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부활한 조선통신사

   
강남주
ǻ
미디어줌
   
15000
2022�� 09��



■ 책 소개


400년을 넘어 운명처럼 마주한 조선통신사
20년 여정의 소중한 기록

학자이자 교수, 조사연구가로서 일본과 부산을 오가던 강남주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가 우연히 인생 후반전을 완전히 바꿀 귀인(貴人)을 만나며 조선통신사 역사 부활의 20년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은 역사를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하고, 실천을 위한 작은 날갯짓이 얼마나 큰 태풍을 일으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문화자원 발굴을 위한 적극성과 소명 의식을 품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걸어온 국내 조선통신사 선구자들이다. 이들은 조선통신사 문화사업을 다방면으로 확장하고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국격을 드높이는 전통 행사를 펼치며, 종국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성공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2002년 여름, 한일 공동 주최 월드컵 축구대회 축하행사가 400년의 세월을 압축하며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이 작은 행사가 조선통신사 부활의 기폭제가 됐다. 비록 그 출발은 미미했으나 성과는 눈부셨고 조선통신사 바로 알기의 텃밭이 되었다. 그 현장에는 우연하게도 내가 서 있었다. 행운이었다.

■ 저자 강남주
경남 하동 출생, 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부경대학교 교수, 총장을 역임했다. 동북아문화학회장, 조선통신사학회장,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공동등재 한국 측 학술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쓰시마 국제교류 자문대사 칭호를 받았다. 한국 문학을 사랑해 은퇴 후에는 틈틈이 시를 쓰고 있으며, 장·단편 소설들을 책으로 펴내 주목받기도 했다. 조선통신사 부활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소상히 남김으로써 한일 우호관계의 상징이자 교육자료로서 조선통신사 등재물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고자 한다.

■ 차례
Intro
- 저자의 말
- 책을 펴내며
- 축사

1부 조선통신사 400년 만에 부활하다
뜻밖에도 외국에서 만난 조선통신사
쓰시마에서 처음 본 조선통신사 행렬재현
조선통신사에 새롭게 눈뜨다
불씨를 살려낸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축구대회
조선통신사 행렬재현 위원회 설치로 정례화
정중하면서 화려했던 본격적인 행렬 재현
국제도시 부산항이 조선통신사 행사로 들썩
일본 행사 실행을 위해 두 도시를 방문하다
요란한 취타대를 선두로 통신 3사 일본을 누비다
조선통신사들 숨결 여기저기에 배이다
경계인 60년의 할머니들에게 고국 방문의 길 열어주다

2부 조선통신사 여정 따라 동경으로 향하다
해신제 끝내고 일본에 이르면 환영 인파가 길을 가득 메우고
호수 같은 바다 지나 산도 돌고 강도 건너
오사카의 가장 큰 절이 사행원들의 숙소가 되고
지식에 반하고 묵향에 취하고
다시 에도를 향한 긴 행렬 이어지다
기록유산의 보고인 세이켄지에 들르다
드디어 도쿄 복판에서 영(令)기 휘날린 행렬

3부 조선통신사 세계무대에 서다
연구실적도 없는데도 조선통신사 학회장 되다
현창회 탄생 산파와 사업회의 일몰, 재생
부산문화재단 출범과 다양한 활동들
조직 통합과 세계의 중심 미국 진출
세계의 중심 뉴욕 중심가는 인산인해 CBS는 현장 방송중계도
고전무용과 B-boy가 다이내믹 부산 과시

4부 조선통신사 세계유산으로 인정받다
동아줄 같았던 인연에 묶여 끊지 못했던 조선통신사 사업
공동등재를 위해 거듭된 합동회의
등재 대상 확정작업 서로 이견도 드러나
세계적 문화유산 등극 위해 드디어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
파리 한복판에 펼쳐진 조선통신사 인형 행렬
단잠을 깨운 심야의 전화벨 소리
활발했던 한일교류행사에 등장한 장애물
등재 추진 관계자들만의 축하 행사 참가를 끝으로

