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속살

   
김가이
ǻ
냥이의야옹
   
15000
2021�� 12��



■ 책 소개


부산을 기억하는 가장 내밀한 시선
원주민, 여성,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부산 이야기

부산이라는 도시를 소개하는 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부산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얼마나 오래되고 독특한 명소(라 쓰고 맛집이라 읽는다)가 많은지를 나열식으로 제시하는 책들이었다. 그러나 김가이 작가의 에세이집 <도시의 속살>은 부산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부산의 도시 공간 이면에 적층된 여성, 노동, 지역의 기억과 정동들을 되살려낸다. “부산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내 친구들의 이야기는 요원했다”(6쪽)는 작가의 말이 그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저자 김가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결코 쉽게 써 내려갈 수 없었다고 했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저자를 말 그대로 구성하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예쁜 책들 사이에 나란히 두고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춰보게 하기 싫었다.”(7쪽) ‘로컬리티’라는 이름을 달고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많은 글들, 책들이 누군가에게는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자, 정체성 그 자체인 공간들을 너무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만든다. 아울러, 저자는 대체 부산이라는 도시의 ‘속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몹시 궁금해지기도 한다.

“중학교 때 깡통시장에서 산 헬로키티 샤프”(12쪽)를 23년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저자. 이 책이 들려주는 부산의 이야기들은 헬로키티 샤프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평생에 걸쳐 보고, 듣고, 간직해 온 것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쉬이 버려버릴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할지 몰라도, 저자에겐 결코 버리지 못하는 기억과 경험들이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부산처럼 깊은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필자가 써야 한다고 믿는다. 변화를 선호하고 유행에 열광하는 사람이 쓴 도시 이야기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도시의 속살’에 가 닿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부산 사람이 아니면 이 책에 공감하기 힘들 거라 했다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구체적인 장소는 달라도, 누구에게나 ‘도시의 기억’, ‘장소의 기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여성의 시선, 노동의 시선, 지역의 시선으로 부산이라는 도시를 재구성했듯이, 이 책을 읽은 독자 모두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각자 경험한 도시의 기억들을 재구성해보기 바란다. 글을 쓰는 것도 좋고, 사진을 남기는 것도 좋다. 언젠가는 수많은 ‘도시의 속살’들이 모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저자 김가이
장소에 대한 글을 써왔다. 아주 멀리 빛나는 도시들에서 굵직한 역사를 가진 고장을 거쳐 출근길 사소한 풍경까지 글로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는 영화관 노동자로 하루 종일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트위터 : https://twitter.com/BS_stateofmind

■ 차례
005 서문
008 목차

012 프롤로그

015 당감동 토박이
025 동양고무
032 신발요정
035 용사촌
041 마리포사
045 달콤한 것만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
051 깨비책방
053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
057 가이효과
060 동보서적
064 양산으로 간 친구들

068 완도여행
072 완도수목원
074 고베
076 통영
079 산업도시
082 남해
085 관광호텔
089 호텔 조식
091 미화당 예식장
093 데이비드 카퍼필드
097 88포장
099 유라리광장
102 건포도
106 구.남포문고
108 새벽시장 잔치국수

113 부산 어린이 대공원
117 솜사탕
119 성지곡 수원지
123 녹색정 약수터
126 호반의 벤치 Hobanuibenchi

130 Night Lights
132 저사양 쳇 베이커
133 재즈에 미치다
134 차에서 듣는 음악
137 여름의 맛
139 차 안의 피크닉
142 라디오
143 클래식 FM 92.7 MHZ
144 팟캐스트

149 버스 일기
158 도시의 손금
160 버스 정류소
164 100퍼센트의 쌀국수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165 잃어버린 천사들의 돈까스
167 간판들
169 여름의 전령, 열무국수
170 편의점
171 이튿날
172 출근길
174 무인주차장
178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181 뚝배기 불고기
183 이소라의 프로포즈
185 추석 풍경
187 오리지날의 맛
189 퇴사일기
193 도시를 간직하는 법

197 에필로그

 




도시의 속살

서문
부산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내 친구들의 이야기는 요원했다. 영화 속에서 부산은 사나이들의 가오를 지키려는 싸움의 배경으로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고, 라디오에서 들리는 자갈치 아지매의 이야기는 생생하게 톡 쏘았지만, 나의 화두는 아니었다.

