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의 이해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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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정보
   
16000
2003�� 04��



■ 책 소개&nbsp& 
한국유교에 대한해설서로 우리의 생활 가까이에 자리 잡은 유교문화를 다시 되돌아보고 이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우리 주변에서만나는 유교문화의 모습을 점검하였고 2부에서는 유교사상의 전체를 조망해보았다. 3부에서는 여러 도학자나 실학자들을 만나보고, 한 국 유교사의연구 자료들도 정리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전통유산으로 전해오는 유교문화의 모습을 점검하고 유교사 연구문헌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유교에 대한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 저자금장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동덕여자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실학사상 연구』 『다산실학 탐구』 『퇴계의 삶과 철학』 『한국유학의 탐구』 『한국의선비와 선비정신』 『유교사상의 문제들』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머리말 
  
제1부 유교문화의 이해
1. 유교의 겉과 속 
2. 유교의 종교적 세계 
3. 유교적 삶과 규범 
4. 조선시대의 선비 그 이론과 실천
5. 유교전통의 여성상 
6. 유교사회의 가족의식 
7. 유교와 현대사회 
  
제2부 한국유교의전개 
1. 한국유교사의 개관 
2. 도학사상의 의리정신 
3. 실학사상의 전개 
4. 한국사회의 윤리적전통 
5. 유교의 현대적 역할과 과제 
  
제3부 한국유교의 인물과 사상 
1. 조선시대도학의 인물과 사상 
2. 이순신의 충렬 정신 
3. 실학과 서학의 인물과 사상 
4. 한국유학사 연구자료의분석




한국유교의 이해

  

유교문화의 이해

유교의 종교적 세계

차분한 신앙 열린 종교

"하늘의 명령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논어』의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공자의 말씀이다. 유교인은 하늘을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로 이해한다. 하늘은 명령하고 인간은 하늘의 명령을 알아차리며 받들 때 비로소 유교적인 인격의 기본자세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유교인은 하늘을,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는 복을 주기도 하고 인간의 악을 미워하며 분노하여 재앙을 내리기도 하는 존재로 믿는다. 하늘은 변함없는 이치이기에 믿기 어려워도 믿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미더운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유교적 종교성의 한 핵심요소이다. 어떤 유학자는 하늘과 인간 마음의 관계를 해와 달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연 속의 두 가지 밝은 빛으로서 해는 낮 동안 세상을 비추고, 달은 햇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으로 어두운 밤길을 밝혀준다. 인간의 마음도 마치 달처럼 천명을 받은 성품으로서 자신의 삶을 비쳐주고 이끌어간다. 유교에서는 마음을 하늘의 짝으로서 자립하는 것으로 존중한다. 인간 마음이 하늘에 흡수되지도 않고 하늘이 인간 마음 속에 녹아버리지도 않는 유교적 신앙에서는 두 기둥으로 하늘과 마음이 서 있다.


유교에서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발견하여 중심을 삼는 것은 나의 존재이다. 나를 기준으로 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유교는 삼강오륜(三綱五倫)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규범을 제시한다.


유교는 일상생활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다듬는 평생의 공부도 가정 속에서 실천한다. 오히려 가족을 떠나면 진리를 조화 있게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종교적 체험에서도 합리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 괴이한 것은 인간의 공허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환상이라 생각한다. 어떤 신비적 사실도 윤리성을 벗어나면 확고하게 거부한다. 신비성의 근원인 하늘이 결코 비윤리적 형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믿는다. 신비성이 합리성이나 윤리성과 상반된 것이라 보는 입장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유교에서 인간이 하늘과 만나거나 여러 신 존재, 곧 자연의 신들과 인간의 귀신들을 만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극한 정성과 경건함이다. 정성스러움은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그 진실은 하늘의 본질적 성격이기도 하다. 유교에서는 행동과 생각조차 정성을 훈련하고 진실함의 바르고 맑은 인격의 모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하나의 길(道)이라 생각한다. 유교인이 공부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자세가 경건함이다. 경(敬)은 유교의 수양공부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져야 할 조건이다. 경건함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의 목표로 지향하게 하는 마음의 집중이요, 해이되지 않고 각성된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다.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 강하다. 어떤 사람들은 유교는 종교적인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한 불완전한 종교라 지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유교가 과거에는 종교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종교적 생명이 끊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우 소수의 사람들은 유교는 종교로서 매우 세련된 본질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교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가장 사소한 데까지 젖어들고 있는 종교다. 아침에 눈을 떠 세수하고 머리 빗는 단장도 부모님에 문안하는 일도 모두 유교적 수양의 조목이다. 거리에 나오면 모든 사람을 큰 손님 모시듯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 자세도 유교의 가르침이다. 유교는 세속적인 일상생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 속에 열려 있다. 신성성은 세속성을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성을 이끌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가 지난 세기 말에 노쇠하여 쇠잔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봄 얼음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듯 흙 속으로 씨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서 유교가 싱싱하게 살아움직일 수 있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믿는다.