 




부산에서 부활한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 400년 만에 부활하다

뜻밖에도 외국에서 만난 조선통신사

1994년 초봄이었다. 그때 나는 방문교수 자격으로 일본 후쿠오카대학 국제교류센터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5월 초쯤이었던가? 이 대학 상학부 대학원생인 고재훈 군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저는 요즘 해운회사 사장님 한 분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이 교수님께 인사도 드릴 겸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대주해운 주식회사 마츠바라 가즈유키 사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그는 대뜸,


“강 선생, 나는 요즘 일본 전국을 하나로 맺는 조선통신사연고지협회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꿈입니다. 요즘 같은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조선통신사 정신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어떤 일을 했기에 일본 사람이 조선통신사 정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틈이 날 때면 이런저런 조선통신사 관계 책을 조금씩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내용은 조선통신사에 맹목이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조선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일본천하를 통일하는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가뭄이 잦았고 역병도 돌았다. 1604년 사명대사가 혈혈단신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이 전쟁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 선조는 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사행원 504명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 사절단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왕래한 첫 사절단이었다. 1624년 정립을 세 번째 정사로 파견했던 때부터는 사절단 명칭을 ‘통신사’로 불렀다. 종전의 확인과 함께 상호 신뢰의 바탕이 다져졌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불씨를 살려낸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축구대회

2000년, 나는 부경대학교 2대 총장에 취임했다. 부경대학교는 1996년 부산수산대학과 부산공업대학이 우리나라 최초로 통합을 이룬 대규모 국립종합대학이었다. 예산과 인사, 연구정책 수립과 서로 충돌하는 두 대학교수 간의 의견조정 등 해결해야 할 난제를 나는 전임 총장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셈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하루는 부산 시내 기관장 회의에 참석했다. 부산 시내 47개 기관장이 모여 부산의 여러 문제도 협의하고 기관장끼리의 상호협조와 친목도 다지는 식사 모임 정도로 생각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몇 번 나가지 않았던 때다. 기관장회 회장이 인사 이동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 자격이 자동 소멸됐다고 했다. 다음 회장으로 느닷없이 나를 지목했다. 나는 팔자에 없는 부산시 기관장회 회장이 되고 말았다.


2000년 겨울이 아니면 다음 해 이른 봄쯤인 것 같다. 회원은 안상영 부산시장, 여당의 부산시장 위원장인 유흥수 의원, 시내 일간 신문사 김상훈 사장, 그리고 회장인 나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2002년 부산에서 열리는 한일 월드컵 대회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화제로 올랐다. 부산을 널리 알리고, 한일 간의 우호도 증진할 수 있는 식전 행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유흥수 의원이 돌연 이런 말을 끄집어냈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부산에서 해보면 어때요?”


안 시장이 당장에 내가 중심이 되어 그 행사를 한번 추진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행사를 실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전혀 까막눈이었다. 시장을 포함한 우리 네 명은 그 주 토요일 아침 쓰시마로 향했다.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니 우리의 방문 연락을 받은 후지가미 키요시 이즈하라 정장과 다치바나 아쯔시 조역, 마츠바라 가증유키 사장이 부두까지 나와 우리를 영접했다. 우리는 이즈하라 정장실에서 쓰시마의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행사는 다른 목적으로 설치된 부산 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에 진행이 넘겨졌다. 여름철 부산바다축제행사를 수년간 실시한 경험이 있는 조직이었다. 기획과 행사 진행은 바다축제 조직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연극인 김경화 씨가 맡았다. 그는 연극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에도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다축제 행사는 예정대로 광안리 해수욕장 바닷가에서 열렸다. 이때 조선통신사 행렬재현도 곁들여 첫발을 뗐다. 2001년 8월 1일의 일이었던 것 같다.



