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

   
전주홍
ǻ
지상의책(갈매나무)
   
21000
2025�� 08��



■ 책 소개


질병 극복에 도전해온 인류는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책은 질병을 해석하는 ‘관점’의 변화에 따라 어떤 치료법이 탄생하고 또 폐기되어 왔는지, 나아가 의학이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어떤 지식의 축적 과정을 거쳤는지를 꼼꼼하게 짚는다. 르네상스 시대, 신이 아닌 인간 고유의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원근법’의 등장이 해부병리학, 곧 근대 의학을 탄생시킨 배경이나,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암호’와 ‘정보’를 해독하려는 열망이 개인맞춤의학 탄생을 이끈 경위 등, 의학 지식 변천사가 역사와 철학, 예술과 맞물리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역사를 톺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의학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의학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떤 비판적 질문들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 로봇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고 챗GPT가 환자 데이터를 분석하는 등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과학적/기술적 발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지 판단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기에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식의 본질을 사유하며 더 나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울림이 클 수밖에 없다.

■ 저자 전주홍
저자 전주홍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분자생리학자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교수로 분자생리학 연구실을 운영한다. 호기심과 교차적 아이디어를 혁신적 과학 연구의 씨앗이자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창이라고 믿는다. 과학은 끝없는 질문을 던지며 낯선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정신의 모험이자, 그 경계를 확장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의학과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어떤 과학자를 길러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다. 과학자는 논문을 집필하는 ‘작가’이자 논문을 비평하는 ‘독자’, 세계를 분해하는 ‘탐구자’,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예술가’, 그리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토론자’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가 묻고 생명과학이 답하다’, ‘과학하는 마음’, ‘논문이라는 창으로 본 과학’ 등을 집필했으며, 현재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며 “해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견뎌낼 용기”

1. 신의 노여움으로서의 질병 : 신화적 혹은 종교적 질병관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을까?
숭배와 지배 사이, ‘의술의 신’은 어디서 출현했는가?
미신적 치료에는 어떤 효험이 있었을까?

2. 자연적 원인에 따른 질병 : 체액설은 어떻게 건강과 세계를 설명해내었나?
지식은 언제부터 축적되어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나?
체액 불균형이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근거는 무엇인가?
대학의 등장은 의학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3. 특정 장소에 놓이게 된 질병 : 몸 내부를 들여다본 인간은 무엇을 발견했나?
인간은 왜 해부를 시도하고 장기에 주목했을까?
예술가는 어쩌다 근대 의학을 열어젖혔나?
해부학과 병리학은 어떻게 결합해 의학 발전을 주도했는가?

4. 분자가 좌우하는 질병 : 보이지 않는 존재로 생명과 질병을 어디까지 밝혀내었나?
과학에서 ‘측정’과 ‘실험’은 어떤 의미일까?
분자생물학은 얼마나 획기적으로 질병현상을 추적하는가?
분자의학의 발전이 왜 치료의 혁신일까?

5. 정보가 말해주는 질병 : 인공지능 혁명은 의생명과학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암호 해독 기술은 유전자의 비밀을 어디까지 밝혀냈나?
개인별 차이가 질병 치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정밀의학 시대, 우리에겐 어떤 비판적 고민이 필요할까?

나가며 의학의 에피스테메 접근과 테크네 접근 사이에서
미주

 