유교적 삶과 규범

예절

한국인이 문화적 가치로서 자기표현을 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예절이라 할 수 있다. 유교문화의 전통은 인간의 가치를 예절 있는 행동과 염치를 아는 심성으로 제시해왔다. 인간이 동물과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염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난 행동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도리에 맞는 행동의 절차가 예절로 표현된다.


예의는 우주의 질서에 따른 인간 행동의 정당한 법칙이요, 여기에 마땅한 절도로 예절이 규정된다. 우주에는 하늘이 높고 땅이 낮게 있다면, 인간관계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관계로 질서 지워진다.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은 질서처럼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어느 조직에서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다. 여기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자기 의지대로 지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유교전통의 윤리규범 중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다"라는 원칙은 의리를 따라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의리는 바로 예의라 할 수 있다. 서로 지켜야 할 예의를 무시하지 않을 때 인간관계의 질서는 무너지고, 예절이 성립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나 어른과 젊은이 사이, 친구 사이, 부부 사이에도 항상 지켜야 할 예의가 규정된다. 따라서 예절을 떠나서는 인간 행동이 인간답게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예절은 엄격하고 섬세한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다. 소소한 것까지 예절에 맞는 형식이 주어진다. 형식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사회의 예절이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으며, 우리 시대의 예절이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의의 정신과 예절의 형식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계승하면서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절은 그 근본정신으로 공경과 사양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서로 공경하고 사양할 때 예절이 성취된다. 인간을 기능적인 능력에 따라 상품적인 가치로 환원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절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은 예절을 지킴으로써 인간적 품위를 발현할 수 있고, 동시에 사회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실현할 수 있는 기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이러한 예절을 우리의 현대사회에 적합하게 재발견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한국유교의 전개

한국유교사의 개관

삼국시대의 유교

한국유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왔다. 한국의 고대사회에 언제부터 유교가 전래해왔는지는 확실한 시기를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역사에서 고대부족국가가 발생했던 삼국시대 초기 이전에 유교의식이 침투해온 흔적이 있으므로, 중국의 전국시대(B.C. 403~221)에는 이미 유교사상이 중국문화와 함께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면 유교문화를 수용한 중요한 사건들이 나타난다. 고구려에서는 A.D. 372년에 처음으로 태학이 세워졌는데, 이 태학의 중심 교과목은 유교 경전이었다. 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임금인 동명왕이 임종 때 세자에게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려라"고 유언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도(道)를 통치원리로 삼는 것은 유교의 통치이념이다. 고구려만이 아니라 삼국의 통치원리는 모두 유교적 이념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라 때 대표적인 불교학자인 원효대사는 오늘날에도 유교의 문묘(文廟, 공자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유학자인 설총을 아들로 낳았다. 삼국시대에 불교도 성행했지만 유교가 이 시대의 사회발전에 기초를 이루고 있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삼국에는 모두 대학이 있어서 유교경전을 가르쳤으며, 특히 신라에서는 당나라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초상을 구해와서 대학에 모셨다. 곧 문묘제도가 설치되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시대에는 임금이 선조를 제사드리는 사당인 종묘가 설치되었고, 토지신에 제사드리는 사직도 세워졌으며, 백제에서는 한때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단인 남단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는 곧 유교의 기본적인 제사체계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유교

고려시대는 한국역사에서 중세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불교가 성행하였던 시기이지만, 국가의 통치원리는 유교를 기준으로 삼아왔다. 고려 태조가 후세의 임금들에게 훈계한 「훈요 10조」에서는 통치원리를 유교적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 10조에서는 임금이 유교경전과 역사서로 훈계의 거울을 삼도록 요구하면서, 특히 『시경』 무일편(無逸篇)을 유념하도록 당부하였다.