그럼 내가 듣고 싶은 얘기는 뭘까. 잘 모르겠다. 나도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백 번 고민하고 내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평생 살아온 집, 주소, 가족…. 자기 서사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 드러내는 일이었다. 웃음과 감동을 편집하기 위해서는 신파와 폭력의 기록을 다 뒤져야만 했다.

나보고 이 책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누적되고 싶다고. 구 구 돌스의 가사처럼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너만은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한다고. 내가 누군가의 책을 보고 내 이야기를 해볼 마음을 먹은 것처럼.


당감동 토박이
유년 시절은 누구에게나 가장 기억이 남는 시기겠지만 당감동 토박이인 나에게는 이 동네의 흥망성쇠가 내 성장 과정과 겹치며 한 시기의 우울 삽화처럼 남아있다. 이 시기에 겪었던 일들이 이곳과 결합하여 감정으로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선생 중 하나는 당감동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우리더러 화장막 동네 산다고 맨날 혀를 내둘렀다. 시바꺼 사라진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 들을 만한 사람은 당감동 토박이인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당감동 화장터는 내가 태어날 무렵 사라져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 터에는 부산상고가 들어왔고 이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며 인문계 개성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나는 신라 시대부터 기록에 남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동평현의 지명을 딴 학교를 나왔고 백양산 맑은 정기를 받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선암사로 소풍을 12회 갔다. 당감동은 오래된 당집이 있어 기원한 지명이며 아직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내가 자랄 때 우리 동네는 신발공장이 많았는데 일하려는 사람은 더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통근버스로 길은 언제나 꽉 막혔었다. 어느 눈 오는 날 버스가 멈추자 진양고무가 있었던 진양 삼거리에서부터 당감동까지 출근하려는 사람들의 머리가 시커멓게 바글바글 올라왔다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식구들은 더 많아서 그 당시 주말이면 목욕탕에 자리도 없고 바가지도 없어서 엄마 없이 가면 한참을 눈치만 보다가 겨우 추운 문 앞에 한 자리 앉곤 했다. 그때쯤 당감동에 들어온 부산은행은 상상 이상으로 월급 저축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주식도 펀드도 없던 시절, 월급을 불리고자 계모임이 성행했고 맨 앞번호와 뒷번호의 이자율 폭은 엄청나게 컸다. 윗동네 빵집 새댁은 어느 날 곗돈을 들고튀었는데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

신발노동자들의 집에는 아이들도 많아서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오전 오후반이 있었고 학교 앞 문방구는 앞문, 뒷문 합해서 7개로 문구 춘추전국시대였다. 내가 문구류를 좋아하는 건 이때 형성된 취향인 것 같다. 시장에 가서 프로스펙스, 프로월드컵 이런 신발을 흔하게 사 신었다. 다 누구네 공장, 누구네 엄마 손을 거쳐 간 상품들이었다.

여러 번 이사하거나 주거 독립하는 것은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 잘 모른다. 한편으로는 한 동네에서 평생을 산다는 걸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는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흔히 독립하면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 동네가 원가족처럼 느껴져 아주 부끄러웠다가 애잔했다가 사무치기도 했다. 그렇게 이 동네가 지긋지긋했다.

나는 같은 집에서 30년이 넘게 살고 있으면서 이 동네 오만 꼴을 다 봤고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동네의 치부가 어디에 있는지 속속들이 알아 눈을 감아도 보이고, 외면하고 싶은 곳도 있다. 시간이 30년 전에서 멈춘 것 같은 곳도 있는데 아무리 레트로가 유행해도 이런 유행은 안 올 것 같다.