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


신의 노여움으로서의 질병 : 신화적 혹은 종교적 질병관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종,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조직을 잘 유지하려면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규율과 신념을 공유해야 합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이 중요하겠지요. 인류는 뇌가 발달했고 음성 언어를 사용했기에 머릿속 상상이나 추상적인 주제도 어렵지 않게 개념화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갖추었기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공유할 수도 있었지요. 언어와 스토리텔링이라는 도구가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아주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야기는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사회와 세계를 더 잘 설명하도록 해줍니다. 이야기에서 정보를 얻고 결합하면서 서로를 향한 의존도를 높이고 사회적 협력 관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때로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 허구와 과장을 섞어서 이야기를 더 매력적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심히 남의 이야기를 살피지만, 어떤 이야기는 상당히 그럴듯해서 허구를 진짜로 믿기도 합니다. 동족포식을 뜻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나 사후 세계와 관련된 의식은 아주 오래된 형태의 사례입니다. 특히 토템은 허구가 폭넓게 공유되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토템은 고대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적 결속을 다지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특정 집단과 동식물 사이의 관계는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으로써 연대를 강화하고 문화적 관습을 공유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나아가 토템의 숭배라는 스토리텔링은 고대 사회에서 신화와 종교가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상상력과 표현력이 더해지면서 원시 예술이 탄생하자 숭배 의식과 문화는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허구를 창조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미지의 대상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큰 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허구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오류에 취약한 우리 사고 체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많은 시간과 인지적 노력이 드는 논리적 사고보다 빠르고 노력이 크게 들지 않는 직관적 사고에 우선적으로 의존합니다. 어디서든 시시각각 위험이 도사리던 구석기 인류에게는 편향에 빠질 위험이 크더라도 신속한 대응을 이끄는 직관적 사고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홍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나 전염병 같은 큰 재앙은 본능이나 경험에 의존하여 쉽게 회피할 수 없으므로 신화적/종교적 설명이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겠지요. 특히 질병의 경우 고통이 크면 클수록, 피해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신이나 정령의 노여움에 따른 징벌로 보는 관점이 더욱 위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크게 아프면 흔히 벌을 받는다고 여기며 뭔가 잘못한 게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반성하곤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비록 비합리적이긴 해도 사회 구성원들이 윤리적 규범을 따르도록 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선한 기능이 있었으며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화에서 전염병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신화는 인간의 경험을 초자연적 존재로 설명하는 스토리텔링의 전통적 사례입니다. 특히 신화는 인간 심리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고대 사회의 인식을 가늠하는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을 인식하는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신의 분노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고대 사회의 믿음은 다양한 문명의 신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넘어져서 다치거나 짐승에게 물려 외상이 생기거나 증상이 가벼운 경우와 달리 증상이 심한데 질병의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 않을 때, 신화적 혹은 종교적 관점은 더욱 유용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은 때로 보이지 않는 귀신이나 악령이 몸속에 침입해서 병을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즉, 귀신이나 악령을 질병을 유발하는 실체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전염병을 향한 두려움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d)’는 아폴론이 분노하여 그리스 연합군 진영에 역병을 일으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트로이 원정을 지휘한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Agamemnon)은 트로이 동맹 도시들을 파괴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가멤논은 아폴론 신전의 사제 크리세스(Chryses)의 딸 크리세이스(Chryseis)를 전리품으로 삼았고, 크리세스는 아가멤논을 찾아가 몸값을 후하게 치를 테니 크리세이스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크리세스를 위협하며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심한 모욕감을 느낀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복수를 청하는 기도를 간절히 올렸습니다. 아폴론은 사제의 명예를 지키고자 9일 동안 그리스 군대에 역병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그리스군 병사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죽어나갔지요. 예언가 칼카스(Calchas)가 아폴론이 분노한 이유를 설명하자 아가멤논은 어쩔 수 없이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냈고 역병은 즉시 멈추었습니다.


신화나 성경에서 질병은 인간의 불경과 오만에 따른 신의 심판과 징벌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신은 지도자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혼란과 재앙에 빠뜨리는 응징 방식을 흔히 취합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신에게 부여받은 신성한 권력을 마냥 행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신의 뜻을 끊임없이 받들려고 노력해야 백성에게 인정받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적/종교적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본다는 말은 사회적 공포에 단순히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서 도덕적 규범과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적 원인에 따른 질병 : 체액설은 어떻게 건강과 세계를 설명해내었나?

지식은 언제부터 축적되어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나?

