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마주하는 철학적 논의와 탐구의 길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왜 나는 이런 길을 가야 하는 걸까? 살다 보면 누구나 가끔씩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실감한다. 무시하자니 왠지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고, 그대로 믿자니 뭔가 속는 느낌이 든다. 정말로 정해진 운명의 길이 있을까? 있다면 왜 이런 길이 주어졌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전략가, 운명을 묻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당당하게 바라보려는 이들을 위해 쓰였다. 저자는 운명의 존재와 그 의미를 전략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동서양 철학자에서부터 세계 3대 종교, 운명을 예지하는 여러 기법들에 이르기까지 운명에 대한 다채로운 시각들을 조망하며, 20여 년 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결국 누구나 묻고 싶은 질문과 그 대답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저자 조철선
저자 조철선은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SK㈜, ㈜교보문고 기획실장을 거쳐 현재 ㈜전략시티 대표로 있다. 다사다난한 삶이 준 교훈을 가슴에 담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지혜를 전하기 위해 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 ‘경영 전략 실무의 바이블’로 불리는 『경영전략전문가 조철선의 기획 실무 노트』를 출간하는 등 전략전문가로서의 위상도 굳건히 하고 있다.
그 외 저서로는 『자본주의 붕괴의 서막』 『스노우볼 마켓 전략』 『2020 경제대국 한국의 탄생』 『게임의 룰을 깨는 역전의 법칙』 등이, 역서로는 『대가의 조언』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운명을 묻고, 또 묻다
1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1장.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들 : 점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알고 싶은 건 다가올 미래가 아니다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2장. 서양 철학에 운명을 묻다 : 플라톤_ 이데아와 에르 신화
에픽테토스_ 로고스의 섭리, 아파테이아
니체_ 니힐리즘의 끝, 아모르 파티
사르트르_ 운명은 인간의 손안에 있다
3장. 동양 철학에 운명을 묻다 : 공자_ 경천외명의 길
맹자_ 이인위미의 삶
노자_ 천망회회 소이불실
장자_ 허주, 그리고 안지약명
묵자_ 운명은 없다
4장. 세계 3대 종교에 운명을 묻다 : 기독교_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론
이슬람교_ 모든 게 알라의 뜻이다
불교_ 자작자수, 지은 바를 받는다
선각자들이 본 운명의 의미
2부. 운명을 예지하는 기법들
5장. 사주 명리학에 운명을 묻다 : 태어난 시간만으로 예측할 수 있다
문제는 사주팔자의 해석에 있다
사주팔자에 담긴 운명의 의미
사주팔자를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6장. 예언과 신점에 운명을 묻다 : 이미 정해진 미래를 훔쳐보다
믿기엔 너무 놀라운 예언의 세계
미신으로 취급받는 무속 신점
예언과 신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7장. 주역에 운명을 묻다 :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주역 64괘의 구성 원리
비괘와 태괘로 보는 주역 풀이
주역에 담긴 운명의 의미
3부. 운명의 길에서 찾은 해답
8장. 운명이 이끄는 목적에 집중하라 : 운명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법
정해진 운명의 목적을 찾아가는 여정
진정한 삶의 가치는 과정에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9장. 운명에 질질 끌려가지 마라 : 운명은 당신을 절대로 팽개치지 않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
운명이 이끄는 직업의 길
얽히고설킨 운명적인 인간관계
10장. 운명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라 : 운명을 받아들이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고 자기를 관조하라
올바른 실천만이 삶을 바꿀 수 있다
항상 깨어 있으라
맺음말. 운명을 받아들일 용기
저자 후기. 전략가, 운명의 벽 앞에 서다
참고 문헌
전략가, 운명을 묻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들
점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새해가 시작되면 으레 운세를 보러 점집을 방문합니다. 좋은 짝 만나 잘만 결혼하는 친구들보다 자꾸 뒤처지는 자신을 보면, 자연스레 점집으로 향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이들은 투표권자들이 아닌 용한 점쟁이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 운명의 길을 알기 위해 점집을 방문합니다.
