큰 아들이었던 것이다.


온라인 아메리카

커피, 컴퓨터, 그리고 코카인

LSD시대와 마찬가지로 1980~1990년대에는 프로그래머의 능력을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엥겔바트가 한때 상상한 것처럼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간 네트워크가 기술산업 내 개인의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실리콘밸리는 그 자체로 실리콘밸리 제품의 위대한 광고 역할을 했다. 실리콘밸리의 지향점과 도구를 채택한 기업 및 개인은 실리콘밸리처럼 획기적인 수익성과 효율성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인터넷 시장과 주식 시장에서도 갈수록 복음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바깥으로 국내외의 채택과 투자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소매시장 못지않은 평판과 동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베이 지역은 기업 간, 개인 간 활동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 만큼 중립성이 보장되는 공공장소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그 결과 실리콘밸리는 커피문화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파리 야외 카페의 여유가 아닌, 노트북과 라떼, 정보회의와 업계가십만이 난무했다. 이 무렵, 버클리의 피츠커피에서 시작되어 시애틀의 스타벅스로 이어지고 급기야 전 세계로 확산된 미국 커피의 ‘제2의 물결’이 일어났다. 실리콘밸리의 자아 인식에서 카페를 창조적 거점으로 여기는 시각이 핵심을 차지하게 돼 향후 기업들은 사무실을 아예 안락한 커피숍처럼 꾸몄다. 하지만 커피 전문점이 미래의 사무실로 변모하면서 고용 트렌드에 우려스러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스타벅스에 자리한 사람들 중 일부는 부자이거나 점차 부를 쌓아가고 있었지만 돌아갈 일자리가 사라지는 이들도 갈수록 많아졌다. 글로벌 자본 시장 내 실리콘밸리의 가치는 대부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서 나왔고,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란 새로운 고용 모델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새로운 고용 모델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기술발전은 늘 컴퓨터가 제조업무를 자동화한다는 전제하에 일어났다. 1975년에 이미 해리 브레이버먼은 펀치카드가 생산업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 어떻게 생산 노동자를 강철 못지않게 숫자도 많이 다뤄야 하는 기술자로 변모시켰는지 적었다. 미국 제조업 성장률은 기술발달에 힘입어 급증하기는커녕, 값비싼 컴퓨터 장비로 인해 오히려 떨어졌다. “2000년 무렵, 비즈니스 부문 컴퓨터 중 76.6%가 소매 및 서비스 기업에서 사용됐지만 해당 경제 부문은 생산성 증가와 별 관련이 없었다”고 학자 프레드 터너는 적었다.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노동 당국은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대신, 그간 노동자에게 돌아갔던 보상을 상사, 관리자 및 주주들에게 몰아주는 데 뛰어났다.


기술기업들은 ‘비용을 절감하거나’ ‘가상’으로 존재하며 최대한 많은 업무를 아웃소싱했다. 제조업에서 이는 솔렉트론과 플렉스트로닉스, 그리고 타이완에 본사를 둔 폭스콘 등의 국내 계약업체에 하청 주는 것을 의미했다. 쓰리콤과 시스코 같은 인터네트워킹 기업은 이 같은 방식을 통해 단말기 판매 수익을 그대로 거두면서도 소프트웨어 기업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지적 재산을 제외한 모든 걸 아웃소싱하는 순수 아이디어 기업이야말로 이들이 꿈꾸는 이상이었다. HP 같은 대기업은 노동운동이 미약한 데 힘입어 제조 인프라의 대부분을 하청업체에 매각한 뒤 그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IBM은 한술 더 떠서 위탁 제조기업 셀레스티카를 1997년에 분할 설립했다.


커피와 코카인은 베이 지역 기술환경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제3세계 경제가 소모품 수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왔고, 여러 가격대에서 점점 더 많이 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을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이애미, 로스앤젤레스, 뉴욕에 이어 실리콘밸리는 미국 코카인 광풍의 네 번째 지역이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미국 연방정부기관과 코카인 업계의 밀접한 관계 덕분에 이 기간 동안 국제 코카인 거래량이 증가했다.