문자의 발명,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뒤흔들다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지식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지식은 주술적이거나 마법적인 성격을 띠었겠지만, 기록의 시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형태는 동굴벽화입니다. 동굴벽화는 동물 같은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고 추출해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세계를 상징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터득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동굴벽화는 탁월한 관찰력과 상상력이 결부된 거대한 문화적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화를 남긴 정확한 동기는 알기 어렵지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조작하고자 한 당대 인류의 욕망과 미래를 향한 염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지식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히는 쓰기의 역사와 맞물립니다. 쓰기는 머릿속 생각을 상징기호로 옮기는 작업으로 음성 언어에 대응하는 상징기호의 발명이 필요합니다. 찰나에 불과한 말하기와 달리 쓰기는 지식을 공간적으로 배치하고 오랜 기간 보존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이 되자 상징기호는 사회적 약속과 공유를 거치면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가 ‘목소리의 그림’이라고 부른 ‘문자’로 발전했습니다.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도시국가의 틀 속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생산경제와 무역이 발달하면서 기록을 향한 수요가 남달랐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문자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쐐기 문자, 이집트 문명의 상형 문자, 인더스 문명의 그림 문자, 황하 문명의 갑골 문자를 들 수 있는데, 사물의 모양을 본뜬 문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문자의 탄생과 발달은 야만적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로 이행하는 데 아주 큰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지식의 기록뿐만 아니라 수집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는 당시 서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었는데, 파피루스를 70만 권이나 보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듯 지식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자연을 길들이며 경험을 축적하는 일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지적 흐름의 변화 속에서 신화적/종교적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와 “의학의 독립 선언”

히포크라테스가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페르디카스 2세(Perdiccas 2)의 불치병을 치료한 일화는 환자에게 주목하고 증상을 관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줍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왕의 증상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생활 환경을 파악하고자 긴 대화를 나눈 끝에 왕이 사원의 여제사장을 향한 상사병 때문에 쇠약해졌음을 알아차렸습니다. 히포크라테스와 페르디카스 2세의 일화는 제대로 진단을 내리고 병의 경과를 예측하려면 증상을 잘 기록하고 환자를 둘러싼 환경을 꼼꼼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권유를 들은 왕은 제사장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한 후 삶의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사례는 질병을 초자연적인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환자의 증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자연적 원인을 탐구하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히포크라테스는 어떻게 당시의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질병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시가 번성했습니다. 이집트, 바빌로니아와 교역 및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신적 삶이 고무되고 일반 교양이 싹틀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지요. 부유한 경제 여건과 사회문화의 변화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관심과 열린 사고를 키우는 데 유리했고,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철학적 사유 체계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만물을 이루는 영원불변의 근원적 요소인 아르케(arche)나 세계가 움직이는 근본 법칙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스토리텔링과 상상력은 신에게 기대지 않고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도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를테면 피타고라스는 숫자를 자연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증명과 논리적 관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논리적으로 자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지적 쾌감이 주요 동기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관점의 전환은 우리 몸을 이해하려는 지적 활동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동물을 생체해부(vivisection)하여 인간 신체의 구조적 특징을 유추하고 기능을 탐색하려 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철학자 알크메온(Alcmaeon)은 동물을 해부하는 실험적 접근으로 해부학(anatomy)과 생리학(physiology)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 그는 뇌가 마음의 자리라는 생각에 다다랐고, 동맥과 정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알크메온의 저작은 전해진 것이 없지만 히포크라테스와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 같은 후대 의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질병의 개념 역시 초자연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자연적 원인으로 질병이 생긴다는 관점의 등장은 의학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러한 질병관의 대전환을 이끈 대표적인 의사가 바로 코스섬에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초자연적 존재나 신비한 힘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현상이라고 가르치면서 환자의 증상 관찰을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의학 흐름을 돌렸습니다. 인간 신체가 신에 의해 오염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에르빈 아커크네히트(Erwin Heinz Ackerknecht)는 이를 두고 “의학의 독립 선언”이라고 칭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에 관해 조금 더 살펴보자면, 그는 모든 사건이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한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그의 건강을 돌봐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 사모스, 에페소스, 밀레토스와 이집트 멤피스를 돌면서 철학과 의술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가 고대 그리스 의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역사(Historiae)’에 이집트 의학 체계가 언급된다는 점으로 알 수 있지요. 따라서 자연적 질병관은 경험과 지식의 축적, 세속 학문의 등장, 활발한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개인의 지적 열정이 더해져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장소에 놓이게 된 질병 : 몸 내부를 들여다본 인간은 무엇을 발견했나?

인간은 왜 해부를 시도하고 장기에 주목했을까?

