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현대 성공학을 발명한 데일 카네기의 삶!
미주리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미국 현대 인물들의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평전 작가 스티븐 와츠가 현대 성공 철학의 아버지인 데일 카네기의 삶을 풀어냈다. 데일 카네기(1888~1955)는 세계적인 성공학 강사로 성경을 잇는 최대 베스트셀러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라이프」지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국인’으로 꼽은 데일 카네기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업과 가정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카네기는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가 성공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했다. 내면화된 도덕적 원칙을 강조해온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공철학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현대 미국인의 가치 형성에 기여했다.
저자는 데일 카네기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그 배경이 되는 미국의 시대상도 세심하게 조명하고 있다. 1930년대 급격한 변화 속에 있었던 미국에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성공 철학의 태동하는 과정을 만나볼 수 있다.
■ 저자 스티븐 와츠
미조리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The People’s Tycoon: Henry Ford and the American Century』『The Magic Kingdom: Walt Disney and the American Way of Life』『The Republic Reborn: War and the Making of Liberal America, 1790~1820』 등을 비롯한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특히 『The Republic Reborn: War and the Making of Liberal America, 1790~1820』은 National Historical Society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고, American Studies Association에서 ‘최고의 책’을 수상했다.
■ 역자 정지현
충남대학교 자치행정과를 졸업했다. 일상의 정취가 묻어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그녀는 미국에서 딸을 키우며 번역에 대한 사랑도 함께 키워나가고 있다. 현재 출판번역 에이전시 베네트랜스 전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4만 명에서 단 한 명으로』『원하는 일에 날개를 다는 삶의 에너지』『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인생학교-일』『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대화사전』『마크 트웨인과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감사』 등이 있다.
■ 차례
여는 글 - 현대사회에서 ‘스스로를 돕는다’는 것
1부 성품에서 성격으로
1장 신앙심과 가난
2장 저항과 회복
3장 상품을 팔아라, 자기 자신을 팔아라
4장 동쪽으로 간 젊은이
5장 가르치고 글을 쓰며
6장 마음의 힘과 긍정적 사고
7장 추방 그리고 잃어버린 세대
8장 비즈니스와 자기규제
2부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라
9장 두려운 일을 하라
10장 사람은 자기계발에 굶주려 있다
11장 인간은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
12장 모든 행동의 이유는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
13장 상대방에게 부응할 만한 훌륭한 명성을 갖도록 해주어라
14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15장 세상을 얻는 자
16장 걱정을 없애지 않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
17장 열정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닫는 글 - 데일 카네기가 남긴 자기계발의 유산
감사의 말
주석
인간관계를 발명한 남자
현대사회에서 스스로를 돕는다는 것
1936년 1월 어느 추운 저녁, 수많은 인파가 뉴욕 시 펜실베이니아 호텔로 모여들었다. 약 3,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연회장과 발코니에 꾸역꾸역 들어찼고 바깥의 인도에도 몇 백 명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추위에 떨며 서 있었다. 소득을 올려라, 효과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라, 리더십을 준비하라 같은 내용을 강조한 「뉴욕선(New York Sun)」지에 실린 전면광고를 보고 몰려든 인파였다.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는 자기계발 강좌의 설립자 데일 카네기는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와준 것에 기쁨을 표시했다. 그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누구나 이미 수많은 사람의 삶을 개선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장담했다. 누구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즉각 호감을 얻고,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어려운 개인적 상황에 대처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그들도, 여러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라고 끝맺었다. 청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그중 대부분이 연회장 뒤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앞 다투어 달려가 강좌에 등록했다. 훗날 효과적인 연설 및 인간관계를 위한 데일 카네기 강좌(Dale Carnegie Course in Effective Speaking and Human Relations)는 800만 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데일 카네기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든 더욱 굉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강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담은 책 『카네기 인간관계론(How to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이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이다. 그 후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수십 쇄를 더 찍었으며 몇십 년 동안 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의 중심에는 독자들이 거부하기 어려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호감 가는 성격과 자신감, 인간관계 기술 개선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심리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욕구를 가늠하고 충족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모두에게 전염될 정도의 뜨거운 열정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신의 책은 그 누구라도 "판에 박힌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과 비전과 야망을 품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영향력과 명성과 목표 달성 능력을 높이도록, 새로운 고객과 소비자를 확보하고, 불만을 처리하고 언쟁을 피하고 인간관계를 매끄럽고 유쾌하게 유지하고,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쉽게 적용 가능한 심리 원칙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이렇게 데일 카네기는 미국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빛나는 성격과 자존감, 인간관계, 심리적 안녕을 강조하는 그의 메시지는 널리 퍼져 나가 수백만 명을 끌어당겼고 그를 현대적 가치 형성에 기여할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만들었다.