조선통신사 여정 따라 동경으로 향하다

해신제 끝내고 일본에 이르면 환영 인파가 길을 가득 메우고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행사의 보폭을 넓혔다. 2005년 단체 이름이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로 바뀌면서 더욱 그랬다. 그러면서 일본의 수도 동경을 향해 수순대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한양을 출발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대한해협을 건너야 하는 긴 여정의 이동을 시작했다. 중간 여러 곳에서 휴식도 취했다. 일본을 향한 첫 출발지 부산에 이르면 바다를 건너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줄 선물도 준비하고 물까지도 넉넉하게 사행선에 실었다.


출발의 날이 가까워지면 영가대에서 해신제가 열린다. 특별한 제단을 마련하고 올리는 엄숙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조선통신사가 험한 바다를 건널 때의 안녕을 해신에게 빈다.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는 이 행사가 원형에서 변형괸 것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기록 조사와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쳤다. 원형 복원에 아무리 집중해도 제수음식은 당장에 구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사슴 육포와 같은 것이다. 논의 끝에 사슴 육포 자리를 비워 두기보다는 소고기 육포를 대신으로 써서라도 그 자리를 채우기로 했다.


출발 일시는 택일로 정했다. 날씨가 나쁘면 출발은 늦추어진다. 날씨가 좋아져 출발을 해도 대한해협을 건널 때는 바다 한복판이 일렁이거나 파도가 드셌다. 1763년, 그해에는 유달리 사고가 많았다. 힘겹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가 눈앞이었을 때 느닷없이 돌풍을 만났다. 화물선 창고를 둘러보던 선장이 무너지는 화물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상륙해서 치료를 했으나 결국 숨지고 만 끔찍한 일도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의 재발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외교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까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본 땅에 상륙한 사행원들은 비로소 사경을 넘은 보람과 평화의 소중함을 뼈가 저리게 느꼈다. 행렬이 시작되면 환영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들에게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는 것이 별천지를 구경하는 것이나 같았다. 일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화려하고 긴 행렬이 눈앞을 지나가는 모습은 마냥 시기했다. 특이한 복장으로 북을 치고, 나각을 불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드디어 도쿄 복판에서 영기 휘날린 행렬

2005년, 우리도 한일교류행사를 위해 도쿄까지 갔었다. 국내 여기저기서 다발적으로 전개되는 행사 참여의 일정을 쪼개고 무리를 해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도쿄 복판에서 한일 친선교류의 모범적인 행사를 치르기로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일본 측과 합의를 통해 에도, 현재는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마침내 조선통신사가 행렬을 재현하게 된 것이다.


행사가 시작되는 10월 8일. 날이 밝아올 무렵, 행렬을 담당한 허장수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밖에 비가 오고 있어 오늘 행렬재현은 어려울 것 같다는 청천벽력같은 연락이었다. 온힘을 다해 100명이 넘는 참가자를 인속하고 도쿄까지 왔는데 비가 오다니...


긴급히 후속 대책을 세웠다. 원래 계획했던 부대행사인 한일 문화교류 행사를 빈틈이 없게, 그리고 더 치밀하게 실내에서 진행하자는 것이 내용이었다. 오후 무렵, 실내 행사는 한국 교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신주쿠의 문화회관에서 아무 이상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한국 춤, 사물놀이, 한일 복식 패션쇼 등이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관객들도 감동의 박수를 쏟아냈다. 그러나 행렬재현을 할 수 없었던 반쪽 행사에 아쉬운 감정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열망했던 도쿄 입성은 드디어 실현됐다. 우리는 2008년 10월 25일 도쿄의 중심지에서 열리는 ‘니혼바시 교바시 축제’ 행사에 국제 퍼레이드 팀으로 초청됐다. 행렬재현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도쿄에서도 가장 중심가, 그 넓은 니혼바시와 교바시를 연결하는 거리 복판을 선도기가 앞서고 일본 무사가 옛날 복장 그대로 행렬의 앞에서 길을 열었다. 400년 전의 원형 그대로였다. 취타대 뒤에는 ‘조선통신사’라고 한자로 쓴 횡액판을 들고 가는 사람이 이 행렬이 무슨 행렬인지를 알렸다. 도쿄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진풍경이었다.



