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
전 세계를 배회하는 ‘국가부도’라는 유령
2007년 봄부터 시작된 금융위기가 점점 고조될수록 각국 정부 및 중앙은행은 국제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더욱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융위기가 채무위기로 변질되고 심각한 경기후퇴로 악화되자 이제는 국가부도라는 유령이 잠자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2009년 초가 되자 우려에 빠진 대중뿐 아니라,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언론 매체에서도 ‘국가부도’라는 말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공공 예산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예산 적자가 증가하게 될 때 국가의 지급 불능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국가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화폐를 찍어낸 사례는 이미 여러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구원의 흑기사’, 즉 최후의 돈줄이 되어준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라고 이런 역할을 무한정 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에는 화폐개혁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부도와 화폐개혁에 대한 우려는 현실성 없는 공허한 말이 결코 아니다. 오랜 근거가 있는 염려이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7년부터 진행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공공예산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채 및 그 증가율에만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는 복잡한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당연히 고려해야 할 다른 영역도 있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지급이 약속된 공무원 연금과 일반 연금보험, 개인 부채, 온갖 종류의 부동산을 담보로 한 담보대출, 금유 부문(은행과 보험회사)을 비롯한 민간 기업의 부채 등이 그런 예이다. 이들은 모두 금융위기 및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위기로 힘겨운 압박을 받고 있다. 이는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문제이며 당연히 그에 따른 영향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부채 의존적 경제, 즉 ‘빚에 기댄 삶’이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국가부도라는 유령에 정면으로 대처하는 것, 경제적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하고도 유용하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 역사의 교훈
대외부채
국가부도에는 늘 대외부채가 전략적인 역할을 한다. 자국의 여신시장이 말라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외국으로 가서 할 수 있는 만큼 부채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점차 ‘부도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부채는 보다 나은 통화, 그러니까 주로 미국 달러화를 중심으로 한 경화(硬貨) 형태로 조달되기 때문이다. 부채 차입국은 신용등급이 낮기 때문에 차입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 채권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제공해야 한다. 외국의 거대 은행들은 그런 전제가 있어야만 여신을 제공하려 한다. 이에 따라 부채 상환액도 과도해져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재정적 부담이 단기간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여신은 투자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대개 경상비 지출용 자금으로도 쓰인다. 이런 지출은 경제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
취약하거나 위태하기까지 한 자국 통화 환율을 외국 자본주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주로 미국 달러화에 고정시킨다. 이와 같은 고정 환율 제도는 언제나 파멸의 출발점이다. 대개는 오래 가지 않아 주로 미국계로 구성된 국제 투기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거대 투기세력은 약세 통화에 압력을 행사해 이 통화를 대규모로 달러화를 받고 팔아버린다.
투기 세력의 압력에 굴복할 필요도 없고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도 피하기 위해서 채무국은 금리를 올리고 동시에 환율도 방어한다. 이에 필요한 자금이 더 이상 자국에서는 조달되지 못하면 이들 국가는 발권력에 의지한다. 이는 급격한 종말로 가는 결정적 출발점이다. 물가는 상승하고 외국 채권자의 신뢰도 크게 무너진다. 또 물가가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 다음 단계는 뻔하다. 지급불능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채권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외국의 여신 제공자들과는 협상에 들어간다. 이런 협상은 채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또 이자지급이 다시 시작되도록 하기 위한 신규 자금제공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금 서술한 국가부도의 기본적 흐름은 19세기 이래로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사례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과거 발칸 지역, 북아프리카, 2차 대전 후 서방의 족쇄에서 풀려 독립국가의 길을 간 아프리카 각국에서 일어났던 국가부도의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차례차례 독립하게 된 아시아 각국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점은, 그러한 파산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서방의 대형 은행의 대규모 여신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예를 들어 조지 소로스 같은 대규모 투기세력 또한 여기에 관여돼 있었다. 이들은 강압적으로 몇몇 통화의 무릎을 꿇리기도 했고 심각한 위기를 촉발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1990년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위기를 들 수 있다.
