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데 안돼요

   
정연호
ǻ
지상사
   
14000
2015�� 02��



■ 책 소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믿기 어렵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논어에서 뽑아낸 치유심리 이야기

 

이 책은 상대성 심리학은 음양을 바탕으로 한 동양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 상대성이란 모든 것은 서로 짝지어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는데 이것을 심리적인 면에 적용한 것이 상대성 심리학이다. 자기 마음의 여러 생각들 중 상대적으로 더 큰 생각을 따라 행동과 감정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역으로 추적해 보면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속마음도 헤아려 볼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상대성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분명한 ‘하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행동은 하지 않으려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하려는 의도’보다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본다. 하지만 시야가 좁아져 있어서 스스로는 자신의 ‘하려는 의도’만 볼 수 있을 뿐 ‘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볼 수 없을 때, 그때 나오는 말이 바로 ‘아는데 안돼요’다. 이 책은 상대성 심리학으로 ‘아는데 안돼요’를 풀었다. 

 

■ 저자 정연호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한방병원 일반 수련의 수료 후, 제일한방병원(부산)에서 진료과장과 진료원장을 지냈다. 2006년 마음편한의원을 개원하고 현재까지 진료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1998년 동국대학교 국선도 단전호흡 동아리에서 수련을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연호 원장이 마음을 연구하는 2가지 단서는 ‘명상’과 ‘고전’이다. 특히 동양고전은 마음의 이치를 설명한 ‘심리학(心理學)의 뿌리’라며 그것을 현대의 언어로 마음병 치료에 쓸 수 있게 풀어내는 노력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동양고전 사서(四書)중 『대학』을 새롭게 해석한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 동양의 고전에서 치유심리를 뽑아내다』와 『강박증은 없다』가 있다.

 

■ 차례
책머리에
프롤로그

 

1장 무지無知의 무지
01 불신을 가르치는 부모
02 아는 것과 모르는 것
03 자기 파괴의 권리
04 몸 따로 마음 따로
 
2장 생각은 생각보다 믿기 어렵다
05 바뀌지 않은 이유
06 스스로는 애매하다 생각
07 후회하는 행동들
08 속마음을 아는 방법
 
3장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풀은 눕게 마련이야
09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방법
10 참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
11 지혜가 부족할 때의 실수
12 허물을 고치고 실수에서 배운다

 

에필로그




아는데 안돼요

무지無知의 무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오! 프시케

어느 나라에 왕과 왕비 그리고 세 공주가 살고 있었다. 세 공주 모두 아름다웠는데 막내 공주(프시케, Psyche)의 미모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막내 공주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에게나 바치던 찬사를 막내 공주에게 바쳤고, 그러다보니 아프로디테의 제단을 찾는 사람의 발길은 날이 갈수록 줄었고, 어느 날부터는 아무도 제단을 찾지 않았다. 프시케는 무지했고 교만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겸손의 지혜를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 언니의 교만을 보고 자랐기에 그녀도 교만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프로디테는 화가 났고 아들인 에로스(Eros, 큐피드)를 불렀다. “에로스. 격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저년에게 벌을 내려 이 어미의 마음을 풀어다오.”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프시케의 입술에는 쓴물 두어 방울을 떨어뜨리고 머리카락에는 달콤한 물을 뿌렸다. 프시케는 그 뒤로 아름다움을 칭송받는 것은 여전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도 청혼을 받지 못했다. “프시케는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없다. 프시케의 남편 될 사람은 산꼭대기에 있으며, 그는 신도 인간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괴물이다.” 프시케는 자신의 죄를 달게 받겠다며 그 산꼭대기로 갔다. [에로스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프시케에게 말했다.] “당신이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를 두려워하거나 존경할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관계가 아니오. 나는 신으로 존경을 받는 것보다 같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오.”


언니들이 말했다. “너 아폴론의 신탁을 잊지는 않았겠지? 너의 남편은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니. 등잔과 칼을 숨겨놓고 남편이 잠들거든 슬그머니 일어나 등잔을 켜서 확인해보렴. 만약 괴물이거든 머뭇거리지 말고 칼로 괴물의 목을 베고 도망쳐.” 프시케는 마음이 흔들렸고 결국 언니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등잔불에 비춰진 남편은 괴물이 아니라 신들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에로스였다. 에로스는 [잠에서 깨어] 실망한 눈으로 프시케를 노려보았다. “어리석은 프시케! 나는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너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믿지 못하고 언니들의 말을 따랐구나. 사랑은 의심과 함께할 수 없으니 너와는 헤어지는 것이 순리다.”