성품에서 성격으로
신앙심과 가난
카네기가 경제적 풍요와 마음의 행복을 열렬하게 지지하며 그 두 가지를 현대의 성공 원칙으로 내세운 이유는 유년기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끝없이 계속되는 가난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성실한 노동 윤리를 지닌 가난한 소작농이었는데 잘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었는데, 카네기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복음주의 개신교와 자기 성찰의 가치를 익혔다. 화목하고 안정적인 집안 분위기는 카네기의 유년 시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네기의 유년 시절을 고달프게 만든 것이 있었다. 1800년대 후반 미주리 시골에서의 삶은 힘겨웠고, 약함․고난․위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카네기의 유년기에는 질병도 끊임없는 위험 요소였다. 정기적으로 수많은 질병이 마을을 덮쳐 힘없는 아이들을 데려갔다. 또한 편의 시설이 부족한 농장 생활은 어린 소년에게 가혹한 노동을 의미했다.
하지만 미주리 농장 출신의 소년에게 더욱 크고 끈질긴 정신적 고통을 준 것은 가난이었다. 1800년대 후반 소작농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데일 카네기의 아버지인 제임스 카네기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수익을 내지 못했고 빚만 늘어갈 뿐이었다. 1900년 초에 몇 년 동안 이어진 실패를 견디다 못한 제임스 카네기는 산더미 같은 빚을 청산하고자 10여 년 전 희망에 부풀어 구입한 농장을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빚을 갚고 나니 남은 것은 가구 몇 점, 마차 한 대, 말 두 마리뿐이었다.
이 위기는 카네기의 부모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카네기는 인민주의 운동(Populist movement)에 합류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인민주의 지도자로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지지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고충 해소를 위해 은화 자유주조, 철도와 금융 기관에 대한 정부 규제, 시장 공동 전략을 내세웠다. 제임스 카네기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후보와 맞붙은 브라이언 후보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제임스 카네기는 결국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빚이 점점 늘어가고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자 우울증에 빠졌다.
하지만 데일 카네기의 어머니인 아만다 카네기가 가족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그녀는 신앙심이 더욱 깊어졌다. 종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아만다는 메리빌 지역사회에서 교회와 관련된 일에 적극 참여했다. 그녀는 성인이 된 후로 줄곧 여러 시골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평신도 전도사가 되었다.
어린 데일 카네기는 고군분투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교훈 하나를 배웠다. 그는 부모의 이타심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리 가난해도 해마다 어떻게든 돈을 조금 모아서 인근 아이오와 주 카운슬 블러프스(Council Bluffs)에 있는 고아원 크리스천 홈(The Christian Home)에 보냈다. 나중에 유명해진 카네기는 뉴욕 강연에서 부모의 이타적인 성품에 대해 언급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돈도, 그 어떤 경제적인 유산도 물려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보다 훨씬 값진 것을 물려주셨습니다. 바로 믿음과 흔들림 없는 성품입니다."