고려 초기인 958년에는 유교경전을 시험하여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으며, 태조 때는 대학을 세웠고, 성종 때(987)는 전국의 지방에 학교를 세워 유교교육을 확장시켰다. 또한 문종 때에는 한국의 공자라 일컬어지는 유학자 최충(984~1068)을 비롯하여 12명의 유학자들이 사립학교를 열어 유교교육이 융성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인 충렬왕 때(1290) 안향이 원나라에 가서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유학자 주자의 저술을 가져오고, 1305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정자와 주자의 저술을 가져와서 전함으로써 성리학의 새로운 학풍이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정몽주는 주자의 「가례(家禮)」를 실천하여, 유교의 가정의례를 전파시켰으며, 대학인 성균관에서 주자의 경전주석에 따라 강의를 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주자학풍을 활발하게 일으켰다.


조선 전기의 유교

고려 말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주자학, 곧 도학은 불교처럼 조화를 추구하는 입장이 아니라 철저히 비판하는 정통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교려 말부터 불교비판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왕조의 설립 과정에 참여한 유학자들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불교에 대한 비판과 억제를 추구하는 유교 정통주의에 기초시켰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많은 사원의 재산을 관청에 귀속시키고, 승려들을 상당수 세속으로 돌려보냈으며, 사실상 승려의 신분을 천민으로 끌어내리는 탄압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중심역할을 하였던 정도전은 불교교리를 도학의 철학적 체계인 성리학의 입장에서 비판하였고, 유교의 통치원리를 체계적으로 규정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 시기의 중요한 유학자인 권근은 유교경전을 주석하고 도학의 체계에서 유학의 입문서를 도형으로 요약하였다.


조선사회는 유교를 사회적인 정통이념이자 국가종교로 정립시켰다. 조선 초에는 국가제도와 의례를 유교적 형식으로 정비하기 위하여 의례에 관한 연구와 제정작업이 진행되었다. 세종대왕(1419~1450 재위)은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전문학자를 양성하였고, 의례상정소를 설치하여 국가의례에 관한 종합적 연구와 의례를 제정하게 하여 마침내 국조5례의(國朝五禮儀)가 성종 때 와서 완성될 수 있게 했다. 그는 음악을 통한 유교적 교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많은 악곡을 직접 지어 의례와 음악이 갖추어진 유교정치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 이때는 한국언어의 문자인 훈민정음(한글)이 만들어져서, 한글로 불교의 찬가도 지었지만,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유교적 이념으로 노래한 「용비어천가」를 비롯, 효도와 충성과 열녀의 유교적 도덕규범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삼강행실도」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다른 한편 민간의 유학자들 사이에는 도학의 실천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선비계층이 등장하여, 사회윤리의 기준을 제시하고 행동의 모범을 보여왔다. 이들을 사림파(士林派)라 일컫는데, 이들은 권력에 탐닉하는 관료층을 비판하는 데 과감하였다.


조선 후기의 유교

16세기 말에 일본의 침략을 받아 7년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도학의 정통질서는 더욱 강화되어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도학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학풍도 등장하게 되었다. 곧 도학의 권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양명학, 서학 및 실학이 새로이 유학자들 사이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유교는 사상사적으로 유교의 여러 유파로 다양화되었던 다변화시대라 할 수 있다.


최근세의 유교

1866년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왕조는 서양의 군사력 앞에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동요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잇달아 1871년 미국함대가 다시 강화도를 침공하였고, 당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1876년 무력위협을 하자, 조선정부는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지방의 도학자들은 서양과 일본을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철저한 배타적 거부운동을 일으켰다. 이들 도학자들은 유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사악한 외국 침략세력을 배척한다는 입장에 있으므로 한말척사위정론자(韓末斥邪衛正論者)라 일컫는다.