완벽할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이기에,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다가올 미래는 늘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첨단 과학 기술이 세상을 이끄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운명 앞에 선 인간은 그저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에 휘둘리고 나면,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데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을까요? 누구는 찬란한 비단길인데, 자신만 험한 산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인내심과 끈기로 줄기차게 노력해 끝내 성공한 이들을 보면 운명이란 개척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 사례만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불운을 이기고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는 생존자 편향 오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더욱 가열차게 노력했음에도 실패한 이들은 보이지 않을 뿐이죠. 반면에 역량도 부족하고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음에도 대성공을 거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은 있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름을 바꾸면, 부적을 사고 굿을 한다면, 사는 집이나 조상 무덤을 옮기면, 성형 수술로 관상을 바꾸면, 책에 실린 조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운명이 아닙니다!
실패는 정성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패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노력은 사람의 몫이지만, 그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과감하게 맞서 싸워 자신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교과서적이고도 피상적인 충고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 경주에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역량이 부족해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역량에 맞게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노력이 합당한 보상으로 되돌아오진 않습니다. 크게 성공할 때도 있는 반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일이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때론 원하는 대로 성공했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실패자는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진정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결과의 실패가 반드시 과정의 실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절대로 노력이 부족하거나 정성이 없었다고 비난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동양 철학에 운명을 묻다
공자_ 경천외명의 길
도덕적 이상주의를 꿈꾸다
공자 철학의 핵심은 인에 있습니다. 공자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좌우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며 예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기복례로 표현하거나, 자신이 살기 위해 인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희생해 인을 이루어야 한다는 살신성인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공자는 인에 대해 여러 갈래로 말했지만, 결국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위하는 어진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공자의 천명 사상
공자에게도 하늘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근원이자, 인간의 운명을 비정하게 정하는 운명천運命天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하늘을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도덕천道德天으로도 자리매김함으로써, 하늘과 사람 간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했습니다. 즉, 하늘은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에게 덕이라는 보편적 품성을 부여했으며, 그 덕의 핵심이 바로 인이기에, 이를 실천하는 것만이 천명에 따라 사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하늘이 정한 운명의 길은 거부할 수 없기에, 자신에게 내린 도덕적 명령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만이 올바른 삶이라는 겁니다.
이렇듯 공자의 운명론은 천명을 깨닫는 지천명知天名에 핵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통찰에 다다른 공자는 모든 사물에 천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 역시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으므로, 오로지 천명에 순응하며 천명이 요구하는 올바른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자_ 천망회회 소이불실
노자의 도와 덕
노자에게 있어 도는 자재自在하는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시초로서, 저절로 그리되는 자연의 운행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는 유가의 도덕천처럼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선악을 구분하거나, 선을 편들고 악을 벌하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단지 자연의 이법理法으로, 의도한 바 없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킬 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
그렇다면 노자에게 운명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노자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듯이, 운명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모른다고만 했듯이 말입니다.
물론 《도덕경》에는 노자의 운명관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긴 합니다. 바로 천망회회 소이불실이 그것입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엉성한 것 같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는 의미로, 하늘의 이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이든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보일지라도, 실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흘러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이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에, 자신의 운명 역시 하늘이 정해준 길일 뿐입니다.
노자는 길흉화복 역시 사람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변화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이라고 싫어하고 복이라고 좋아하는 일차원적인 반응을 넘어, 다가오는 길흉화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묵자_ 운명은 없다
춘추전국 시대 유가와 비등할 정도로 세력을 과시했던 묵가는 정해진 운명은 없다는 비명론非命論을 주장했습니다.
묵자는 전국 시대 초기의 사상가로, 겸애兼愛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겸애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두루 사랑하자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 천하의 큰 이로움이 될 거라는 사상입니다.