조세국가의 한계
조세 부담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늘어났다. 게다가 다른 부수적인 효과가 하나 더 있다. 세금이 결제 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간과되며, 수많은 경고도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국가의 자금수요가 늘어난다거나 ‘조세 정의’ 같은 논거를 단골로 갖다 댄다. 세금 인상에 사회적 윤색(潤色)을 하는 것이다. 세금은 평균 이하로 혹은 전혀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국가가 주는 온갖 종류의 급여 혜택은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더 많은 정의’를 외쳐댄다. 그 어떤 나라라 해도 이렇게 가면 결국에는 손익이 맞을 수가 없다!
직접세, 누진세, 소득과 무관한 세금이 높이 올라갈수록 국민들의 긍정적인 의욕은 그만큼 더 하락한다. 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연구하고, 혁신하고 투자하는 일 등은 시간이 갈수록 돈이 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 대비 조세부담률은 수많은 옛 선진공업국의 경우 벌써 수십 년 전에 50%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수의 능력 있는 납세자들은 이제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 예산을 만들어주려고 일하는 꼴이 돼버렸다. 그 결과 개인과 기업은 지하경제로 엇나가 불법적 활동을 하게 된다. ‘물물교환’이 의미를 갖게 되었고, 사적(私的) 회사 지출을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는 식의 ‘경비 유용’ 또한 작금에 비로소 되살아난 일이 아니다. 세금 횡령, 세금이 유리한 외국으로의 도피 아니면 아예 조세 피난처로의 이민이 널리 퍼져 버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창 일 잘할 나이’에 일치감치 일터에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만 보더라도 국민경제가 점차 성장 동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경제는 경기침체-하강-경제적 몰락의 길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적시에 시장경제의 규칙에 따라 성공적으로 ‘원기 회복’을 하지 못하면 경제는 결국 구제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수백 년 묵은 역사적 경험이다.
경제의 역동성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경기침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면 국가는 그만큼 부채 차입을 가속화해 이에 대응하게 된다. 유권자 다수가 자신에게 돌아올 국가의 급여,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성 지출을 삭감하는 데 찬성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국가가 특별세로 부자와 기업에게 불리한 정책을 편다면, 그건 국가 경제를 무너뜨리는 길이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전개되면 국가는 빠져나올 길 없는 부채의 덫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 중에서도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국가부도다.
부채의 한도는 어디까지인가?
국민총생산에서의 한도
원리금 상환액은 GDP에서 조달되어야 한다. 국가가 더 많은 빚을 질수록, 또 금리가 더 높을수록 부담은 커진다. 따라서 부채의 상태를 연간 GDP와 연관시키고 그로부터 부채비율을 계산해 내는 일은 유의미하고도 필요하다. 결정적인 것은 실질 성장, 그러니까 실질 GDP가 줄어드는가, 정체하는가 아니면 증가하는가 하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경제성장이라는 것이다.
개별 국가의 부채비율이 제시되면 이제 GDP 대비 비율이 얼마 정도면 ‘적당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다. 한 나라가 부담할 수 있는 비율은 다른 나라에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제3의 나라에서는 동일한 규모의 부채가 지급불능 또는 심지어 국가부도까지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컨대 유럽연합 지침에는 부채는 GDP의 60%, 재정적자는 3%로 규정돼 있지만 이는 평균적인 규정일 뿐이다. 이 수치는 개별 국가가 부채의 한도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그것을 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한다.
부채 상환 측면에서의 한도
이자와 원금 상환액을 합치면 부채 상환액이 나온다. 이 상환액은 부채 차입의 전략적 변수이다. 채무자가 이자도 내지 못하고 상환도 정해진 기간 내에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상환액은 한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부채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일시적인 지급 유예, 즉 모라토리엄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로 부채 만기의 재조정이 일어난다. 상환 기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채권국은 채무국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므로 신규 자금을 유입해 다시 일어서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부채 상환은 어떻게 기능할까? 부채를 상환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채권 만기가 도래하면 그 채권은 새로운 부채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시장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금리와 부채 만기는 통화 및 그 통화에 대한 종합적인 신뢰도에 따라 정해진다. 나라의 신용도가 나쁠수록 금리를 더 높아지고 만기는 짧아진다.