신발공장을 세우느라 급급해 길은 좁고 차도 인도 구분 없는 길이 대부분이다. 공장과 가까울수록 밀도는 갈수록 높았다. 좁은 면적 안에서 사람들이 오갔고 무릎 맞대듯 마주 보는 집들이 있었다. 눈을 감고 골목을 따라가면 곳곳에 친구 집의 구조와 부엌의 타일과 장롱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새 친구를 사귈 때마다 새로운 골목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골목길은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맥이 뛰는 곳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고 나는 매일 밤 여전히 집에 들어간다. 당감동 우리 집으로 돌아오면 뭘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꼼짝없이 인정하게 되는 시간은 밤마다 찾아왔다. 센텀시티에서 우리 집은 멀었고 돌아오는 길은 막혀서 지쳤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0년 만에 예전에 살던 집 근처 골목과 학교 주변을 걸었다. 납품 차들이 공장으로 오가느라 언제나 매연으로 가득했던 골목은 황량했다.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구. 당감4동 주민센터 버스 정류소. 한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당감4동 동사무소’ 근처라고 했다. 그러면 부산 사람들은 대충 어딘지 다 알았다.

당감 4동 주민센터는 몇 해 전 윗동네로 이전을 했고 그곳에 지금은 부산진구 생활문화센터가 오픈했다. 예전 주민센터를 허물었을 때 옆 건물 벽에 전화 국번 앞자리가 두 자리인 부동산 간판이 드러났다. 집 전화 국번이 6자리에서 7자리로, 앞자리가 804에서 894로 바뀌고 지금은 집 전화를 없앴다. 집 주소는 번지 통반이 두 번 바뀌고 새 주소로 바뀌었지만 실상 변한 것은 없는 우리 집. 장미의 이름이 이런 거랬나. 장미의 이름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변함이 없다고.

 
신발요정
어릴 때 읽은 동화에는 요정들이 나온다. 과로에 잠든 가련한 구두장이를 돕기 위해, 깜빡 잠든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눈 떠 보니 세상 멋진 구두가 있는 게 아닌가. 밤마다 요정은 왔고 가난한 구두장이는 부자가 된다. 신발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은 밤마다 요정이 오길 바라지 않았을까.

일을 해도 해도 많아서 집에도 신발이 넘쳤다. 우리 집은 가게를 해서 부업은 하지 않았는데, 어느 집에 가면 피혁을 바느질하느라 그 냄새가 났고 어느 집에는 고무창을 붙이느라 본드 냄새가 진동했다. 조금 큰 애들은 엄마를 돕기도 했다. 동네 평상에서도 보던 일들이다. 본드 냄새에 머리 아팠지만 어린아이들도 그런 걸로 인상 찌푸리면 안 된다고 아는 것 같고 그런 냄새는 왜인지 견디게 되었다. 삶의 무게가 섞인 냄새를 그때부터 알아갔다.

컨베이어벨트는 산업화의 상징처럼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던타임즈에도 나온 컨베이어벨트는 이곳 작은 공장에도 있었다. 신발 상자들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나왔다. 동네 길거리에는 자투리 합피, 깔창, 찢어진 박스 같은 것들이 먼지나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이 풍경이 지금은 어디서 진행 중일까. 꼭 이런 풍경은 아닐 것이다. 새 신발을 사면 상표를 꼭 뒤집어 제조국을 보면서 문득 그때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깨비책방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동네 책방에서 만화책을 가장 많이 본 사람 다섯 명 안에 드는 사람인데 그 사실을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부정당하고 증명하는 피로를 느꼈다. 책방에 누적된 내 스코어가 있는데도 믿어주지 않고 봤다. 허풍도 아닌데 대체로 첫마디는 “아니겠지”, “여자, 순정만화를 많이 봤겠지”라며 일단 깎아내리려고 했다.