프시케는 방방곡곡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겸손과 순종으로 용서를 구했다. 비록 아프로디테가 과거의 노여움을 풀지 못한 채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내었지만 프시케는 받아들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프시케를 보며 에로스가 다시 마음을 열었고, 제우스와 아프로디테에게 둘의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결국 프시케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마시고 불사(不死)를 얻어 에로스와 영원한 부부로 맺어졌다. 그리고 기쁨(pleasure or bliss)을 상징하는 볼룹타스(Voluptas)라는 딸을 낳았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상대적인 균형

‘아는데 안돼요’라는 말은 그것에 대해 ‘아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 때,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부분’을 돌아보지 않을(못할) 때 하게 된다. ‘아는 것’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르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돌아볼 때 ‘아는 것’이 확충되며, ‘아는 것’이 확충되어 내 마음이 온통 ‘아는 것’으로 흘러넘칠 때 자연스러운 실천이 나온다. 모르는 것이 많을 때에도 실천을 못하는 것은 아니나 실천하기가 힘들고 어렵다.


“그것에 대해 알긴 알지만 마음 전체가 그것을 온전히 알지 못할 때에는 비록 아는 것 같아도 그것을 지켜 실천하기는 어렵다(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 『논어(論語)』공 선생님의 이 말씀은 마음 전체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상대적인 관계가 그것의 실천에 영향을 준다는 말씀이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허물이 없는 사람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보통이며, 배움의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현실에서 곤란을 겪으며 자신의 허물과 무지를 발견하고 그를 통해 배운다. 때로 곤란을 겪어도 자신의 허물과 무지를 돌아보지 않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현실을 살아가기가 어렵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基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논어(論語)』


가르침의 부재<
/P>21세기 한국에서 ‘삶의 기본’에 대한 ‘가르침의 부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느 시인이 칼럼에서 쓴 이야기다. (「왕따 이야기」김지녀, 매일경제, 2013년 8월 16일)&


“문제는 아이들의 인성과 이성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강자가 되는 법은 가르쳐도 약자를 배려하는 법이나 다른 아이에게 질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쟁 사회에서 부모들도 약자나 실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내 아이는 아닐 거야’라는 심리로 인해 자신의 아이가 약자나 실패자가 될 수 있음을 쉽게 간과한다.”


어른과 아이를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 결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문제는 싫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적절함을 벗어난 것에 있다. 벗어날 수밖에 없는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데,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다. 그러니 몰라서 못한다. 설사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육하는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배우는 아이들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어른들이 몸소 가르쳤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의견이 다르면 고함지르거나 폭력을 쓰고, 한두 번 말해서 듣지 않으면 등 돌리고 배제시켜버리는 것. 입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지만, 행동으로는 고함지르고 폭력을 쓴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말과 글의 가르침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은 보다 설득력이 있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육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제대로 가르쳐야 제대로 배운다.


&

생각은 생각보다 믿기 어렵다

후회하는 행동들

알타이아의 갈등<
/P>알타이아(Althaea)는 플레우론 왕 테스티오스의 딸이며 톡세우스와 플렉시포스의 누이다(일설에는 알타이아가 동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칼리돈 왕 오이네우스와 결혼하여 아들 멜레아그로스와 딸 고르게, 데이아네이라를 낳았다. 알타이아가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 세 자매가 찾아왔다. 운명의 실을 잣는 이 여신들은 난로 속에 장작개비 하나를 집어넣은 뒤 그 나무가 다 타면 아이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알타이아는 즉시 그 나무를 꺼내 불을 끄고는 집안의 은밀한 곳에 감추었다.


장성한 멜레아그로스는 칼리돈을 어지럽히고 있던 사나운 멧돼지를 잡기 위해 그리스의 여러 영웅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것은 흡사 사냥대회가 되어 버렸다. 멜레아그로스는 그 사냥대회에서 아탈란테를 처음 보았는데 그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영웅들이 아니라 멜레아그로스가 멧돼지를 죽여 그것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는 사냥에서 약간의 공이 있는 아탈란테에게 멧돼지 가죽을 주었다. 하지만 외삼촌인 플렉시포스와 톡세우스가 그것을 반대하여 아탈란테가 받은 멧돼지 가죽을 빼앗았고 멜레아그로스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독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처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상대가 외삼촌인 것도 잊고 칼로 찔러 죽이고 말았다.


알타이아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단지 아들의 멧돼지 사냥 성공 소식만을 듣고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동생들의 시체가 운반되어져 왔다. 그 순간 기쁨은 슬픔으로 변했고, 동생들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자 슬픔은 분노로 변했다.