조선통신사 세계무대에 서다

조직 통합과 세계의 중심 미국 진출

조선통신사 행사는 오직 부산에서만 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외국과의 정례적인 역사문화교류 행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의 대표적 문화기관인 부산문화재단이 주체가 되어 이런 특색 있는 행사를 국제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은 바람직해 보였다. 그래서 생각해냈던 것이 부산문화재단과의 조직 통합이었다. 2010년 사단법인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는 없어지고 그 업무는 부산문화재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부산문화재단에는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팀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추가되었다.


그동안 나는 늘 조선통신사 행렬재현 행사는 일본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적으로 그 무대를 더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행사가 단지 한국과 일본만의 행사가 아니라 세계인이 주목할 수 있는 평화행사의 본이 되게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우선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 진출을 모색했다. 그러나 막막했다.


먼저 미국 안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로스앤젤레스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현지에서는 한국인들의 호응부터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뒤에 이 일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세계의 복판 뉴욕에 진출하는 길을 모색해봐도 좋을 성 싶었다. 궁리 끝에 한국의 한 일간지 미주판의 로스앤젤레스 지사장을 찾아내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행사 개요와 이 행사가 갖는 의미, 취지 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이 일에 상당히 흥미를 갖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 신문사 한국 본사에서 현지 방송국을 개국하는데, 현지 미주판 사원들이 모두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 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이번에는 뉴욕을 노크해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뉴욕 한인회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생뚱맞게도 그곳 한인회 회장에게 직접 이 일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나 들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하용화 한인회 회장과 통화가 이뤄졌다. 그에게 조선통신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행사 내용도 설명했다. 그는 친절하게 내 말을 다 들어줬다. 그리고 쉽게 알아들었다. 가을이면 언제나 ‘코리안 위크’ 행사가 크게 열린다고 했다.


그해 8월 중순이었던가, 말이었던가, 그쯤인 것 같다. 한인회에서 연락이 왔다. 하 회장이 나를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의 구체화를 위해 실무자들끼리도 만나서 실행 방법을 상세히 논의했으면 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세계의 중심 뉴욕 중심가는 인산인해 CBS는 현장 방송중계도

드디어 행사 날인 10월 2일이 왔다. 쾌청은 아니었지만 행사하기에는 걱정 없는 날이었다. 안심했다. 뉴욕 맨해튼의 중심가 브로드웨이는 토요일이 되면 더욱 북적거리는 거리가 된다. 그런데도 그 넓은 중심도로가 오전에 이미 교통이 차단됐다. 코리안 퍼레이드와 스트리트 페스티벌을 위해서 뉴욕시가 특별히 결정해준 통행제한 시간인데 날씨가 나빠 행렬을 중지해야 한다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출발 준비를 위해 정사의 관복 차림, 사물놀이패들의 복장 갖추기, 무용단 분장, 거기에다 일본 무사 복장을 하기 위해 모두가 합류한 가운데 뉴욕 일본 총영사관 직원들까지 뒤섞여 행사 준비장은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이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자 행렬 팀은 출발 순서대로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교민들은 행렬의 뒤쪽에서 한복 차림으로 행렬에 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맨 앞에는 부산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다이내믹 부산(Dynamic Busan)이라고 길게 쓴 플래카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넓게 펼쳐졌다. 그 뒤에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조선 사절단이 간다는 것을 알리는 각종 기(旗)를 비롯, 색색의 깃발들이 뉴욕 한복판에서 펄럭거렸다. 출발 시간이 되자 금관조복에 수염을 길게 단 정사 차림의 허남식 부산시장이 옥패를 들고 정사 가마에 올랐다.