이들은 서양의 종교만이 아니라 물질문명도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타락의 요인이 되는 악이라 규정하여 거부하는 철저한 폐쇄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실학파를 계승한 인물들 사이에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면서 유교의 전통은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도 있고, 유교전통의 비현실적인 모순들은 과감히 청산하고 서양문물을 전반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개화론자(開化論者)들도 나왔다. 개화론자의 일부는 유교적 이념을 전제로 하고 있었지만, 급진적 개화론자들은 유교와 결별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치하에서 유교인들은 저항하는 도학자들과는 달리, 파괴된 유교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다양하게 일으켰다. 1909년 박은식, 장지연 등은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여 일본의 앞잡이로 조직된 친일파의 대동학회(大東學會, 뒤에 孔子敎로 개칭함)에 항거하였고, 1913년 이승희는 만주에 망명하여 북경공교회와 연결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조직하였으며, 1923년 이병헌은 경남 산청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설립하여 중국공교회와 연결된 공자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저항적인 도학자들의 호응을 받지는 못하였다.


 

한국유교의 인물과 사상

조선시대 도학의 인물과 사상

조광조와 선비정신

조선왕조의 경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모든 관료와 지방의 지도 계층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에서 유학자가 아닌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속으로도 같은 이상이나 신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들을 나누어보면 권력과 개인의 이익을 발판으로 삼고서 유교도덕으로 꾸미고 있는 훈구 관료층과 이에 상반하여 유교이념을 이상으로 내걸고 이를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 정치의 무대 위로 뛰어들었던 신진 사림층의 두 갈래가 있다. 훈구파에게는 정권이 절대적 가치요, 도덕과 이념은 수단이었지만, 사림파에게는 이념의 순수성과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전제가 되고 정권도 이를 위한 도구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났다.


훈구세력은 태조 이래의 공신과 외척 및 고위관료들이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도태되거나 발탁되어가면서 권력을 유지해왔고, 사림세력은 세종시대부터 부분적으로 관료로 진출하면서 권력에 집착하는 훈구세력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저항적이었다. 세종시대에 배양된 선비들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항거하다가 제거되었고, 성종 때 배양된 선비들은 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일망타진되었다. 중종반정은 훈구파 안에서 권력의 투쟁적인 교체작업이었지만, 그 틈 사이에 사림의 잔존세력이 파고들어왔다.


중종은 이른바 반정공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임금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독립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훈구파가 아니라 사림세력이 필요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이상주의적 청년 이론가들이 중종과 결합되면서 훈구세력은 사림파의 의리론에 비추어 적극적으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사림파는 경연이나 대간 등 임금 측근의 요직을 점령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정치를 내세우면서 정치세력과 사회질서의 개편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중종시대 사림파의 기수인 조광조(1482~1519)는 34세인 중종 10년(1515)에 처음 벼슬에 나가서, 만 4년 뒤에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중종의 신임 아래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에 조광조는 중종반정 때의 이른바 정국공신을 다시 심사하여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 4분의 3이나 삭제하여 훈구세력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또 사림파는 스스로 학문과 덕행이 갖추어진 사람들의 진출 기반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도록 요구하였다.


사림파의 의리론은 의리와 이익, 공변됨과 사사로움, 군자와 소인을 분멸하고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데 날카로운 비판적 태도를 지녔다. 이들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정치의 근원을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신념에서 간쟁하였으며 이는 임금에게도 끊임없이 도덕적 압력과 비판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림파의 최고 가치는 왕도(王道)이며, 임금은 이 왕도를 수행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무를 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훈구파의 최고 가치는 권력과 부귀이며, 임금은 그 보호자로서 같이 향락할 수 있게 된다.