알타이아는 옛날 운명의 여신들이 예언한 그 나무를 찾아 꺼내어 들고는 네 번이나 불길 속으로 던져 넣으려다 네 번 모두 물러섰다. 어머니로서의 마음과 누이로서의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알타이아는 결국 누이로서 동생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를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그런 후에도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린 채 운명의 나무를 불길 속으로 던져버렸다. 멜레아그로스는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원인 모를 고통을 느끼며 죽어갔다. 알타이아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죽게 한 죄책감 때문에 나무를 불길 속에 던져 넣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뒤센 미소

알타이아가 동생과 아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생각이 ‘동생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머물렀을 때는 분노의 감정이 표현되었고,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렀을 때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근심에 휩싸였다. 즉 주도적인 생각이 그에 따른 감정과 표정을 만들어 냈다. 생각이 먼저고 감정과 표현은 뒤다.


때로 무의식적인 생각은 비록 일어났더라도 의식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때도 마치 발자국처럼 뒤에 감정을 남긴다. 아무 생각 없이 홀로 일어난 감정처럼 보이지만 그 감정을 역추적하면 무의식적인 생각을 만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마음병 치료에서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해서 마냥 없애려고만 해서는 곤란하다. 마음병의 근본 치료는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생각’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의 흔적인 감정을 막거나 왜곡시켜버리면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묘연해지기 때문이다.


들은 이야기다. (「우울할 땐, 행복한 척 연기를 해보세요」류인균, 동아일보, 2014년 3월 25일)


프랑스의 신경과 의사 뒤센 드 블로뉴(1806~1875)는 사람의 ‘웃는 표정’을 연구했다. 사람의 얼굴 근육에 어떻게 전기 자극을 해야 웃는 표정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했는데, 그는 이 연구를 통해 미소에도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하나는 입꼬리를 올리는 근육과 눈가 아래 주변을 주름지게 하는 근육 둘 다가 수축했을 때 생기는 미소로 신경과에서는 이를 ‘뒤센 미소’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입꼬리를 올리는 근육만 수축하는 미소인데 이를 ‘논(non)뒤센 미소’라 한다. 또는 ‘팬암 미소’라고도 하는데 팬암 항공 승무원들이 손님을 맞이할 때 억지로 만드는 미소라는 뜻이다.


뒤센은 사람의 마음이 정말 기쁠 때 ‘뒤센 미소’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진정 기쁜 마음이 있은 뒤에 ‘뒤센 미소’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과 감정에서는 자신의 특정한 생각이 있은 뒤에 그 생각에 따른 감정이 만들어진다. 역으로 특정한 감정에는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있다는 말이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에는 그 행동을 일으킨 생각이 선행한다는 말이다. 모든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행동을 일으킨 자신의 생각이 반드시 존재한다.


끊어야 되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인터넷 게임과 담배 그리고 술, 절제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절제하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 운동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운동을 하지 않으며, 일찍 일어나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일찍 일어나지 않는 게으름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게임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음식을 절제 없이 먹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들을 자신이 선택했으며 그 행동에는 ‘그래도 괜찮다’는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만약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마음에 한 점도 없었다면 어디서 그러한 행동이 나왔단 말인가? 지금 변화를 원한다면 자기 생각에 대한 겸허한 인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다. “아, 내가 그러했구나.” 제대로 인정했다면 부끄러워지고 그 부끄러움은 변화의 동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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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풀은 눕게 마련이야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방법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르디우스는 가난한 농부로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여러 사람들의 추대로 프리기아(Phrygia)의 왕이 되었다. 당시 프리기아는 내란이 반복되며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사장이 신에게 해결책을 물었는데 ‘이륜마차를 타고 오는 첫 번째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왕이 될 것이다’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그곳에는 이륜마차가 드물어 신탁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 마침 고르디우스가 이륜마차를 타고 들어왔던 것이다.


프리기아 사람들은 고르디우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왕으로 추대된 고르디우스는 이륜마차를 신탁을 내린 신에게 바치고, 그곳에다 마차를 묶고 튼튼하게 매듭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다. 매듭은 매우 복잡하게 꼬여 있었는데, 그 매듭을 풀어내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이 전해졌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매듭을 풀려고 시도하였으나 아무도 풀어내지 못했다.