이런 규모의 행렬은 뉴요커들에게는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자 이국적 분위기까지 물씬 풍기는 광경이었다. 행렬의 이쪽저쪽에 사람들이 몰려 수군거리기도 하고 손짓을 하며 서로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낮 12시, 행렬이 출발하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CBS방송과 CNN방송이 우리 행렬의 출발을 중계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조선통신사 세계유산으로 인정받다

세계적 문화유산 등극 위해 드디어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

2016년 2월 하순에 우리는 문화재청을 방문, 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 등재 목적과 내용, 의미 등을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도 일본의 문무성과 외무성을 방문, 등재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유네스코 운영지원금을 가장 많이 내고 있는 국가이기에 정부차원의 관심도 크게 끌어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국보’라는 명칭까지도 ‘국가문화유산’으로 바꿀 것을 검토하면서 세계에 우리 문화 ‘유산’의 우수성을 내보이려고 하던 차였다. 그렇다면 한일 두 나라가 공동으로 조선통신사 기록유산을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게 된다면, 국내의 문화재산뿐 아니라 두 나라가 공유하는 세계의 문화재산이 되는 셈이다.


등재를 위한 마무리 손질을 하면서도 등재가 이루어졌을 때 이 문화유산들이 과연 세계 평화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로 인해 이문화 상호인식과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물꼬를 틀 수는 있을 것인가, 가치 있는 정신문화유산의 소유국으로서 세계 속에서 이 기록물이 지적재산과 관광자원의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한일 간 상호 신뢰와 공존의 기틀 마련에 도움이 될 것인가 등등을 되짚어 봤다.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을 거치고 신청서 인쇄와 등재 신청 서류를 유네스코에 접수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 절차는 우리 측 사무국장과 일본측의 사무국장이 서로 협력해서 수순을 밟기로 했다. 드디어 2016년 3월 30일, 박승환 사무국장과 일본에서 건너온 아비루 마사오미 사무국장이 함께 부산중앙우체국을 찾아 이 신청서를 국제 등기우편으로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보냈다.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공동으로 움직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단잠을 깨운 심야의 전화벨 소리

박승환 사무국장이 어느 날 나에게 전화를 했다.


“유네스코 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는 예감은 완전히 빗나갔다. 등재 신청서의 내용 일부를 보완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요청 내용은 ▶조선통신사 문화교류의 정치적 배경 ▶통신사 외교체재가 유지된 과정과 유지가 필요했던 요인이었다. 일본에게도 같은 질문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혹시 등재를 거절하기 위한 명분 쌓기는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우리는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본과 즉각 협의를 했다.


답변서를 보낸 뒤 유네스코 본부에서 다른 질문은 없었다. 2017년 7월 상반기에 발표가 있을 것 같다는 확인 안 된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7월이 가고 가을이 오는데도 등재 소식은 감감했다. 파리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부도 이 문제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대놓고 발표를 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9월도 휙 지나가고 10월도 끝 무렵에 이르렀다.


그러던 10월 31일 새벽, 한잠이 들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1시가 좀 지나서였다. 서일본신문 다케스구 기자의 목소리였다. 첫마디에 “선생님 축하합니다.”라고 했다. 잠이 확 달아났다. 파리에 있는 일본 유네스코 대표부에서 알려진 소식인데 오늘 등록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그는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에 확정 소식이 발표됐다는 내용도 전했다. 나는 마치 그가 결정권자가 되기나 하는 듯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참 되풀이했다.


부산문화재단에서는 오전 일찍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도자료를 통해 부산에서도 이제 세계기록유산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일본 역시 추진위원회 사무국이 있는 쓰시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문, 방송과 통신 등을 통해 이 소식을 일본 국내에 널리 알렸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등재 추진위원회와 학술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은 자연스럽게 일몰을 맞았다. 학술위원장이었던 나 역시 등재가 이루어지기까지 맡았던 그 역할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었다.


그동안의 일들에 감회가 깊었다. 조선통신사에 백면서생인 내가 우연한 기회에 조선통신사와 인연을 맺고, 20년이 넘도록 관심을 이어오게 되었으며 결국 조선통신사들이 남겨놓은 값진 기록물을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가치매김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 지속적인 보호까지 받게 되었으니, 어찌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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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