인체 해부의 시작, 탈진실로부터의 해방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한 자연적 질병관은 의사가 신이나 악령이 아닌 환자의 몸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의학 체계에서 해부학적 지식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인체 해부가 금지되고 대부분의 장례가 화장으로 치러진 이유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체액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질병을 설명하고 치료법이 제안되었기 때문에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변화의 조짐은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연구를 장려하는 풍토와 개방적 분위기는 알렉산드리아가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이집트를 다스린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1 Soter)는 알렉산드리아에 당대 최고의 학술연구소 ‘무세이온(museion)’과 고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 ‘비블리오테카’를 세워 서양 학문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나아가 유클리드(Euclid)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같은 유명한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정적인 연구와 논쟁을 이끌면서 새로운 지적 흐름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지요.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과학적 의학이 발전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사형수의 인체 해부가 허용될 정도였지요. 공포심을 조장할 목적도 있었기에 죄수의 사체 해부가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인체 해부는 학술적 풍토, 통치자의 성향, 정치적 필요성 등이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해부학의 발전은 질병 이론의 발전이나 치료 기술의 진보와는 무관하게 호기심을 충족하고 경험적 성취를 이루려는 학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근법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유럽은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습니다. 흑사병의 참상으로 구원은 비참함을 통해서만 온다는 기독교적 믿음과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구의 3분의 1이 줄면서 생존자의 실질 임금이 크게 오르자 새로운 번영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부가 쌓이고 시장에 활기가 돌면서 학자와 장인이 만나 소통할 기회가 늘어났지요. 학자의 추상적 이론은 장인들이 전통 기술과 관습을 검토하고 향상하는 데 활용되었고 장인의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기술은 학자들이 전통적 이론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편 15세기 중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인쇄술을 개발하자 책값이 크게 떨어졌고, 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비교적 쉽게 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인쇄술은 지식이 지리적 장벽을 넘어 정확하고 빠르고 폭넓게 확산되고 전승되게끔 해주었고, 지식의 표준화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손으로 필사할 때마다 일어나는 저마다 다른 오류가 사라지고, 어느 장소에 있든 동일한 글을 읽고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무엇보다 인쇄술은 지적 권위를 비판하고 새로운 생각을 펼칠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인쇄술은 또한 개인적 경험과 지식이 공동의 경험과 지식으로 전환되는 일을 촉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의 상호작용도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했지요. 특히 서로 상반되는 사실들을 쉽게 알아차리도록 하거나, 끊임없는 사실 검증을 조장함으로써 진위를 판별할 사고와 방법의 고안을 자극했습니다. 이는 공통적 지식 기반의 확립과 비판적 공동체의 형성 및 성장을 안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인쇄술의 등장으로 출판 시장과 지식 공유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발견의 우선권을 다투는 일도, 지식이 공적으로 수용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격변의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도시가 번영하면서 도시국가가 출현했습니다. 새롭게 제도가 정비되고 시민문화가 형성되었지요.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토대 위에서 ‘위대했던 로마의 부흥’이라는 생각이 가속화되었고,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믿음이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도시국가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통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기에 궁정을 짓고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불러들여 군주를 위대하게 미화하는 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사회문화적 변화는 예술가들이 원근법을 활용하기 시작한 데서 잘 드러납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었지요. 원근법은 철저한 수학적 기하학적 계산으로 공간의 깊이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는 기법입니다. 이는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중세 세계관에서의 탈피를 보여줍니다. 원근법을 뜻하는 ‘perspective’는 ‘명확하게 본다(see clearly)’는 뜻의 라틴어 ‘perspicere’에서 유래하였는데,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를 ‘통하여 본다(see through)’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헬레니즘 예술가들의 위대한 성취와 노력에 주목하여 인체의 조화를 재현하려면 인체 내부와 외부 구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탈리아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동물의 뼈를 각각 분리하고, 그 위에 근육을 붙이고, 그 모든 것 위에 피부를 덮어라”라고 말하면서 인체 구조를 아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알베르티의 생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를 포함하여 많은 르네상스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이처럼 해부학을 향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관심은 심미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으나, 근대 해부학의 탄생과 의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스승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는 모든 제자에게 피부를 벗긴 시신을 관찰하도록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는 훌륭한 해부학자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인간의 나체 골격을 설계하고 힘줄, 신경, 뼈, 근육의 구조를 알 수 있다”라고 했고, 자신의 노트에 해부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신의 작품을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기록해 두기도 했습니다. 의학이 예술과 만나지 않았다면 복잡한 해부 구조를 생생하게 재현해내기 쉽지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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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