이제 이자 지급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채무자가 부채를 계속 끌어 쓰려면 자기 신용등급이 악화될수록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하고 그 금리도 계속 올려줘야 한다. 이는 대개 제동을 거의 걸 수 없는 어떤 격변의 출발점이 된다. 이자 지급액이 늘어나므로 경상 수입에서 이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 나라의 다른 지출 항목에 쓸 돈은 갈수록 더 줄어들어 뭔가를 해볼 여지가 사라진다. 그리하여 단기간에 국가지출을 급격하게 낮춤으로써 기초 재정수지 적자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나라는 지급불능 직전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 국가부도는 상환 불능보다 훨씬 더 큰 파급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국가 기관은 일찌감치 그 이전에 국내외 채권자들과 논의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적 사례에 따르면 모든 나라는 늘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국가가 부채를 차입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조세저항을 피하면서도 지출 자금을 조달하는 데는 그 방법 말고는 없다. 국가는 심지어 정기적으로, 매번 논거를 바꿔가면서 부채 차입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제시해 전주(錢主)들을 설득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정치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나라가 망할 정도로 빚을 떠안는다. 공공 재정의 역사는 곧 국가부도의 역사라는 말은 그런 까닭에 타당한 것이다. 그런 역사는 고대에서 현재까지 계속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채무
전체 결산
총 부채의 전체적인 모습은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은 준국가부채를 고려할 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 준국가부채는 1993년에 이미 국가별로 이탈리아 245%, 독일 182%, 프랑스 130%, 영국 74% 수준이었다.
2000년 이후 발생한 법적 연금보험의 높은 적자폭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암시한다. 당시 이후 상황은 더 나아진 게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사회보험 적자가 점점 더 국가 지원금으로 지탱되는 추세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국가 지원금을 받으면 가장 인기를 얻지 못하는 방법인 보험료 인상은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다. 그렇다. 보험료 인상은 일반적으로 부당하거나 비사회적 또는 터무니없는 짓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사회보험 재정을 국가를 통해 조달하면 당연히 후폭풍이 따른다. 공공예산 적자가 증가하고 따라서 국가부채에 따르는 이자 지급액에도 영향이 있다. 금리는 현재로는 예외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경제 및 금융 체계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가까운 시기에 금리는 다시 크게 상승할 것이다. 역사적 평균치를 상회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지도 모른다. 혹 있을지 모르는 인플레이션까지 여기에 수반된다면 압박은 갑절이 된다.
공공 부문 지출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자지급액, 사회보험 지원금, 퇴직공무원에게 지급하는 공무원 연금이 조세 수입의 절반을 흡수해 버리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더 나아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중앙정부 사업, 그러니까 사회간접자본의 유지, 대체 및 확장에 쓸 돈은 따로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미래의 경제성장 달성에 필요한 전제 조건들은 더 악화된다. 늘어나는 소비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절박하게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제 국가재정 조달이 필연적으로 그 한계에까지 이르고 더 나아가 그 한계마저 넘어서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국가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부도의 길로 접어든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가 절대 아니다. 따라서 건전화 프로그램의 구상과 신속한 이행이 시급하다. 그래야만 임박한 재앙을 피할 수 있다.
근본적인 개혁
개혁은 가능한가?
국가는 투자를 위한 빚은 져도 된다는 고전적 부채 차입 원칙이 현실의 정치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속적으로 균형 예산을 유지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 공공 지출과 수입은 유연하게 매년 조정되는 게 아니다. 경기가 하향반전이나 후퇴하게 되면 적자는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말이다.
사회보험에서 고용주가 부담하는 몫을 없애는 일은 손쉬울 수 있다. 고용주가 지금까지 납부해 오던 부담액을 임금의 구성 요소로 지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고용주는 더 이상 의무를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험료 인상은 오로지 근로자, 다시 말해 피보험자이자 수혜자의 부담이 된다. 요약하면 이는 재정 조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개혁인 것이다. 그러나 특히 노동조합 측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철석같이 고용주와 근로자의 균형적 부담을 고수한다.
