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국도 못 끓이는 콩나물 대가리가 뭐 그리 대수라고!
공연 전 악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음악단장이 급하게 악보를 찾아 헤맨다. 공중전화 부스에 놔두고 왔나? 퍼뜩 생각이 든 단장은 청소 아줌마를 찾는다. 구원처럼 만난 청소 아줌마에게 다급하게 악보의 행방을 묻는 단장. 청소 아줌마는 “콩나물 그림 말잉교?” 하고 답한다. 주섬주섬 꺼내 든 악보 뭉치를 낚아채 부리나케 뛰어가는 단장의 어깨너머로 청소 아줌마가 외친다. “국도 못 끓이는 콩나물 대가리가 뭐 그리 대수라고!”
저자는 유쾌한 문장 속에 음악가의 고달픈 현실과 음악에의 사랑을 담는다.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는 이러한 특징이 잘 담겨 있는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진 비유인 콩나물 음표와 악보를 소중하게 안고 뛰어가는 음악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 아줌마의 일화가 재미있고 애달프게 느껴지는 챕터이다.
콩나물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악단이 악당으로 변해버린 사연, 성악가의 실수에 관객이 외친 한마디, 아버지 합창단의 일화 등 무대 위와 아래에서 음악가들이 겪은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더불어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해 몇 십 년간 자신의 통장 하나 개설하지 못한 악장, 생업과 악단의 생활을 번갈아 반복하며 음악을 이어나가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부조리에 맞서는 시간강사 작곡가 등 동료 음악가들이 걸어가는 고달프고 다양한 음악의 길을 풀어놓는다.
나를 적시고 간 노래, 에세이적 비평의 시작
오늘날 음악비평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규범적이어서 수용자 대중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공감이 즐겨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저자는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를 통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에세이적 비평, 혹은 비평적 에세이를 선보이고, 이전과 다른 음악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고자 한다. _〈서문〉 중에서
저자는 음악가의 생활과 일화뿐 아니라 자신이 공감하고 영향을 받은 노래들의 단상을 엮었다. 1970년도 유행했던 CM송 〈부라보콘〉을 들으며 큰형이 처음 사주었던 아이스크림 속 도회지의 맛을 느끼고,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절대 부르지 않았던 〈점이〉를 들으며 마음 따뜻했던 군대 선임을 떠올린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들 속에서 저자는 엄밀하고 딱딱한 음악 비평에서 벗어나 보다 개인적이고 말랑말랑한 에세이적 비평을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청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음악회의 ‘여전한’ 형식과 내용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건전한 음악문화의 모색을 촉구한다.
음악가들의 삶과 일화, 노래와 음악문화에 대한 단상이 담긴 김창욱의 음악에세이는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며 독자를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 저자 김창욱
1966년 부산 강서 출생
동아대학교 대학원 음악문화학과 졸업(음악학박사)
한국연구재단(한국학술진흥재단 후신) 신진연구인력지원사업 대상자 선정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부산발전연구원, 5·18기념재단 공모논문 선정
한국음악사학회 신인논문상 수상
부산음악협회 부산음악상 수상
경성대, 계명대, 동아대, 동의대, 부경대 강사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음악과민족』(음악과현실 전신) 편집팀장
부산예술단체총연합회 『예술부산』 편집위원
국제신문·부산일보 객원평론가
부산광역시의회 정책연구위원(문화·관광분야)
현재, 전문예술단체 음악풍경 대표
저작으로 『부산음악의 지평』, 『나는 이렇게 들었다』, 『청중의 발견』, 『홍난파 음악연구』(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음
■ 차례
서문
제1장 일기
생활의 즐거움
유치원에서
휴가 안 가세요
49재에 가서
살맛
통 큰 큰형님
20년 후
이런 음악회
놀토음악회
수상쩍은 일기
찾아가는 음악회
성철이라는 사람
제2장 음악의 날개
지휘자 양반, 다리 좀 치워주시오!