신앙심과 가난, 미덕과 실패, 노력과 굴욕 사이에서 갈등하던 데일 카네기는 청소년 시절에 전환점을 맞이한다. 카네기가 16세가 되던 1904년 봄, 그의 가족은 화물열차에 짐을 싣고 메리빌의 임대 농장을 떠나 남동쪽으로 약 270킬로미터 떨어진 미주리 주 워런스버그(Warrensburg)로 향했다. 그곳 농지는 미주리 북서쪽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지만 그의 부모에게는 두 아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워런스버그 근처에 주립사범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골짜기 시골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지금까지 상상만 해왔던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것은 데일 카네기가 성공의 길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상품을 팔아라, 자기 자신을 팔아라
1908년 봄, 데일 카네기는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대학 생활 동안 종교적 가치관에 위기를 맞고 사회적 열등감도 느꼈지만, 대중연설을 차별화 수단으로 삼아 토론대회와 웅변대회의 우승자로 거듭났다. 그는 대학교 졸업과 함께 교사가 되고 장기적으로는 언젠가 셔터쿼(Chautauqua,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시골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성인 교육 운동으로 강연, 음악, 쇼, 설교 등으로 시골 마을에 오락과 문화를 제공했다) 강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듯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가난의 망령이 여전히 그를 쫓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돈 한 푼 없었고 가진 것도 거의 없었으며 그의 부모는 대학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농장을 날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상황에 급우 한 명이 지나가는 말로 돈 벌 기회에 대해 언급했을 때 카네기는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어빙문학회 회원인 프랭크 셀스(Frank Sells)가 지난해에 잠깐 콜로라도 주 덴버의 국제통신학교(International Correspondence School)에서 강좌 파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숙식이 제공되는 데다 하루 2달러라는 쏠쏠한 수고비에 매출 건당 수수료까지 챙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네기는 국제통신학교에서 나오는 경비만 해도 신입 교사 월급인 60달러에 맞먹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더욱 유리한 길을 찾아 결단성 있게 움직였다.
카네기와 국제통신학교는 여러모로 완벽하게 어울리는 결합이었다. 1891년,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Scranton)에 설립된 국제통신학교(ICS)는 화이트칼라 계통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노동 계층 사람들에게 회계, 기계 제도, 이발, 방부처리, 제약, 부동산 판매, 부기, 속기, 측량, 배관, 건설도급 계약, 기계조명 관리, 가스 엔지니어링을 비롯한 다양한 실용 강좌를 제공했다. 1900년대 초반에는 덴버를 비롯한 미국 전역에 300개 이상의 지사가 세워졌고 해마다 약 10만 명이 등록했다. 소수의 직급 낮은 사무원들을 포함해 실용 교육과 소득 개선에 목마른 대다수의 산업계 백인 노동자들이 자기계발을 위하여 ICS에 몰려들었다.
카네기는 네브래스카 서부를 맡아 열정적으로 나섰다. 얼라이언스(Alliance)라는 작은 마을을 본거지 삼아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고객을 찾았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에도 카네기는 거의 강좌를 팔지 못했다. 좌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카네기는 조금씩 찾아오는 절망감에 두 손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네기는 뜻하지 않게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했다. 그는 담당 구역을 다니던 도중에 네브래스카의 스코츠블러프(Scotts Bluff) 호텔에서 베테랑 세일즈맨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셔널 비스킷 회사(National Biscuit Company)에서 일하는 그는 솔직하게 조언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가 하는 일은 진짜 직업이라고 할 수가 없군. 네브래스카 모래 언덕에 사는 농부와 식료품 직원, 감자 재배업자, 소목장 주인들에게 교육 강좌를 판다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니까. 고기나 통조림 같은 필수품을 팔아야지.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해보지 그래? 자네처럼 기운과 열정을 가진 젊은이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을 판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걸세." 그 솔직한 조언은 카네기를 움직이게 했다. 유형(有形)에 가까운 물건을 팔기로 결심한 카네기는 육류가공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던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로 가서 좀 더 확실한 직업을 찾아보기로 했다.