순정만화를 많이 봤다는 것이 굴욕은 아니었다. 하지만 폄하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상대적으로 ‘남자만화’가 우월하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물론 그런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내 이력을,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참 힘들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누르고자 소위 ‘남자만화’들을 많이 봤다. 일단은 ‘여자만화’보다 양이 많아서 볼게 많았고 재미있는 것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척을 한 적도 많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남자들의 언어를 내면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스포츠에 인생을 거는 동안 코트에서 기도하는 여자들과 나를 동일시할 수 없었고 기업 사냥꾼들 사이에서 성적인 매력으로 유혹해서 성공을 거머쥐는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내가 만화책에서 처음 인지한 성차별 부조리 같은 것이었다.

역사와 기록이 그렇듯이 그 남자들의 무덤 같은 더미에서 드물게 빛나는 여자들은 신화의 전사로, 도시의 성숙한 개인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참 불우하고도 다행스러운 우리들의 유년기다.


동보서적
영광도서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곳이다. 아빠가 서면에 볼일이 있으면 어린 나도 함께 가서 옛 부산진구청에 내려 육교를 건너면서 이따금 군밤도 사주고, 영광도서에 들렀다. ‘YMCA가 추천하는 좋은 영화 100선’ 같은 책을 고른 적이 있었는데, 거기 있는 영화들을 차례대로 비디오로 빌려보기도 했다. 그런 영화를 고를 때마다 비디오 가게 아주머니는 나더러 수준 있다고 했고 우쭐함에 가슴 뻐렁쳤다.

동보서적은 서면에 마실 간다고 하면 롯데백화점과 쥬디스태화를 잇는 최고의 동선이었다. 유리문에 붙은 서점 행사 일정을 꼭 체크하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이곳에 오면 2/3층에 있던 화장실도 들리고 책 냄새도 맡으며 안정감을 취하기도 했다. 호기심과 취향이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며 이곳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책은 여기서 구경하고 정작 구매는 그 당시 새 시장이 열리던 인터넷 서점에서 매일 할인율을 체크하며 사 제꼈다. 그래서 오프라인 서점이 문을 닫게 된 게지.

그때 본 책이 내 인생의 책 절반을 넘고 그때 들은 음악이 내 인생의 음악 절반을 넘는다. 동보서적은 내 친구들과 약속장소이기도 했다. 롯데백화점 앞은 너무 광활하고 쥬디스태화 정문은 왠지 좀 물이 안 좋기도 하고 공중전화 앞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책을 읽으며 기다릴 수 있는 동보서적을 선호했다.

어느 해 동보서적은 사라졌고 그곳에서 추억이 진실로 애틋해서 상심이 컸다. 도시가 내게 준 상처 중 하나였다. 곧바로 SPA 브랜드 옷 가게가 화려하게 들어섰고 나는 온라인서점에서 20∼50% 할인하는 책들을 계속 사며 부채감을 안은 채 옷가게가 된 그곳에서 또 신나게 쇼핑해 제꼈다.


부산 어린이 대공원
나의 놀이공원 원형은 부산 어린이 대공원이다. 자유회관에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간 적이 있고 유치원 소풍 때 동물원 벤치에서 빵과 주스를 먹던 기억이 있다. 원숭이 똥 냄새가 가장 고약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부산 동부교육청 관할 초중고생이라면 봄가을 소풍은 필수로 가는 어린이 대공원이다. 스무 살이 넘어 먼 곳에 사는 친구를 사귄 나는 그들이 그곳을 가본 적 없다고 하여 구경시켜주겠노라 라며 더운 여름에 억지로 끌고 간 적이 있다. 한 시간 동안 한 명도 타지 않아 머릿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구에 멋쩍게 앉아 있는 사람들과 운행하는 사람들은 녹슨 기계 밖에 나와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찾아갔을 때는 유원지로 올라가는 길에 ‘힘내라 800미터’, ‘다 왔다 300미터’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놀이기구는 하나도 없는 푸른 잔디밭의 공원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영화에서 예쁜 동산이나 울창한 산을 깔아뭉개고 짓는 콘크리트나 철골 건물들에 대한 이미지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약간은 상처였다.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적인 유원지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산책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녹색공원이 더 필요하긴 했다.