어느 날 알렉산더대왕이 원정길에 올라 동쪽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려 매듭을 풀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그러자 칼로 매듭을 잘라 버렸다. 알렉산더가 매듭을 잘랐던 당시에는 신탁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매듭을 잘라 버렸다며 좋지 않은 말들도 많았다. 하지만 훗날 알렉산더대왕이 온 아시아 땅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알렉산더대왕이야말로 신의 뜻을 제대로 안 사람이었다고 칭송했다.


여기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미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렉산더대왕이 칼로 매듭을 잘라 버린 것처럼 상식을 뛰어넘는 기발한 생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다는 뜻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믿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무지(無知)는 이처럼 삶을 힘들게 하고 마음을 괴롭게 한다. 스승님의 말씀이다. “믿을 만한 사람을 믿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믿지 못할 사람을 믿으면 믿음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고, 믿음도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 -『논어(論語)』


상대방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믿지 못할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것을 ‘지인(知人)’이라고 한다. 지인이 되지 않는 것은 무지가 원인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의 이유를 살펴보고, 그것을 하면서 그의 마음이 편안한지를 헤아려본다면 바른 지인이 된다.


그렇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틀리는 말과 행동도 좋게 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옳은 말과 행동도 나쁘게 보는 것은 무지이다. 그런 무지에서 믿을 만한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나온다. 내가 무지한 상태에 있다면 나의 좋고 싫음도 옳지 못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선(善)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악(惡)이라는 그 생각도 무지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생각이 선하다면 그것은 선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생각이 악하다면 그것은 악이다. 물론 그의 말과 행동, 생각이 변하면 선악(善惡)도 변한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안전을 위하여 운동장에서는 축구를 금합니다

개인의 무지는 그나마 알아채기 쉽다. 나와 남을 비교해 보면 틀리는 것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국가나 사회의 집단적인 무지는 그보다 어렵다. 다른 국가나 사회와 비교해 보기 전까진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전 지구적인 집단적 무지는 깨닫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들은 이야기다. (「라이스의 졸업식 축사 논란」이대근, 경향신문, 2014년 3월 12일)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2008년 하버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어두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때 실패한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극도로 몸을 사리고 조심하면 실패를 면할지 몰라도 그렇게 사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 없어도 삶 자체가 실패입니다”라고 말했다.


성공과 실패가 선택 가능하다면 누구나 성공을 택할 것이다. 성공이 좋지만 언제나 성공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성공하기 위한 노력을 배우는 것 못지않게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경쟁으로 휩싸여 있는 21세기 한국에서는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배움을 얻고 새롭게 딛고 일어섬을 배우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오프라 윈프리도 2008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실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패할 때 옳은 질문을 하세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아닌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를요.” 실패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드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실패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지인과 그의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부산에 있는 M초등학교에 일이 있어서 함께 갔다. 운동장에 들어서는데 ‘안전을 위하여 운동장에서 야구와 축구를 금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어린이, 청소년들은 여러 가지 운동을 통해 몸을 균형 있게 발달시키는 것이 필요하고, 운동할 때 생기는 이런저런 작은 사고(실패)들은 같은 또는 더 큰 그것들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된다. 이처럼 실패는 실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배우는 좋은 학습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은 실패는 무조건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다 보니 M초등학교처럼 놀다가 사고가 나면 놀이 자체를 금해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이 학교의 방침이 되기도 한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당장은 사고가 줄어 들겠지만 마음껏 뛰어놓지 못하는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 그들의 미래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들어갈 사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살려고 노력할수록 도리어 살아가기 힘들다<
/P>성공만을 원하고 실패는 거부하는 가치관이 내재된 청소년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미 실패했으나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면 그는 좌절하여 일어서지 못한다. 혹 실패를 용납하지 못한 채 단지 시간이 흘러 실패의 아픔을 잊고 다시 일어섰다 할지라도 그는 같은 일에 같은 식의 대처를 하며 또다시 실패한다. 실패를 거부할 줄만 알았지 실패를 통해 성숙(성장)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사회의 분위기가 무지한 쪽이라면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 어른들은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사회의 무지로 자녀가 흔들릴 때 깨어 있는 정신으로 그들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가 정해지기 전까진 성공을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이 옳지만, 이미 실패했다면 용납하고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며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


실패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것들은 다 알아요. 하지만 아는데 안돼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패가 왔다면 인정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은 알지만, 그러지 못하고 단지 괴로울 뿐이라면, 그 괴로운 감정과 실천하지 않는 행동의 자신의 마음(생각)을 드러내준다. 즉 무엇이 바른 방향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은 그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때는 ‘아, 내가 아직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스스로를 겸허히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다. ‘이미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자신의 무지(無知)를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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