국제통신학교에서 일한 짧은 기간은 재앙처럼 보였지만 카네기에게는 기억에 오래 남는 중요한 교훈을 선사했다. 우선 카네기는 실용적인 사람에게는 전문적인 교육을, 전문적인 사람에게는 실용적인 교육을 제공한다는 ICS의 목표를 흡수했다. 또한 카네기는 ICS가 개인의 사회적 발전을 유쾌하게 홍보하는 방식도 배웠다. 광고에 답하거나 강좌에 등록하는 수강생들에게 발송되는 ICS 팸플릿에는 밑바닥에서부터 성공의 사다리로 올라간 사람들의 성공담이 실렸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ICS의 성공 철학과 영감은 카네기의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었고, 그의 대중연설 강좌와 훗날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카네기 인간관계론』의 성공 원칙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아머앤드컴퍼니(Armour and Company)는 1867년 필립 D. 아머(Philip D. Armour)가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 설립한 회사로 1800년대 후반에 확장을 거듭하여 축가공업계의 거인으로 성장했다. 아머앤드컴퍼니는 1880년대에 더욱 원활한 판매와 저장, 배송을 위해 미국 전역에 지사와 유통 센터를 설립했다. 카네기가 입사할 즈음인 1908년 가을 아머의 오마하 공장은 미국 최대 규모의 육가공 공장 중 하나로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카네기는 주급 17달러 30센트에 경비 제공이라는 조건으로 다시 한 번 세일즈 세계로 힘차게 발을 들여놓았다. 아머의 제품은 그가 만난 베테랑 세일즈맨이 조언해준 바로 그런 종류였다. 소고기, 돼지고기, 라드, 비누처럼 상점 주인들에게 지속적으로 필요한 필수품이었다.
실제로 카네기는 아머앤드컴퍼니의 세일즈맨으로 취직하면서 미국의 대대적인 경제호황 속으로 들어갔다. 1890년부터 1920년까지는 미국 경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소규모 생산 중심 시스템에서 관료주의 대기업의 소비자 중심 시스템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소비자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역동적인 시도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광고가 현대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1800년대만 해도 광고는 힘, 품질, 내구성, 실용성 등 제품의 실용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실용성을 뒤로하고 정서적인 상징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둘째, 세일즈맨이 소매업체를 통해 제조업체에서 평범한 중산층과 근로자들에게 상품을 전달하고 풍요로움을 즐기게 하는 중요한 역할자로 떠올랐다.
카네기의 성공은 좋은 상품과 그의 노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래 요령을 깨우친 덕분이기도 했다. 카네기는 상점 주인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게 세일즈의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호감 가는 성격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하고 대화를 유도하여 상대방이 관심 있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하며, 제품에 대한 열정을 보여줘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네기는 대중연설 경험과 타고난 열정으로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낼 수 있었다. 또한 세일즈의 비결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수의 심리학자와 광고업자들이 1900년대 초반부터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그 주제였다.
비즈니스와 자기규제
카네기가 20세기 비즈니스 문화에 몰입한 것은 1920년대 후반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당대의 활기찬 상업 환경을 수용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1912년에 성인 교육 강좌를 개설하자, 1900년대 초의 새로운 기업 분위기에서 승진을 꿈꾸는 중하위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반항적인 해외 체류를 끝내고 돌아온 카네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발전하는 기업 경제와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연결시켰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현금이 지갑과 주머니를 채우는 번영의 시대인 만큼 사방에 기회가 널려 있었다.