대립된 세력을 적절히 조종하면서 왕권을 유지해야 하는 임금으로서 중종은 훈구파의 교활한 신하들과 손잡고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밤 숙직승지도 모르게 신무문을 간신들에게 열어주어 정변을 일으켰다. 조광조 이하 8명이 그날 밤으로 투옥되고, 임금을 속이고 사사로운 뜻을 행사한 죄 또는 서로 어울려 권력을 장악한 죄 등으로 논죄되면서 사형이 내려졌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간신세력들은 조광조 등을 잠시 유배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에 희생된 선비들 곧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이들은 30대의 청년으로 판서, 대사성, 대사간 등의 요직에서 도학의 이상을 순수하게 펴보려는 이상을 가졌던 것이었다. 정암 조광조의 말처럼 "예로부터 정직한 무리가 세상에 성행하면 반드시 큰 재앙이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라는 역사의 현실은 바로 그 자신마저 포함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실학과 서학의 인물과 사상

김정희와 <세한도>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 김노경과 유씨 부인의 첫아들로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증조부는 영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척을 맺은 대대로 드러난 문벌이었다. 그는 15세 때부터 유명한 북학파의 실학자인 박제가에게 배웠고 24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당시 청나라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을 만나 학연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학풍에 안목을 넓히게 되었다.


김정희는 서예에 대한 깊은 연구와 정진을 통하여 추사체라는 서법의 일가를 이루었고, 서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이론을 전개하여 서예론의 체계를 세웠다. 또한 금석문(金石文)에 관한 연구와 진흥왕의 순수비를 발견하여 고증하는 등 금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한 대의 훈고학과 송대의 도학을 종합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함으로써 학문정신의 근본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불교에 대해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러 당시 선학(禪學)의 종장인 백파선사(白坡禪師)와 선학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정희의 학문은 폭이 넓고 진취적이었으며,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을 지녔다는 데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김정희의 가문은 정치권력에 깊이 관련된 만큼 그의 일생에는 파란도 많았다. 그의 아버지 김노경이 순조 30년(1830)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자 그는 아버지가 무고를 입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고 유배에서 돌아오기까지 3년 동안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고통과 함께하는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다. 10년 후 헌종 6년(1840) 윤상도의 옥사가 재론되어 이미 세상을 떠난 김노경의 관직이 추삭(追削)되고 55세의 김정희 자신도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는 도중 부인 이씨를 잃는 불행을 당했다. 김정희는 바다 바깥의 쓸쓸한 유배지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상처(喪妻)의 쓰라림을 겪으면서 독서를 통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다.


이때 역관(譯官)으로 있던 이상적이 그를 잊지 않고 연경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다가 보내주는 정성을 보여 그를 깊이 감동시켰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당시의 심회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아 <세한도>라 제목을 붙이고, 한 편의 글을 지어 이상적에게 보냈다. 이 그림은 쓸쓸한 황야에 야트막한 초각 비스듬히 놓였고 그 양쪽 곁에 몇 그루의 송백(松柏)이 우뚝 서 있는 간결한 단조로움 속에 무게와 힘이 담겨 있다. 이 그림과 함께 이상적에게 띄운 편지는 바로 절개와 의리를 높이는 선비의 정신이 담겨 있고 또한 김정희 자신의 체험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 쫓아가거늘 마음과 힘을 이같이 다하여 권세와 이익에 돌리지 않고 바다 바깥의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김정희 자신)에게 돌려주었도다.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자는 태사공(太史公)의 말처럼 권세와 이익으로 합했다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고 한다. 그대로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거늘 초연하게 스스로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솟아남이 있으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대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께서는 추운 겨울을 당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드는 것을 알지니라라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시들지 않는다. 성인은 특히 추운 겨울의 송백을 칭찬하였다. 이제 그대는 나에게 대하여 전(권세가 있을 때)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유배된 때)라고 덜함이 없도다. 그러나 전날의 그대는 칭찬함이 없었지만 이제 와서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있어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정희 자신은 부귀를 누리는 가문에서 태어난 학자였으나 역경에 처하여 인심의 향배를 겪음으로써 의리의 어려움과 고귀한 가치를 절실히 체험하고 선비의 정신세계를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정희의 한 폭 <세한도>와 한 통의 편지가 보여주는 의미는 작품의 미적 예술성을 넘어서서 선비의 가치의식을 선명하고도 순수하게 밝히는 진실의 문제요, 현실의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지켜가는 지조를 강인하고도 절실하게 밝히는 의리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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