인기 악기와 비인기 악기
악당의 출현
목사님의 금일봉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
성악가의 실수
묘약의 효과
그날 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한 자유예술가를 추억함
어떤 야외음악회
산새, ‘응새’되어 날다
어느 시간강사 이야기
어느 대학교수 이야기
어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어느 레슨선생 이야기
어느 악장 이야기
어느 합창단 이야기
어느 음악교사 이야기
오페라에서 생긴 일
어느 음악학자 이야기
어느 악기제작자 이야기
청중의 풍경
어느 성악가의 술이야기
어느 기타리스트 이야기
어느 지휘자 이야기
어느 만학도 이야기
제3장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나이도 어린데
예써, 아이 캔 부기
저 타는 불길을 보라
플랜더스의 개
소녀의 기도
명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점이
에버그린
서른 즈음에
검은 장갑
사랑의 서약
오! 거룩한 밤
귀에 익은 그대 음성
티벳 자비송
은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부라보콘
즐거운 나의 집
졸업식 노래
편지
원티드
나 홀로 길을 가네
오빠는 풍각쟁이야
사쿠라
그네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
제1장 일기
20년 후
대학 동기모임에 나갔다. 졸업 후 꼭 20년 만이다. 가벼운 긴장감과 설렘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해맑던 선남선녀의 모습은 다들 어떻게 변했을까? 바이올린을 켜던 얼짱 처녀는 잔주름이, 내 사랑의 고백에 단박 딱지를 놓은 그 피아니스트 처자는 나올까, 안 나올까?
한때 청춘남녀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옛날의 부끄러움과 수줍음은 깡그리 사라졌다. 대신 약간의 서먹함과 어색함이 주위를 감돌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클라리넷을 불던 영이는 지역 프로악단의 어엿한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경아는 대학교수와 결혼하고 똑똑한 아이 둘 낳아 중국 유학까지 시켰단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차츰 고요가 찾아왔다. 누구는 피아노학원을 접고 피자가게를 열었단다. 누구는 이혼의 위기와 아픔을 말했고 백혈병으로 어린아이를 잃은 또 누구는 한동안 참척(慘慽)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결코 짧지 않았던 20년 세월 속에 묻어둔 지난날의 희로애락, 결단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시간, 20년 후 돌이켜 그리워할 오늘의 희로애락.
놀토음악회
얼마 전부터 나는 을숙도문화회관이 주최하는 노는 토요일 ‘놀토’ 음악회 ‘토요뮤직점프’의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에서 향긋한 음악의 아침을 여는 이 공연에는 사하구에 사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주로 온다.
나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되도록 대중적인 애니메이션 음악, 동요와 가곡, 영화와 뮤지컬 음악 등을 레퍼토리로 준비한다. 그리고 좀 더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전속 해설자 및 편곡자,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앙상블 ‘가마’를 만들었다. 덩치는 작지만, 이로써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음악이든!’ 수용자 대중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연주 때마다 소공연장 240여 석이 빼곡히 들어차고, 자리가 모자라 입석으로도 입장하지 못하고 모처럼 옮긴 어려운 걸음을 되돌리는 손님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제 700여 석의 대공연장으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다. 제한된 지원금으로 아무리 쪼개도 연주자들에게 돌아가는 노력의 대가가 턱없이 부족하다. 청컨대 관장님, 구청장님, 그리고 구의원님들! 풀뿌리 지역문화를 위해 ‘화끈하게’ 한 번 투자하시면 안 될까요?
성철이라는 사람
밤 12시가 다 돼서 전화벨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들었다. 인코리안심포니의 악장 겸 실질적 단장인 정성철 씨였다. 의논할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 좀 만나고 싶다는 거였다. 그는 대연동에서 하단까지 한달음에 뛰어왔고, 새벽녘까지 장장 수삼 시간에 걸쳐 상의했다. 말이 상의였지, 실상 그는 자신의 고민과 푸념만 늘어놓았다. 그가 살아온 음악적 역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잠자코 듣고 앉았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96년, 그는 연주자들을 끌어 모아 앙상블을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연습실 임차료와 관리비는 물론, 적잖은 연주비 경비 일체를 책임졌다. 단원들에게 소액의 연주료를 지급하면서 카드대출과 사채 빚도 늘어났다. 연습실은 단전, 단수되기 일쑤였고 비치된 악기에는 늘 차압 딱지가 즐겨 붙었다.