그날 나는 위치로만 기억하는 하늘 자전거, 귀신의 집, 청룡 열차, 다람쥐통을 예전처럼 거닐어 보았다. 예전의 놀이동산의 BIG 3, BIG 5로 표를 끊으며 다니던 그때의 시간을 해롭지 않을 낭만으로 추억하고 또 그리워할 것이다.


성지곡 수원지
그 숱하게 갔던 어린이대공원 소풍을 앞둔 전날, 선생님은 이번 소풍에서는 삼림욕을 할 거라고 하셨다. 피곤을 모르던 나이이기도 했지만 삼림욕이라는 말은 참 생소했다. 나무에서 피톤치드라는 것이 나와서 몸을 좋게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피톤치드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정 같은 이미지로 상상을 했다. 삼림욕장이라는 말도 해수욕장처럼 어린아이들에게 기대감을 주었고.

다음날 어린이대공원의 놀이동산과 삼림욕장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삼림욕장을 갔다. 생각해보면 백양산 소풍 매너리즘에서 탈피하고자 그냥 6학년이 되어 조금 더 멀리 가는 것이었다. 다리는 아팠지만 삼림욕장에 대한 기대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큰 나무들이 많은 곳에 가더니 선생님은 아~를 연발하시며 좋지 않냐며 숨 많이 쉬라고 하셨다.

나무에 손바닥을 문질러서 맡았을 때는 그저 젖은 톱밥 나무 연필심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이게 뭐람…. 그때는 그 냄새 귀한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밤이 되면 내가 사는 당감동에는 산 냄새가 차갑게 가라앉아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그걸 누군가는 수련회 냄새라고도 했다. 그 뒤로 피톤치드는 신소재처럼 순식간에 두루마리 휴지, 방향제, 목침 등 생활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효능 진위 여부를 떠나.

그리고 20대가 되어 다시 찾은 성지곡 삼림욕장은 비 그친 여름날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으로 가기는 처음이었다. 그날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 나무 냄새, 풀 냄새는 자발적 운동의 보상인 것 마냥 더없이 상쾌했다. 찾아보니 그런 날이 일 년 중 가장 삼림욕하기 좋은 날이라고 한다.

그 뒤로 비가 내린 직후, 특히 여름의 시원한 비가 그치고 나면 산으로 가서 풀 냄새, 흙 냄새를 맡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장마철 산에 갔다가 안개까지 만나면 횡재한 기분이다. 산의 열을 식히며 나는 수증기처럼 안개는 요동치고 얇은 여름옷을 축축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면 나 역시 샤워를 마친 후처럼 촉촉하고 개운해져서 나왔다.

더 나이가 들면 전국 유명 온천에 찾아다니듯 명산의 삼림욕을 하는 경험을 모으고 싶다. 조금씩 다를 그 시간과 계절을 냄새로 외우며 말이다. 어쩌면 어른이 되고 맡을 일이 없는 젖은 톱밥 냄새나 나무 연필심 냄새 같은 것이 추억으로 남아 계속 발길을 요청하는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나를 작가라고 불러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선배들이 있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역에 지면이 없다고 했다. 서울의 지면은 좀처럼 지방과 나누지 않았다. 서울에도 작가들은 넘치기 때문이겠지.

매체도 지면도 독자도 부족한 지역에서 치열하게 글쓰기 모임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혼자 처절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본 몇 편의 글은 솔직하고 울림이 있고 멋진 톤을 갖고 있었다. 지금 서점에 있는 어느 책보다 좋은 글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역에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수줍고 겸손했으며 노력했다.

나는 그런 작가들이야 말로 서울에서 글을 썼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서울을 상정하는 듯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내 글은 부산 사람이 아니면 공감하기 힘들 거라고도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를 평범하게 쓰고 싶다고 하면서 이 책을 쓰는 와중에도 누가 이런 걸 읽을까, 이런 건 읽을 가치가 있을까 수십 번 의심하고 비하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용기를 낸 것은 나도 당신과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글에 장소와 일상이 깃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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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