아무튼 묵자는 이런 겸애 사상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천지론天志論을 주장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일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현실에서 겸애를 주장하려면 현실을 넘어선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하늘의 뜻이 겸애에 있으므로, 하늘의 뜻을 따르는 어진 사람이라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겸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겸애를 실천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묵자는 서로 이롭게 하자는 교상리를 내세웁니다. 즉,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이로움을 베푸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굶주린 자에겐 먹을 것을, 추운 자에겐 옷을, 일에 지친 자에겐 휴식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해진 운명을 거부한 비명론
그럼 묵자에게 운명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하늘의 뜻을 강조한 묵자이기에, 운명도 하늘의 뜻이라 여겼을까요?
묵자는 이런 운명론을 과감히 거부합니다. 만약 길흉화복이 하늘이 부여한 운명이라면, 다른 이들의 고난 역시 하늘의 뜻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활동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묵자는 하늘의 뜻은 겸애에 있지, 인간의 길흉화복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즉, 도가에서 말하는 도와 유사하게 묵자에게 하늘은 인간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진리 그 자체일 뿐이었습니다.
운명을 예지하는 기법들
사주 명리학에 운명을 묻다
태어난 시간만으로 예측할 수 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외로운 항해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낙관적인 희망을 품고 미래를 훔쳐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운명적인 미래를 예지하려는 기법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태어난 시간으로 운명을 예측하는 사주풀이에 친숙합니다.
전략가의 시선으로 본 대가들의 사주풀이
그렇다면 이들 대가들의 신통방통한 예지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들의 일화를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먼저 성공 사례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존 편향의 오류를 들 수 있습니다. 대가들이라고 항상 운명을 예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적으로 부산 박도사는 말년에 무리한 집 공사와 보증 실패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박도사에게 주어진 운명일 수 있겠지만, 운명을 예지할 수 있는 대가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대가들을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건 오로지 실패 사례는 무시하고 성공 사례에만 집중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후학들의 과대 포장 역시 한몫 했을 수 있습니다. 후학들로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스승의 능력을 과시해야 하죠. 그러려면 대중에게 회자될 만한 신통방통한 일화들을 부풀렸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운명 예지력은 모두 사기였을까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따릅니다. 그들의 수십 년간 행적과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지속적인 신뢰가 그 증거입니다. 과대 포장되었을 수는 있지만, 없던 일을 창작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모든 사주풀이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운명을 예측할 확률이 일반 역술가들보다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주팔자에 담긴 운명의 의미
사주 명리학을 깊이 파고들어 대가의 수준에 근접한다면, 운명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확률도 높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턱을 겨우 넘은 단계에서 저는 다르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명리학에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명리학이 던져준 철학적인 질문에 집중했습니다. 정말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저에게 주어진 운명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언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걸까요? 부귀빈천과 길흉화복 모두 이미 정해진 운명일까요? 사주 명리학은 이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100% 완벽하게 정해지진 않았지만, 70% 정도는 인생의 길이 정해져 있다고 말입니다.
명리학에선 태어난 시간에 우주에 가득 차 있던 음양오행 기운이 새 생명에게 전해져 운명이 설계된다고 말합니다. 즉, 사주팔자에 담긴 음양오행 기운과 살아가며 맞이하는 음양오행 기운이 상호 작용하며 인생 경로에 운명적인 환경을 조성합니다. 물론 살며 만나는 모든 일들을 정하는 게 아니라 운명적인 환경을 구축함을 의미하기에,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순 있지만 그리 큰 변화는 어렵다고 봅니다. 환경이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대부분 정해진 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아무리 더운 게 싫더라도 여름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운 좋게 그늘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열기를 식힐 수 있을지라도, 뜨거운 한여름은 한여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 바꿀 순 있겠지만, 한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 사람보다 편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결국 명리학은 사주팔자로 이미 운명은 정해졌다고 말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운명을 둘러싼 음양오행의 기운이 정해집니다. 그리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이, 음양오행 기운이 체계적으로 순환함으로써 정해진 운명의 길을 갑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남은 선택은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밖에 없습니다.