젊은 강사이자 작가인 카네기는 번영의 시대를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비즈니스 세계를 겨냥했다. 그는 비즈니스 종사자들이 자기계발과 자기관리, 성공 메시지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능성 높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는 그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처음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데일 카네기는 대중연설 강의와 저술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1926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이름과 함께였다. 그전 해에 그는 성의 철자와 발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1924년 11월 「메리빌 민주주의 포럼」에 보낸 공적인 서신에는 늘 하던 대로 데일 카네기(Dale Carnagey)로 서명했다. 둘째 음절에 강세가 들어가는 철자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25년 10월에 같은 신문사로 보낸 서신에는 첫째 음절에 강세가 들어가는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로 서명했다. 1926년에 발표한 새 책의 속표지에도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지음이라고 실려 그 변화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름의 철자를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카네기가 확실하게 설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카네기가 이름의 철자를 바꾼 것은 그가 인정했던 것이나 인지했던 것 이상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여러 측면에서 그것은 카네기 삶의 중요한 변화를 반영했다.
첫째,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미국 시골의 사고방식, 즉 종교적이고 편협하며 억압적인 문화를 최종적으로 거부함을 의미했다. 둘째, (그가 적극 수용했던)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 사고에 몰두하고 이를 타인에게도 전파하려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성의 특징인 강조되는 둘째 음절 네(nay)를 없애버렸다는 것은 네거티브, 즉 부정적인 상징을 없앴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에게 차이를 추구할 수 있는 정서적 해방감을 선사했다. 셋째, 막강한 힘을 가진 유명한 사업가 앤드루 카네기와 똑같은 철자로 바꿨다는 것은 이 야심 찬 젊은이가 20세기 초 팽창하는 비즈니스 문화에 넘쳐나는 기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을 뜻했다.
다시 말해서 카네기(Carnegie)는 과거에 배우이자 세일즈맨이자 저널리스트이자 실패한 소설가였으며 교회를 다녔던 37세 데일 카네기의 새로운 정체성을 상징했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고 번영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를 수용함을 의미했다. 또한 대중연설 강좌와 저술을 단순 직업이 아닌 천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상징했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1920년대 역동적인 경제 활동에 미래를 걸겠다는 결의를 확인시켜주었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카네기는 부지런히 뉴욕과 볼티모어,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북동부 도시에 다시 YMCA 강좌를 개설했다. 몇 달 만에 다시 수강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왔고 그중 대부분은 현역 사업가나 사업가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그것도 단기간에 원했다. 동료들과의 회의, 고객 면담에서 곧바로 활용할 실용 기법을 원했다.
카네기는 수강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세 번째 책 『대중연설 : 비즈니스맨을 위한 실용 강좌(Public Speaking : A Practical Cource for Businessmen)』(1926년)를 출간했다. 궁극적으로 『대중연설 : 비즈니스맨을 위한 실용 강좌』에서 비즈니스 종사자들을 겨냥한 카네기의 시도는 결실을 맺었다. 그 책은 직업적 행동, 개인의 포부, 자아의 사회적 표현에 관련된 조언의 결합체였으므로 1920년대 점점 확장하는 미국의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의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관료주의 기업에서 화술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실용적으로 설명해주었기에 학생들과 독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성공 수단으로서 성격을 개발해야 한다는 설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네기가 독자들에게 전달한 조언은 그의 인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행동 방식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측면에서 보자면, 청중에게 인정과 찬사를 받음으로써 기업 문화 형성에 관해 믿을 수 있는 대표적인 조언자가 될 수 있었다.