1980년대 코카인의 도매가격은 급격히 하락한 반면 순수가격은 상승했다. 팔로알토는 이 약에 괴짜 같은 매력을 부여했다. 실리콘밸리의 업계 거물들은 그들의 사무실이나 남편들이 함께 모여 아내를 무시한 채 컴퓨터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하우스 파티에서 코카인을 즐겼다. 코카인은 그 화려함과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밸리에서는 모든 것이 일을 밀어붙이기 위한 것이었다. 코카인은 꿈을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꿈은 환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꿈을 쫓았다. 코카인은 그들을 경주에 계속 참여하게 했다. 그 시대는 “작업장에서 훔친 깨끗한 실리콘 웨이퍼로 만든 코카인 거울로 완성된, 그들만의 하얀 눈보라”라고 묘사된다. 이 약물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 비즈니스 모델과 이상할 만큼 과잉된 열정, 미국 최고의 이혼율을 설명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어주었다.


인터네트워킹 회사들이 미국인들이 신뢰하는 매끄럽고 멋진 웹사이트를 추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코드로 만든 것처럼, 기술업계는 클린룸 엔지니어의 완벽한 작업으로 매우 수상한 비즈니스 관행을 제시했다. 당국도 이를 확신했고, 산호세 경찰서는 도둑을 잡기 위한 잠복 작전으로 결국 전자 기술자들을 잡는 데 성공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80년대 초 경찰은 비밀리에 자체 바를 열고 도난품을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일반적인 보석 등이 들어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보석 대신 디스크 드라이브와 마이크로칩을 얻었다. 기술회사 직원들은 장비를 훔쳐 고물상이나 중고 컴퓨터 상인에게 팔아 코카인 대금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실에서는 금선 같은 귀중한 재료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간혹 스파이가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거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리콘밸리가 장려하는 문화 안에서 사업을 하는 데 따르는 대가일 뿐이었다. 유명 기업의 관리자들은 코더들에게는 코카인을, 조립라인의 직원들에게는 저렴한 필로폰을 나눠주는 등 직원들에게 마약을 권했다. 정확성보다는 속도가 더 중요했고 부품의 고장률이 높았다. 별거 아니었다. 마진이 너무 크면 그냥 무료 교체품을 보내면 된다. 애초에 진정한 품질관리를 구현하는 것보다 더 저렴했다.



2000~2020

B2K

현실 세계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시가총액 1조 달러가 넘는 기업은 전 세계에 여섯 군데가 있다. 그중 국영 석유 독점기업 사우디 아람코를 제외하면 남은 다섯 곳은 모두 미국 서부 해안의 기술기업으로 바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하는 다른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이들은 20세기의 마지막 분기, 혹은 21세기의 첫 분기에 등장한 젊은 기업이다. 하나같이 창업자가 처음 설립한 회사인 데다 졸업 후 처음 근무한 일자리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본이 일찌감치 선택한 커리어 승자들이다. 이 다섯 회사는 모두 팔로알토 시스템과 잘 맞아떨어지며 그중 세 군데는 심지어 팔로알토 인근에 위치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업은 빌 게이츠가 여전히 시애틀 교외에서 무자비 한 전술 및 운영체제 독점으로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다. 오라클과 어도비도 잘해왔지만 PC소프트웨어로 돈을 버는 데 있어서는 게이츠와 그의 팀을 따를 자가 없었다. 구글과 페이스북의 스크레이퍼들은 웹, 검색 및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발견했고 전 세계 광고산업을 가혹하게 규율해 순식간에 미디어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 회사들이 시장에서 거둬들인 수익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생산보다 광고, 경쟁보다 독점, 노동보다 자본의 승리를 상징한다. 특히 투자자금이 생산량 확대에 따른 손실을 피하면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미래형 도박 아이템에 몰리면서 이들의 가치는 급등했다. 고전적 계급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악당이 되기에 좋은 시기였고 새로운 기술 지배자들은 티셔츠를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 이들은 자축할 명분이 충분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단시간에 그토록 높은 지위까지 오른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아마존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며 이는 이 비즈니스가 실패했어야 하는 이유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러나 2000년대의 성공은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허울 좋은 진보의 교리 아래 상생의 원칙을 실행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대신 아마존의 수익은 사람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데서 나왔다. 인간인 근로자를 추적하는 로봇 시스템은 자동화 기술에 대한 투자와 성공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더 들어가면 근로자와 소유주 간 이해관계를 제대로 드러내는 장치다. 아마존은 부유한 소비자를 타깃으로 성장했고, 완전한 통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였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의 본보기가 되었다. 노조가 계약협상을 시작하면 끊임없는 혼란을 야기하는 헤지펀드 모델을 적용할 수가 없다. 아마존의 소유주들은 권력을 공유하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으며, 아마존의 주식은 특정기술보다는 자본가들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베팅한 것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투자자본을 미국 서부 해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같은 베팅이며 지금도 아니 미래에도 계속 성과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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