10년 후 악단은 사단법인 인코리안심포니로 거듭 났다. 그렇지만 그의 책임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벌이인 개인 레슨에 하루 10시간 이상 꼬박 매달려도 아직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빚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했다. 문화의 시대니, 메세나 운동이니 말은 많지만, 여전히 그의 악단과는 인연이 멀어 보인다. 그래서 아직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없는 사람, 바로 정성철.
제2장 음악의 날개
악당의 출현
1978년 3월, 신라대 유호석 교수의 주도로 창단된 부산관현악단은 지난 2003년 11월 제50회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25년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단은 그동안 매년 빠짐없이 두 차례의 정기공연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통해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 협연무대를 제공하는가 하면, 재부 작곡가들의 신작은 초연함으로써 지역 창작음악 활성화에도 이바지한바 적지 않다.
아마도 10년은 지난 일이리라. 부산관현악단의 연주회가 열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7시 30분의 본연주를 위한 리허설. 모두들 제자리를 잡고 튜닝을 끝냈다. 이윽고 지휘자가 등장했다. 다시없을 최종 연습이기에 지휘자는 물론 단원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리허설에 임했고, 협연자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마침내 총 연습은 깔끔하게 갈무리되었다. 파이팅을 외친 연주자들은 악기를 챙겨 각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단원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그가 가리킨 곳은 무대 위에 설치된 현수막이었다.
‘부산관현악당OO연주회’
그리고 그 아래에는 는 조금 작은 글씨로 ‘출현: OOO OOO OOO’이 쓰여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당일 시민회관 무대에 ‘악당’이 ‘출현’하는 셈이었다. 연주자들은 낄낄거리고, 지휘자는 “누가 이따위 장난을 친 거냐?‘며 담당자인 장극태 총무를 불러 타박했다.
당시에 현수막은 업체에서 페인트 통을 들고 사람이 나와 내용을 직접 붓으로 써서 만들었다. 제작비도 오늘날 7∼8만 원 정도에 비해 당시는 20만 원이 넘었다. 적잖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남포동 제작업체에 부랴부랴 연락을 취했다. 핸드폰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부득이 공중전화통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업체 전화는 신호음만 울릴 뿐 응답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간판을 내린 총무는 떨리는 손으로 글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흰색을 덧칠하기도 하고 검은색 싸인펜으로 글자형을 약간 바꾸기도 했다. 곧 연주가 시작되었고 총무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객선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대로의 눈속임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글씨는 여전히 ’악당‘의 ’출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악단 총무는 민간 오케스트라의 운명과 닮아 있다. 늘 바쁜 것도, 늘 할 일이 많은 것도, 늘 욕을 먹는 것도, 늘 굶주리는 것도 닮았다. 그러면서 끝내 음악을 버릴 줄 모르는 것까지도 그 둘은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다.
잃어버린 ‘콩나물’을 찾아서
10년 전쯤의 일이리라. 여고생 트로트 가수 출신으로, 특히 ‘천방지축’이라는 사투리 가요로 인기를 끌었던 문희옥이 경주 현대호텔에서 디너콘서트를 가졌다. 반주는 가까운 부산의 6인조 그룹 ‘양우석 악단’이 맡았다.
문희옥의 간드러진 노랫가락에 연신 흡족해버려, 악단은 한낮의 리허설을 모두 끝냈다. 이제 본 공연시간을 느긋이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7시가 되려면 아직 두어 시간이나 남았다. 단원들은 일찌감치 저녁을 먹었다. 담배도 피고 커피도 마시며 잡담도 했다.