1930년 무렵 카네기는 대표적인 대기업들과 관계를 맺을 만큼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1930년 광고 팸플릿에는 가는 세로줄 무늬 양복에 흰 셔츠, 넥타이 차림을 한 카네기의 사진과 그가 출강한 사업체들의 목록이 실렸다. 브루클린 상공회의소, 필라델피아 상공회의소, 뉴욕신용협회, 필라델피아 생명보험사, 벨 전화사 펜실베이니아 지부, 웨스팅하우스 전기 및 제조 회사, 브루클린유니언 가스 회사, 메뉴팩처러스클럽 등 다수가 포함되었다. 그의 저서 『대중연설 : 비즈니스맨을 위한 실용 강좌』가 미국 은행협회의 공식 도서로 선정되어 전국 100개 지회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수록되었다. 기업 고객의 추천사도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라
두려운 일을 하라
1929년 가을,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적 재앙이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그해 10월 하순의 주식시장 폭락은 모든 투자자와 사업가, 은행의 평범한 예금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폭락한 주가는 몇 달 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대신 계속된 침체로 경제 전반에 재앙을 초래했다. 1930년대 초에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수백만 명이 일자리와 주택을 잃었고 은행과 사업체들이 줄줄이 파산했으며 미국 전역에 빈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당시의 모든 수치는 엄청났다. 실업률은 25퍼센트로 치솟았고 투자율은 1929년보다 거의 90퍼센트 떨어졌으며 국민총생산과 소비자물가지수는 폭락 이전보다 25퍼센트 아래에 머물렀다. 이렇게 부와 기회가 증발해버리고 끔찍한 절망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카네기도 경제적 손해를 크게 입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카네기에게 대공황은 경제적 시련보다는 정신적 시련의 의미가 더 컸다. 정치에 관심이 많지도 그렇다고 어떤 정치적 이념을 지향하지도 않았던 카네기는 대공황을 자본주의의 위기나 위험한 계급투쟁 조성 또는 연방정부의 규제 역할에 대한 재고의 기회로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기본 원칙인 긍정적인 생각과 열정, 성격계발의 효과를 실험하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1930년대 초반의 실업과 무주택, 경제 침체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관점은 비현실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카네기의 이런 태도는 대공황 시대에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수백만에 이르는 중산층 시민 또한 대공황을 회복력에 대한 개인의 도전, 즉 용기와 자신감, 조정을 통해 극복해야 할 정서적 시련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미국 중산층들은 실제든 위협이든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고, 급진주의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흔들리는 미국인의 생활 방식을 정의하고 수호하고 지키는 데 관심을 쏟았다. 미국인들은 기존 체제를 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개혁하려고 했다. 그들은 개인주의를 버리고 전체주의를 선택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산산이 조각나버린 개인적 효능감(Personal Efficacy)을 바로 잡고자 했다.
카네기는 대공황에 대한 중산층의 반응을 공유했고 그들의 감성과 가치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자신의 대중연설 강좌를 수정하여 당시 만연한 불안감을 극복하도록 도와준다고 강조했다. 또 미국의 한 위인에 관한 책을 집필함으로써 당시의 보편적인 욕구, 즉 평범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담아냈다. 끝으로 카네기는 경제 침체기의 또 다른 강력한 문화 기류인 유명인사를 통해 현실도피를 유혹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이렇게 그는 현대의 가장 큰 시련에서 미국인의 방식을 구하려고 애쓰는 주류 문화와 공동전선을 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간 대공황은 카네기에게 생존과 성공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확립해나가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카네기는 가장 좋아하는 인용문을 활용해 자신의 강좌를 소개했다. "에머슨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워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수강생들이 청중 앞에 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매번 수업 때마다 발표를 시켰고 너무 심하지 않게 평가해주었으며 그들이 타인 앞에서 거리낌 없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청중 앞에 서는 두려움을 극복하면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침착함"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라고 거듭 강조했다. "당신의 주변에는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시작도 하기 전에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카네기는 "당신을 막는 것은 오직 당신의 생각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주입시켰다. 그는 1932년에 「아메리칸 매거진」 기자에게 "대중 앞에서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수영과 비슷하다. 둘 다 연습이 가장 좋은 스승이고 두려움이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카네기가 대공황 초기에 걸은 길은 훗날 큰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카네기는 널리 알려진 대중연설 강좌와 조금씩 쌓여가는 작가로서의 명성, 전국 라디오 방송,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미국인의 정서와 가치를 꿰뚫는 날카로운 감각 덕분에 더 큰 성공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써서 엄청난 부와 명예, 영향력을 얻게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계발에 굶주려 있다
뉴욕의 대형 출판사에 다니는 편집자가 카네기의 대중연설 강좌에 등록해 카네기의 메시지와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업을 한 차례 들은 그는 카네기에게 책을 내자고 했다. 그 가벼운 제안이 일련의 폭풍 같은 사건들을 휘몰고 왔고 궁극적으로 카네기는 물론이고 미국 문화까지 뒤바꾸어 놓았다.