공영(公營) 병원의 조직 및 재정 자립을 위한 개혁도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병원들은 공적 수단을 통해 적자를 보전받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위험도를 고려한 개인별 의료보험료 도입도 일반적으로 격렬한 거부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정당이 그렇게 강력한 유권자 집단을 실망시키고 싶겠는가? 원가를 충당할 수 있는 보험료 수준이 너무 높아 경제적으로 힘에 부치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조금을 지급하면 된다는 논거는 사회복지 차원에서도 사실 반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개혁 역시 실질적인 것의 권력, 낯익은 상황에 걸려 좌초할지 모른다.
공공 지출 및 그 재정 조달의 새로운 분배를 떠들기는 했지만, 이는 전통적으로 거대한 저항에 부닥친다. 지방자치단체, 특히 (스위스 연방의) 각 주는 자기의 과업을 가능한 한 유지하려 한다. 이들의 논리는 연방의 보조성 원칙, 즉 상위 단위는 하위 단위가 할 수 없는 일만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있다. 이들에게는 중앙 집중화 경향은 눈엣가시와도 같다. 그런 경향은 궁극적으로 연방 국가가 아니라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 상위 단위에서 자신들의 과업 수행에 필요한 돈을 대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연방이 지방에 이전해 주는 예산이 점차 증가해, 상황에 따라서는 중앙정부의 재정적 과부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농업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보조금의 경우도 상황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보조금 감축을 조세 인하와 조합하는 종합적 해법이 첫눈에 보이게는 더 높은 성공 가능성을 약속해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세기적 개혁을 위해서는 그 의지를 관철할 수 있으며 폭넓게 지지를 받는 정부가 필요할 것이다.
책임성이 더 강하고 위기에도 더 안전한 국가 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여러 큰 장애를 먼저 이겨내야 한다. 그저 미용(美容) 수준에 불과한 개혁은 늘 전형적인 일련의 논거에 걸려 진행되지 못한다. 경제가 내리막길일 때에는 개혁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거나 경기 정책상으로도 반생산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경제가 다시 위로 움직이면 사람들은 일단 기다려보려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 다시 저절로 더 좋아지잖아. 개혁은 경기를 질식시킬지도 몰라’라며 개혁을 포기한다.
이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본적인 역사적 경험이 뻔히 존재하지만 이렇게 뜻은 좌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을 바꾸는 대대적인 개혁이란 일단 국가가 지급불능의 목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실현 가능성이 생긴다. 따라서 국가부채의 장기적인 흐름이 중단되지도 않고 방향이 바뀌지도 않는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현실적인 시나리오
은행 및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아직도 3∼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최종 수지를 내볼 수 있을 것이다.
금리는 여러 해 이상 계속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 수준은 제로 금리를 조금 웃도는 선에서 움직일 것이며 또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오르는 금리는 경기회복에 대한 독약일 수 있다. 경기는 어떤 금리 상승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취약하다. 기록적 수준의 국채 발행은 매우 낮은 수익률과 발권은행을 통한 전량 매수에 힘입어서만 가능하다. 국채를 매입하는 은행은 그 자금을 발권은행이 제공하는 싼 여신으로 조달하며 이 과정에서 금리 격차 덕분에 짭짤한 수익도 올린다. 직접 채권시장을 통해 매각하는 것은 그런 저금리로는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은 계속 극도로 유리한 여신에 의존해 있다. 혹 나중에 물가가 오른다 해도 발권은행은 통화긴축 정책의 사용을 주저할 것이다. 경기에 손상이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금리 동향을 장기적으로 주시하면 30년 금리 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주기는 30년짜리 미국 재정증권(Treasury Bonds)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미국 외에도 그 영향력이 높다.
위기는 개발도상국에서 발발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해당국 주식시장이 이미 2009년 가을에 고평가된 상태였으며 과열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특히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소위 브릭스(BRICs) 4개국이 그런 예이다.
그러므로 국가부도 및 화폐개혁으로 가는 카운트다운은 완전히 제 속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 빨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공공부채에만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지니는 것은 사회보험 적자의 증가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노령연금을 비롯한 각종 연금과 건강보험이다. 뿐만 아니라 은행, 대형 민간기업 및 가계 또한 늘 위기를 안고 있는 동반자이다. 이들 역시 장기 침체는 물론 오래 지속되는 경제위기를 견딜 능력이 없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