시간은 어느 새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일말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들 무대로 향했고, 각자 포지션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어, 내 악보 어디 갔지?“ 베이스 기타가 소리쳤다.
”내 악보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연주자들의 보면대에는 하나같이 악보가 놓여 있지 않았다. 이제 본 공연이 채 20분도 남지 않았다.
”아까 단장님이 챙겼잖아요?“ 키보드의 목소리였다. 그랬다. 평소 제 악보도 제대로 간수 못하던 베이스 기타가 염려되어 단장이 아예 악보를 모두 걷어 서류봉투에 넣었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급한 통화를 위해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고, 악보 뭉치를 거기에 둔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채 곧바로 저녁을 먹으로 갔던 것이다.
단장은 뒤도 돌아다볼 새도 없이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내달았다. 하지만 웬걸, 그곳에는 악보 뭉치는커녕 종이조각 하나 없었다. 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의 불안감은 이제 공포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쓰레기통이란 통은 모조리, 그리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땀으로 뒤범벅된 전신에 연방 땀방울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악보 뭉치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다.
바로 그때, 문득 섬광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청소 아줌마를 만나야 한다!” 어렵사리 아줌마를 찾은 그는 악보 뭉치의 대강을 설명했다.
’아줌마, 제발 나 좀 살려 주소. 혹시 이런 거 못 봤능교?“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호흡은 가빴다.
”콩나물 그림 말잉교?“
그렇게 말한 아줌마가 드디어 자신의 쓰레기통에서 꺼내 든 것은, 아, 그것은 바로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맸던 악보 뭉치가 아니던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목에 메어 왔다.
아줌마의 손아귀에서 덥석 빼앗은 악보 뭉치를 그는 행여나 놓칠세라 가슴 속에 꼬옥 품었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냉큼 돌아서서 무대로 내달렸다. 그때 어깨너머로 아줌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국도 못 끓이는 콩나물 대기리가 뭐 그리 대수라고!“
어느 대학교수 이야기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 밤잠을 깨우고 / 돌아누웠나…“
지난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부산대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라는 노래다. 서정적인 가사에 다양한 음악적 변화가 돋보이는 이 곡은 당대와 후대의 젊은 층 사이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는 ‘썰물’에 밀려 차츰 익명화되었기 때문이다. 동아대 음악문화학과 교수 박철홍은 오늘날 적어도 부산에서 ‘실용음악계의 대부’로 통한다. 26년 동안 줄곧 현실사회가 요청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제공해왔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어느 분야나 그러하듯, 명망가의 심중에는 으레 남모르는 설움과 아픔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1971년 그는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고교시절 이미 그룹사운드에서 음악의 꿈을 키웠으나, 가난한 현실이 그를 그 길로 내몰았다. 1980년 혼례를 치른 그는 불현듯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최소한의 생계비는 벌어야 하므로 기타학원을 열고, YMCA 기타교실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은 거의 없었다. 방학 때 몇몇 학생 손님들이 겨우 기타를 배우러 오는 정도였다. 이제 생계비는커녕 자신의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서 그는 83년부터 3년간 하야리아부대의 교회에 나가 성가대원으로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그래도 한 끼 정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난과 궁핍은 계속되었다. 연극동네에 적잖은 음악을 만들어주었으나, 그 동네 역시 가난했던 터에 거의 무일푼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 까닭에 문현동 산동네 사글세방에는 아이가 앓고, 쌀통은 즐겨 비어 있었다. 한겨울 새끼줄에 매단 연탄 두 장을 들고 휘청휘청 귀가하던 모습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도 볕은 들었다. 1989년 MBC 다큐음악 ‘갈대’로 대한민국 방송대상, 90년대 전국연극제 출품작 ‘칠산리’의 음악상을 받으면서 그는 폭증하는 음악수요에 시달릴 정도였다. 더구나 40대 중반의 늦깎이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흔히 말하듯 그는 체계적인 정규 음악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역정은 고진감래라는 아포리즘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제3장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나이도 어린데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할 만한 나이가 아니에요.