리언 심킨은 브루클린의 러시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지적이고 저돌적이며 야심 찬 젊은이로 1924년에 새로 생긴 출판사 사이먼앤드슈스터에 회계 담당자로 취직했다. 심킨은 카네기의 첫 수업이 끝나고 카네기에게 다가갔다. 우선 그는 카네기의 강좌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고 수강생들의 반응이 열광적이더라도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에만 한정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책으로 쓴다면 그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질 것"이라고 했다.
강좌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던 데가 예전에 출간한 저서 『비즈니스 대중연설』의 원리와 사례 덕분에 어느 정도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특히 수강생들과 로터리 클럽, 사업가 집단, 심지어 대학생들에게 수백 번도 넘게 했던 한 강의가 유용했고 실제로 책 주제의 중심 항목이 되었다. 카네기는 처음에 책 제목을 환영받는 반응을 얻는 방법(How to Get the Welcoming-In Response)이라고 붙였지만 1930년대 중반에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법(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국내에서는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등의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으로 바꾸었다. 카네기는 1935년에서 1936년까지 강의와 라디오 진행의 바쁜 일정 사이에 틈틈이 원고 작업을 했다.
사이먼앤드슈스터는 효과적인 광고 전략을 세웠다. 서점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도 주요 도시의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출판사와 저자의 어느 정도 낙관적인 전망을 안은 채로 1936년 11월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출간되자마자 놀랍게도 모두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뜨거운 반응이 나왔다. 첫 3개월 동안 7만 부가 팔려나갔다. 대히트를 예감한 사이먼앤드슈스터는 곧바로 더욱 적극적인 홍보에 돌입했다. 우편주문도 반응이 좋았다. 구매자들이 서로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추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수요가 폭발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1937년 8월 무렵 17쇄가 인쇄되었고 연말까지 65만 부가 판매되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저자에게 18만 달러의 거금을 안겨주었다. 1939년에는 드디어 100만 부 판매를 달성했다. 향수 10년 동안 약 500만 부가 팔렸고 1950년대에 페이퍼백 출판이 시작되면서 80년 동안 3000만 부가 팔려나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되었다.
미국인들이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그렇게 열렬하게 반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측면에서 그 책은 가난을 딛고 성공한 시골 출신, 생각을 연기로 표현한 배우, 상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판 세일즈맨, 일반 대중을 상대하는 저널리스트, 미국 문화의 기본적인 가치를 파고드는 저자, 타인의 성공을 도와주는 열정적인 강사 등을 거쳐온 카네기 삶의 모든 요소가 합쳐진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그 책은 대공황으로 크게 예민해진 대중의 신경을 건드렸다. 카네기의 책은 미국인의 행동과 포부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을 갈가리 찢었고,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성공으로 끌어올려 줄 구명 밧줄을 절박하게 기다리며 허우적거리는 수백만 미국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네기의 긍정적인 조언은 그들에게 구명밧줄이 되어주었다. 한마디로 카네기는 제때,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들고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카네기의 베스트셀러에 담긴 본질과 그것이 충족시켜준 사회적 욕구는 보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그 책은 대공황과 맞물려 있었지만 미국 문화의 대변동을 반영했다. 즉, 미국 문화는 품위와 신앙심, 전통을 강조하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에서 20세기 현대 관료주의적 소비가 만들어내는 수요와 욕망으로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미국 개인주의의 변화하는 본질과 수요와 기대는 카네기의 책이 싹트고 꽃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