물론 숙명이라 체념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해진 운명의 시계에 맞춰 나쁠 시절엔 몸을 숙이고, 좋은 시절엔 적극적으로 나아감으로써 운명의 길을 제대로 가자는 의미입니다.
주역에 운명을 묻다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앞서도 말했듯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주역은 단순한 점술서가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역을 점술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주역을 단순히 미래 점을 치는 도구로만 활용하는 건 세상을 호령할 영웅을 일개 하급 관리로 쓰는 것과 같습니다. 초기 주역은 점술서였을지 몰라도 후대로 가며 많은 사람들이 동양 최고의 철학서로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역은 무엇을 말하고 있길래 공자에서부터 상대성 이론의 알버트 아인슈타인, 세계적인 심리학자 칼 융에 이르기까지 인류 최고 지성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을까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역의 핵심 주제는 변화입니다. 주역은 주나라의 역경易經이란 뜻으로, 변화의 경전을 의미합니다.
앞서 우주 삼라만상은 태극에서 분리된 음기와 양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며, 음양의 기운이 교차되며 끊임없이 순환적인 변화를 야기시킨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변한다는 법칙만이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음양의 원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우주 만물의 운행 법칙이기에, 변화의 이치를 제대로 알면 우주 만물의 섭리를 간파할 수 있다고 주역은 말합니다.
주역에 담긴 운명의 의미
주역이 바라보는 길흉화복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길운은 좋은 것이고, 흉운은 나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면, 주역에선 좋고 나쁨을 넘어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 중에 어느 계절이 좋고 어느 계절이 나쁘다 할 수 없듯이, 길흉의 운세 역시 음양 원리에 따르면 그저 변화하는 기운일 뿐입니다.
음기가 극에 달해야 양기가 생성되고, 양기가 극에 달해야 음기가 생성되기 시작합니다. 무더운 한여름의 열기가 가득 찬 뒤에야 서늘한 가을바람이 시작되고, 혹독한 한겨울의 추위가 휩쓸고 간 후에야 한줄기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운명의 기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흉운의 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면 길운이 트이기 시작합니다. 길운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흉운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주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즉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변화가 시작되고, 그 변화를 통해 통하는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주역에선 길흉화복을 운명에서 만나는 여러 상황 중의 하나로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그런 운명의 길을 가야 하느냐에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주역은 하늘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비추어 길흉화복을 바라보면, 주역이 의미하는 바는 명쾌하고도 분명합니다. 길흉화복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길운만이 좋고 흉운은 나쁘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활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픔만큼 성장한다고 했듯이, 오히려 흉운이 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운명의 길에서 찾은 해답
운명에 질질 끌려가지 마라
운명은 당신을 절대로 팽개치지 않는다
아무리 운명의 목적지가 자기완성으로 가는 성장에 있다 하더라도, 막상 되는 일 없이 힘든 나날이 계속되면 하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운명은 당신을 절대로 팽개치지 않습니다. 당신이 미워 흉운이라는 벌을 주고, 당신이 예뻐 길운이라는 선물을 주는 게 아닙니다. 고난과 좌절로 점철된 흉운도 당신이 성장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예정된 겁니다. 물론 계속해서 흉운만 찾아오면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아주 가끔씩 길운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운명은 당신이 마주하며 맞서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운명을 이기고, 운명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운명의 진정한 목적은 당신을 조롱하고 짓밟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운명은 언제나 당신 곁에서 있습니다. 때론 자애로운 어머니로, 때론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당신이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신기하게도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는 말이 있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면, 그만큼 자신의 그릇이 크다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어려운 난제들을 풀어야 하는 상급반이라고 여겨도 좋습니다. 참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자신에게 최적의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대로 주저앉을 것이냐, 아니면 자기 발전의 토대로 삼을 것이냐는 자기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을 제대로 간다면, 이전보다 확연히 성장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기나긴 수업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난과 좌절의 세월이라는 것은 역으로 자신이 보다 성장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니체도 가혹한 시련이야말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이라면, 결과는 하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남지 않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한 번 더 도전하겠다는 자세로 담담하게 내일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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