나는 아직 당신과 둘이서만 외출할 수 있는 나이가 못 되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그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그날 나의 모든 사랑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이탈리아 가수 질리올라 칭게티(Gigliola Cinquetti, 1947∼)가 노래한 ‘나이도 어린데(Non Ho L’Eta)’는 마리오 판제리(Mario Panzeri)가 쓴 가사에 니콜라 살레르노(Nicola Salerno)가 선율을 얹었다. 열여섯 살짜리 칭게티의 산레모 가요제 데뷔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녀는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나이가 어렸으니까.
순수의 시대, 내가 고등학교 때인 80년대만 해도 그랬다. 여학생을 만나거나, 이성과 터놓고 얘기 나눈다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기껏, 여고 학예제에 가서 그림이나 시화를 구경하는 정도였다고 할까?
그 무렵 나는 토요일마다 열리는 불교학생회에 입회해 버렸다. 거기에는 시내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했는데, 내 또래 여고 2학년생도 많았다. 그 가운데 수려한 미모가 빛나는 여학생이 없지 않았다. 특히 B여상의 이모 양과 H여고 황모 양은 가히 군계일학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힐끔힐끔 눈길 주지 않는 남학생이 없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남학생들은 이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내숭만 떨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사에서 3천 배, 즉 절을 3천 번이나 하는 행사가 열렸다. 다리가 아파 오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조차 닦을 새도 없었다. 실로 고통의 바다였다. 그러나 남학생들은 누구 하나 도중에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그럴 수 없었다. 우리 뒤쪽에는 여학생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고, 그중에 군계일학이 나의 뒷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렸으니까.
명태
벌써 겨울이 왔나 보다. 간밤에 바람소리가 사방 천지에 요란하더니, 아침나절 추위도 만만찮다. 뉴스에서는 올가을 들어 제일 추운 날이란다. 이런 날에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공기밥과 뜨거운 국물이다. 아니면 밥과 명태와 감치를 한데 넣어 부글부글 끓인 명태국밥도 제격이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변훈 작곡의 ‘명태’다. 어느 겨울,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얼큰하게 기운이 오른 바리톤 친구가 불러준 노래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헛,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그는 ”쇠주를 마실 때‘에 이르러 ’카아~‘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화해 냈고, 마른 명태를 쫙쫙 찢어대는 시늉까지 완벽하게 연출했다. 여기에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준 포장마차 아줌마는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관객이었다.
나는 지난 주 어느 시민강좌의 강사로 나섰다. 거기서 ’명태‘를 소개했는데, 그 반향은 예상과 달리, 매우 열광적이었다.
한국전쟁 시기였던 1952년 부산에서 발표된 ’명태‘는 지금도 그다지 익숙한 양식의 노래가 아니다. 익살스런 자유시를 노랫말로 선택한 점, 부가화음으로 3화음의 정형성을 탈피하려 한 점, 일관작곡(一貫作曲) 형식에, 말하듯이 노래하는 기법인 파를란테(parlante)와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옮겨갈 때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기법 포르타(portamento)를 씀으로써 그 이전 홍난파, 현제명류의 선율적, 서정적 노래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노래가 처음 발표된 이튿날, 신문에는 이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글이 실렸다. 요지는 “이것도 노래냐?”였다.
모처럼 나섰던 시민강좌는, 비록 빈자리가 많았고 백발성성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오히려 내게는 새삼 용기가 샘솟았던 무대였다. 그분들은 내 이야기에 기꺼이 토끼 귀가 되어주었고, 어떤 분은 내 말을 노트에 빼곡히 받아쓰기도 했다. 더욱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질문 공세는 강의실 분위기를 한층 뜨겁게 달궜다.
덕분에 나는, “이것도 강의냐?”는 한 마디를 끝내 듣지 않았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강의료를 챙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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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